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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高麗侍中康靖公挽 고려 시중 강정공을 애도하며 | 기회근 | 2026-07-26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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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侍中康靖公挽 李奎報 三朝翼亮,鐵心堅。 富貴功名,四十年。 鳳閣早腰丞相印,鰲山兼領史臣權。 金章解早,方圖逸;紫府徵忙,亦邀賢。 池館蕭然空碧草,玉簪零落淚如泉。 고려 시중 강정공을 애도하며 이규보 세 임금을 받들어 나라를 보필하였으니, 그 충성스러운 마음은 쇠처럼 굳건하였다. 부귀와 공명도 사십 년 동안 나라와 함께하였다. 일찍이 재상의 인장을 허리에 차고 사관의 직임까지 함께 맡아 나라의 역사를 책임졌다. 이제는 금인(金印)을 풀고 물러나 편안히 여생을 보내려 하였건만, 하늘의 부름은 너무도 갑작스러워 그 어진 이를 서둘러 데려가 버렸구나. 이제 연못과 정자는 적막하여 푸른 풀만 덧없이 무성하고, 옥비녀는 주인을 잃어 흩어진 듯, 남은 이들의 눈물은 샘물처럼 끝없이 흐르는구나. 어구 풀이 三朝 : 세 임금을 섬김. 翼亮 : 임금을 보필하다. 鐵心堅 : 충성심이 쇠처럼 굳다. 鳳閣 : 중서문하성(재상부). 腰丞相印 : 재상의 인장을 허리에 차다(재상이 되다). 鰲山 : 보통 예문관·한림원 등 사관(史官)의 관청을 가리키는 별칭으로 사용. 兼領史臣權 : 사관의 직임도 함께 맡다. 金章 : 금인(金印), 즉 고위 관직. 解早 :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다. 方圖逸 : 이제 편안히 쉬려 하였는데. 紫府 : 하늘의 조정(천상), 곧 죽음을 비유. 徵 : 부르다. 池館 : 고인의 집과 정원. 玉簪 : 옥비녀. 여기서는 부인 또는 유족을 비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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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高麗承奉郎摠部散郎賜緋魚袋 贈三重大匡斂議政丞奇公行狀 영안왕 행장 | 기회근 | 2026-07-26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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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承奉郎摠部散郎賜緋魚袋 贈三重大匡斂議政丞奇公行狀 李穀 稼亭 曾祖諱允肅金紫光祿大夫師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判吏部事諡康靖。祖諱洪穎左右衛保勝郎將贈銀青光祿大夫尚書右僕射。考諱琯奉翊大夫三司右使上將軍公諱子敖字子敖幸州人。始以門功拜散員。至元庚寅叛王乃顏之黨哈丹與其眾東走。貞番闌入我疆。逆氣張甚。所至殺掠。忠烈王偕帝女安平公主率百官入江華島避其鋒。州郡皆據險且戰且守。中外洶洶。公時為中軍偏將。負纛前驅。頗有功。賊平。累遷摠部散郎。出守宣州。所居稱職。而有去思。自以奕世衣冠。仕不甚達。性又寬厚。且不喜干謁。日與賢士大夫遊。務盡其歡。不以家人資產產年六十三。天曆戊辰(生明太祖同年)卒于家。夫人三韓國大夫人李氏。左僕射諱湊之孫。國子祭酒行儉之女。族大德茂。克配君子。生五男三女。今皇后其季也。謹按奇氏自國初以武材稱世。著其勞及仁王妃任氏生毅明神三王。號恭睿王太后。而公之祖母實后弟平章諱濡之孫。判事諱景恂之女。自是任奇兩姓益大以貴。甲於東國。侍中康靖以冢宰相毅明神當毅王末年。武人鄭仲夫作亂。殲朝臣。擅廢立。自是權臣繼踵。搢紳重足。而能從容以道。終始扶持不失舊物。侍中之力居多矣。僕射慷慨持節義。當國步艱難。晉陽公崔怡頗擅擅權。連姻權臣。不肯阿諛。每曉以逆順禍福。姦不得發。怡旣病。其子沆不肖。人多附沆。而僕射獨疾之。怡嘗問後於人。僕射卽擧賢以對。及沆嗣。以前嫌見斥。飲恨而卒。時人惜之。三司始諱瑋。瑋後避國諱更焉。初以將軍出為忠州牧。專尚寬和。蒲鞭薤水。民不忍欺。敢政最。召拜上將軍。俄遷鷹揚軍國制。凡軍政賞罰。將校進退。一聽於鷹揚。三司不私其恩。威動以禮法。軍士咸服。由是驟登相府。忠烈王以巨室國老。尤加禮貌。哀榮無及焉。公之妣延興郡夫人朴氏。典法判書諱暉之女。侍中李文真公藏用之外孫也。至元元年有詔。今歲王公郡牧咸會上都。王其乘驛而朝。文貞以平章從。忠烈王入觀。寵遇異常。文貞德業文章。聞于中國。時右丞相東平忠憲王基器重之。待以殊禮。坐必虛其右。翰林王學士諸公。欽其風裁。皆願內交。凡所對揚。休命與本國興利除害者。民到今賴之。公內外皆名家。由高祖門下侍郎平章事諱守全以下。出入將相。功施于民。而不食舊德。卒于下位。天將大其報而有待于後乎。長男輅先公沒。次轍以斂議政丞。今封德城府院君。次轅以斂議贊成事。今封德陽君。次輈大匡元尹。次輪右常侍。長女適商議評理趙希忠。次適典議令廉敦紹。孫男凡十一人。長天麟、小字完澤。普化以版圖摠郎入侍輩。轂今為直省舍人。次仁傑、小字帖睦爾。適溥化以軍簿摠郎宿衛闕庭。次天駟有傑田龍。皆郎將。餘未仕。孫女七。長適弘福都監判官洪寶環。餘皆幼。公之家世功德。載在國史。公之事業。焯焯在人耳。今掇其大槩為行狀。以備採擇焉。 至正八月初一日謹狀 고려 승봉랑 총부산랑 사비어대(賜緋魚袋) 증 삼중대광 염의정승(贈三重大匡斂議政丞) 기공 행장 이가정(李穀, 호 稼亭) 지음 공의 증조부는 휘(諱) 윤숙(允肅)이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사문하시랑(師門下侍郎)·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상장군(上將軍)·판이부사(判吏部事)를 지냈으며, 시호는 강정(康靖)이다. 조부는 휘 홍영(洪穎)으로 좌우위보승낭장(左右衛保勝郎將)을 지냈고, 뒤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관(琯)으로 봉익대부(奉翊大夫)·삼사우사(三司右使)·상장군을 지냈다. 공의 휘는 자오(子敖)이며 자(字)도 자오이다. 행주(幸州) 사람이다. 처음에는 조상의 공훈으로 산원(散員)에 임명되었다. 원(元)나라 지원(至元) 경인년(1290)에 반란을 일으킨 왕(王) 나얀(乃顏)의 무리인 하단(哈丹)이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나 국경을 넘어 우리나라에 침입하였다. 적의 기세는 매우 흉악하여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충렬왕은 원나라 황녀인 안평공주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들어가 적의 예봉을 피하였다. 각 주와 군에서는 험한 곳을 의지하여 싸우고 지키니 나라 안팎이 크게 술렁였다. 당시 공은 중군(中軍)의 편장(偏將)이었는데, 군기를 메고 선봉에서 돌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적이 평정된 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총부산랑(摠部散郎)이 되었고, 선주(宣州)의 수령으로 나갔다. 다스리는 곳마다 직분을 잘 수행하여 백성들이 떠난 뒤에도 그의 덕을 그리워하였다. 그러나 공은 대대로 벼슬한 명문가의 자손이었음에도 벼슬길이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남에게 아첨하거나 청탁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날마다 어진 선비와 사대부들과 교유하며 즐거움을 함께하는 데 힘썼고, 집안의 재산을 늘리는 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향년 예순세 살에 천력(天曆) 무진년(1328, 명 태조와 같은 해에 출생)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이씨(李氏)이다. 좌복야(左僕射) 휘 주(湊)의 손녀이며, 국자제주(國子祭酒) 행검(行儉)의 딸이다. 가문이 훌륭하고 덕이 높아 군자의 배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슬하에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두었는데, 막내딸이 지금의 황후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기씨(奇氏)는 나라가 세워진 이래 무예로 이름을 떨쳤다. 그 공훈으로 인왕비(仁王妃) 임씨가 의명왕(毅明王)·신왕(神王)·삼왕을 낳아 공예왕태후(恭睿王太后)가 되었으며, 공의 조모 또한 태후의 아우인 평장사(平章事) 임유(任濡)의 손녀이고, 판사(判事) 임경순(任景恂)의 딸이었다. 이때부터 임씨와 기씨 두 성씨는 더욱 번성하고 귀하게 되어 동국에서 으뜸가는 명문이 되었다. 시중 강정공은 재상으로서 의명왕을 보필하였다. 의왕 말년에 무신 정중부가 난을 일으켜 조정의 신하들을 죽이고 임금을 마음대로 폐립하였다. 그 뒤 권신들이 차례로 권력을 잡아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몸을 사렸으나, 강정공은 끝까지 도의(道義)를 지키며 조정을 붙들어 옛 제도를 잃지 않게 하였으니, 그 공이 매우 컸다. 우복야는 강직하고 절의를 지켰다. 최이(崔怡)가 권력을 독점하던 때 권신들과 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끝내 아첨하지 않았다. 늘 역리와 화복을 깨우쳐 간사한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최이가 병들자 그의 아들 최항(崔沆)은 인물이 못되었는데 많은 사람이 그에게 붙었으나 우복야만은 그를 미워하였다. 최이가 후계자를 누구로 할지 물었을 때 우복야는 훌륭한 사람을 천거하였다. 최항이 뒤를 잇자 예전의 일 때문에 배척당하여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삼사우사의 이름은 처음에는 위(瑋)였으나 뒤에 국왕의 이름을 피하여 고쳤다. 처음에는 장군으로 충주목사가 되어 백성을 너그럽고 화평하게 다스렸다. 형벌은 마치 부들로 만든 채찍과 같아 가볍고, 정치는 부추를 씻은 물처럼 맑아서 백성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치적이 가장 뛰어나 상장군으로 불려 들어왔고, 곧 응양군국제(鷹揚軍國制)로 옮겼다. 군사의 상벌과 장수의 진퇴를 모두 응양부에서 맡았는데,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지 않고 예법에 따라 위엄 있게 다스리니 군사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이 때문에 곧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충렬왕은 그를 명문거족의 원로 대신으로 특별히 예우하였고,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나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공의 어머니는 연흥군부인(延興郡夫人) 박씨이다. 전법판서 박휘의 딸이며, 시중 이문진공 장용의 외손녀이다. 지원 원년(1264)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그해 왕과 공후, 군수들이 모두 상도(上都)에 모이도록 하였고 왕은 역마를 타고 조회하라고 하였다. 문정공은 평장사로서 충렬왕을 수행하였다. 충렬왕이 입조하였을 때 특별한 총애를 받았고, 문정공의 덕행과 학문과 문장은 중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당시 우승상 동평충헌왕(東平忠憲王)은 그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여 특별한 예로 대우하였고, 함께 앉을 때마다 오른쪽 자리를 비워 두었다. 한림원의 여러 학사들도 그의 풍모를 존경하여 모두 친분을 맺고자 하였다. 그가 황제에게 아뢰어 본국의 이익을 증진하고 해로운 일을 제거하도록 한 정책은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 혜택을 입고 있다. 공은 외가와 친가 모두 명문이었다. 고조 문하시랑 평장사 수전(守全) 이후 대대로 장수와 재상을 지내며 백성들에게 공을 베풀었으나 조상의 공덕만 믿지 않았고 끝내 높은 벼슬에서 물러났다. 하늘이 장차 그 복을 크게 하여 후손에게 남겨 두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장남 로(輅)는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둘째 철(轍)은 염의정승이 되었으며 지금은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셋째 원(轅)은 염의찬성사가 되어 지금은 덕양군(德陽君)에 봉해졌다. 넷째 주(輈)는 대광 원윤(大匡元尹)이다. 다섯째 륜(輪)은 우상시(右常侍)이다. 맏딸은 상의평리 조희충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전의령 염돈소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모두 열한 명이다. 맏이는 천린(天麟)이며 어릴 적 이름은 완택(完澤)이다. 보화(普化)는 판도총랑이 되어 궁중에서 시종하였다. 곡(轂)은 지금 직성사인(直省舍人)이다. 다음은 인걸(仁傑)이며 어릴 적 이름은 첩목이(帖睦爾)이다. 보화는 군부총랑으로 궁궐 숙위에 종사하였다. 다음은 천사(天駟), 유걸(有傑), 전룡(田龍)으로 모두 낭장이다. 나머지는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손녀는 일곱 명인데, 맏이는 홍복도감판관 홍보환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려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공의 집안의 공덕은 이미 국사(國史)에 기록되어 있다. 공의 업적 또한 사람들의 귀에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이제 그 대강만을 뽑아 행장을 지어 훗날 사관이 채택하는 자료로 삼도록 한다. 지정(至正) ○년 8월 초하루 삼가 행장을 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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