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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高麗侍中康靖公挽 고려 시중 강정공을 애도하며 | 기회근 | 2026-07-26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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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侍中康靖公挽 李奎報 三朝翼亮,鐵心堅。 富貴功名,四十年。 鳳閣早腰丞相印,鰲山兼領史臣權。 金章解早,方圖逸;紫府徵忙,亦邀賢。 池館蕭然空碧草,玉簪零落淚如泉。 고려 시중 강정공을 애도하며 이규보 세 임금을 받들어 나라를 보필하였으니, 그 충성스러운 마음은 쇠처럼 굳건하였다. 부귀와 공명도 사십 년 동안 나라와 함께하였다. 일찍이 재상의 인장을 허리에 차고 사관의 직임까지 함께 맡아 나라의 역사를 책임졌다. 이제는 금인(金印)을 풀고 물러나 편안히 여생을 보내려 하였건만, 하늘의 부름은 너무도 갑작스러워 그 어진 이를 서둘러 데려가 버렸구나. 이제 연못과 정자는 적막하여 푸른 풀만 덧없이 무성하고, 옥비녀는 주인을 잃어 흩어진 듯, 남은 이들의 눈물은 샘물처럼 끝없이 흐르는구나. 어구 풀이 三朝 : 세 임금을 섬김. 翼亮 : 임금을 보필하다. 鐵心堅 : 충성심이 쇠처럼 굳다. 鳳閣 : 중서문하성(재상부). 腰丞相印 : 재상의 인장을 허리에 차다(재상이 되다). 鰲山 : 보통 예문관·한림원 등 사관(史官)의 관청을 가리키는 별칭으로 사용. 兼領史臣權 : 사관의 직임도 함께 맡다. 金章 : 금인(金印), 즉 고위 관직. 解早 :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다. 方圖逸 : 이제 편안히 쉬려 하였는데. 紫府 : 하늘의 조정(천상), 곧 죽음을 비유. 徵 : 부르다. 池館 : 고인의 집과 정원. 玉簪 : 옥비녀. 여기서는 부인 또는 유족을 비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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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高麗承奉郎摠部散郎賜緋魚袋 贈三重大匡斂議政丞奇公行狀 영안왕 행장 | 기회근 | 2026-07-26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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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承奉郎摠部散郎賜緋魚袋 贈三重大匡斂議政丞奇公行狀 李穀 稼亭 曾祖諱允肅金紫光祿大夫師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判吏部事諡康靖。祖諱洪穎左右衛保勝郎將贈銀青光祿大夫尚書右僕射。考諱琯奉翊大夫三司右使上將軍公諱子敖字子敖幸州人。始以門功拜散員。至元庚寅叛王乃顏之黨哈丹與其眾東走。貞番闌入我疆。逆氣張甚。所至殺掠。忠烈王偕帝女安平公主率百官入江華島避其鋒。州郡皆據險且戰且守。中外洶洶。公時為中軍偏將。負纛前驅。頗有功。賊平。累遷摠部散郎。出守宣州。所居稱職。而有去思。自以奕世衣冠。仕不甚達。性又寬厚。且不喜干謁。日與賢士大夫遊。務盡其歡。不以家人資產產年六十三。天曆戊辰(生明太祖同年)卒于家。夫人三韓國大夫人李氏。左僕射諱湊之孫。國子祭酒行儉之女。族大德茂。克配君子。生五男三女。今皇后其季也。謹按奇氏自國初以武材稱世。著其勞及仁王妃任氏生毅明神三王。號恭睿王太后。而公之祖母實后弟平章諱濡之孫。判事諱景恂之女。自是任奇兩姓益大以貴。甲於東國。侍中康靖以冢宰相毅明神當毅王末年。武人鄭仲夫作亂。殲朝臣。擅廢立。自是權臣繼踵。搢紳重足。而能從容以道。終始扶持不失舊物。侍中之力居多矣。僕射慷慨持節義。當國步艱難。晉陽公崔怡頗擅擅權。連姻權臣。不肯阿諛。每曉以逆順禍福。姦不得發。怡旣病。其子沆不肖。人多附沆。而僕射獨疾之。怡嘗問後於人。僕射卽擧賢以對。及沆嗣。以前嫌見斥。飲恨而卒。時人惜之。三司始諱瑋。瑋後避國諱更焉。初以將軍出為忠州牧。專尚寬和。蒲鞭薤水。民不忍欺。敢政最。召拜上將軍。俄遷鷹揚軍國制。凡軍政賞罰。將校進退。一聽於鷹揚。三司不私其恩。威動以禮法。軍士咸服。由是驟登相府。忠烈王以巨室國老。尤加禮貌。哀榮無及焉。公之妣延興郡夫人朴氏。典法判書諱暉之女。侍中李文真公藏用之外孫也。至元元年有詔。今歲王公郡牧咸會上都。王其乘驛而朝。文貞以平章從。忠烈王入觀。寵遇異常。文貞德業文章。聞于中國。時右丞相東平忠憲王基器重之。待以殊禮。坐必虛其右。翰林王學士諸公。欽其風裁。皆願內交。凡所對揚。休命與本國興利除害者。民到今賴之。公內外皆名家。由高祖門下侍郎平章事諱守全以下。出入將相。功施于民。而不食舊德。卒于下位。天將大其報而有待于後乎。長男輅先公沒。次轍以斂議政丞。今封德城府院君。次轅以斂議贊成事。今封德陽君。次輈大匡元尹。次輪右常侍。長女適商議評理趙希忠。次適典議令廉敦紹。孫男凡十一人。長天麟、小字完澤。普化以版圖摠郎入侍輩。轂今為直省舍人。次仁傑、小字帖睦爾。適溥化以軍簿摠郎宿衛闕庭。次天駟有傑田龍。皆郎將。餘未仕。孫女七。長適弘福都監判官洪寶環。餘皆幼。公之家世功德。載在國史。公之事業。焯焯在人耳。今掇其大槩為行狀。以備採擇焉。 至正八月初一日謹狀 고려 승봉랑 총부산랑 사비어대(賜緋魚袋) 증 삼중대광 염의정승(贈三重大匡斂議政丞) 기공 행장 이가정(李穀, 호 稼亭) 지음 공의 증조부는 휘(諱) 윤숙(允肅)이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사문하시랑(師門下侍郎)·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상장군(上將軍)·판이부사(判吏部事)를 지냈으며, 시호는 강정(康靖)이다. 조부는 휘 홍영(洪穎)으로 좌우위보승낭장(左右衛保勝郎將)을 지냈고, 뒤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관(琯)으로 봉익대부(奉翊大夫)·삼사우사(三司右使)·상장군을 지냈다. 공의 휘는 자오(子敖)이며 자(字)도 자오이다. 행주(幸州) 사람이다. 처음에는 조상의 공훈으로 산원(散員)에 임명되었다. 원(元)나라 지원(至元) 경인년(1290)에 반란을 일으킨 왕(王) 나얀(乃顏)의 무리인 하단(哈丹)이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나 국경을 넘어 우리나라에 침입하였다. 적의 기세는 매우 흉악하여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충렬왕은 원나라 황녀인 안평공주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들어가 적의 예봉을 피하였다. 각 주와 군에서는 험한 곳을 의지하여 싸우고 지키니 나라 안팎이 크게 술렁였다. 당시 공은 중군(中軍)의 편장(偏將)이었는데, 군기를 메고 선봉에서 돌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적이 평정된 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총부산랑(摠部散郎)이 되었고, 선주(宣州)의 수령으로 나갔다. 다스리는 곳마다 직분을 잘 수행하여 백성들이 떠난 뒤에도 그의 덕을 그리워하였다. 그러나 공은 대대로 벼슬한 명문가의 자손이었음에도 벼슬길이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남에게 아첨하거나 청탁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날마다 어진 선비와 사대부들과 교유하며 즐거움을 함께하는 데 힘썼고, 집안의 재산을 늘리는 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향년 예순세 살에 천력(天曆) 무진년(1328, 명 태조와 같은 해에 출생)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이씨(李氏)이다. 좌복야(左僕射) 휘 주(湊)의 손녀이며, 국자제주(國子祭酒) 행검(行儉)의 딸이다. 가문이 훌륭하고 덕이 높아 군자의 배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슬하에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두었는데, 막내딸이 지금의 황후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기씨(奇氏)는 나라가 세워진 이래 무예로 이름을 떨쳤다. 그 공훈으로 인왕비(仁王妃) 임씨가 의명왕(毅明王)·신왕(神王)·삼왕을 낳아 공예왕태후(恭睿王太后)가 되었으며, 공의 조모 또한 태후의 아우인 평장사(平章事) 임유(任濡)의 손녀이고, 판사(判事) 임경순(任景恂)의 딸이었다. 이때부터 임씨와 기씨 두 성씨는 더욱 번성하고 귀하게 되어 동국에서 으뜸가는 명문이 되었다. 시중 강정공은 재상으로서 의명왕을 보필하였다. 의왕 말년에 무신 정중부가 난을 일으켜 조정의 신하들을 죽이고 임금을 마음대로 폐립하였다. 그 뒤 권신들이 차례로 권력을 잡아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몸을 사렸으나, 강정공은 끝까지 도의(道義)를 지키며 조정을 붙들어 옛 제도를 잃지 않게 하였으니, 그 공이 매우 컸다. 우복야는 강직하고 절의를 지켰다. 최이(崔怡)가 권력을 독점하던 때 권신들과 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끝내 아첨하지 않았다. 늘 역리와 화복을 깨우쳐 간사한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최이가 병들자 그의 아들 최항(崔沆)은 인물이 못되었는데 많은 사람이 그에게 붙었으나 우복야만은 그를 미워하였다. 최이가 후계자를 누구로 할지 물었을 때 우복야는 훌륭한 사람을 천거하였다. 최항이 뒤를 잇자 예전의 일 때문에 배척당하여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삼사우사의 이름은 처음에는 위(瑋)였으나 뒤에 국왕의 이름을 피하여 고쳤다. 처음에는 장군으로 충주목사가 되어 백성을 너그럽고 화평하게 다스렸다. 형벌은 마치 부들로 만든 채찍과 같아 가볍고, 정치는 부추를 씻은 물처럼 맑아서 백성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치적이 가장 뛰어나 상장군으로 불려 들어왔고, 곧 응양군국제(鷹揚軍國制)로 옮겼다. 군사의 상벌과 장수의 진퇴를 모두 응양부에서 맡았는데,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지 않고 예법에 따라 위엄 있게 다스리니 군사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이 때문에 곧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충렬왕은 그를 명문거족의 원로 대신으로 특별히 예우하였고,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나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공의 어머니는 연흥군부인(延興郡夫人) 박씨이다. 전법판서 박휘의 딸이며, 시중 이문진공 장용의 외손녀이다. 지원 원년(1264)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그해 왕과 공후, 군수들이 모두 상도(上都)에 모이도록 하였고 왕은 역마를 타고 조회하라고 하였다. 문정공은 평장사로서 충렬왕을 수행하였다. 충렬왕이 입조하였을 때 특별한 총애를 받았고, 문정공의 덕행과 학문과 문장은 중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당시 우승상 동평충헌왕(東平忠憲王)은 그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여 특별한 예로 대우하였고, 함께 앉을 때마다 오른쪽 자리를 비워 두었다. 한림원의 여러 학사들도 그의 풍모를 존경하여 모두 친분을 맺고자 하였다. 그가 황제에게 아뢰어 본국의 이익을 증진하고 해로운 일을 제거하도록 한 정책은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 혜택을 입고 있다. 공은 외가와 친가 모두 명문이었다. 고조 문하시랑 평장사 수전(守全) 이후 대대로 장수와 재상을 지내며 백성들에게 공을 베풀었으나 조상의 공덕만 믿지 않았고 끝내 높은 벼슬에서 물러났다. 하늘이 장차 그 복을 크게 하여 후손에게 남겨 두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장남 로(輅)는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둘째 철(轍)은 염의정승이 되었으며 지금은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셋째 원(轅)은 염의찬성사가 되어 지금은 덕양군(德陽君)에 봉해졌다. 넷째 주(輈)는 대광 원윤(大匡元尹)이다. 다섯째 륜(輪)은 우상시(右常侍)이다. 맏딸은 상의평리 조희충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전의령 염돈소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모두 열한 명이다. 맏이는 천린(天麟)이며 어릴 적 이름은 완택(完澤)이다. 보화(普化)는 판도총랑이 되어 궁중에서 시종하였다. 곡(轂)은 지금 직성사인(直省舍人)이다. 다음은 인걸(仁傑)이며 어릴 적 이름은 첩목이(帖睦爾)이다. 보화는 군부총랑으로 궁궐 숙위에 종사하였다. 다음은 천사(天駟), 유걸(有傑), 전룡(田龍)으로 모두 낭장이다. 나머지는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손녀는 일곱 명인데, 맏이는 홍복도감판관 홍보환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려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공의 집안의 공덕은 이미 국사(國史)에 기록되어 있다. 공의 업적 또한 사람들의 귀에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이제 그 대강만을 뽑아 행장을 지어 훗날 사관이 채택하는 자료로 삼도록 한다. 지정(至正) ○년 8월 초하루 삼가 행장을 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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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崇政大夫判中樞府事貞武公清白吏眩菴先生奇公神道碑銘 | 기회근 | 2026-08-15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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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相國奇公, 一日以書若狀屬廷龜曰: “惟我六代祖判樞公下世, 于今一百五十餘年。 墓在高陽, 石無顯刻, 世遠, 家乘逸, 莫可考, 重懼久益泯無傳。 今就見於國史者曁詞翰諸公所著書集世所流傳者, 而稍次之。 雖十不能二三, 亦足以槪公平生, 子其銘之。” 廷龜嘉公之追遠, 拜受而讀之。 其狀曰: 公諱虔, 幸州人。 天資英發, 學業精粹, 家在靑坡萬里峴, 常徒步往來泮宮, 必誦《中庸》、《大學》。 英廟朝, 以布衣擢拜司憲府持平, 歷戶・刑曹參議、司憲府大司憲, 出宰延安、濟州, 平安道觀察使, 官至判中樞府事。 古者婦人出入無蓋頭, 公創新樣以進, 世至今用之。 達城徐居正《筆苑雜記》及《太平閑話》曰: “延安府有産鮒大池, 前守宰喜食鮒, 弊及民人, 以鮒魚塚嘲之。 公爲此府, 曰: ‘烏可以口腹傷廉?’ 遂絶不食, 非賓讌, 禁勿入罟。 州人大悅, 客作詩以美之。” 又成俔《慵齋叢話》稱: “奇宰樞平生不食鰒, 人問其故, 曰: ‘曾爲濟州牧, 見民苦於採捕, 故不忍也云。’” 濟州舊俗, 不葬其親, 死輒委之壑。 公未上任, 先勅州使備棺槨, 敎以斂葬, 州之葬其親, 自公始, 一境歎服, 敎化大行。 一日公夢見三百餘人拜於庭下叩謝曰“賴公之惠, 得免暴骸, 無以報恩。 公應於今年, 生育賢孫”。 先是, 公之子三人, 皆無嗣, 果是歲, 公之子掌令諱軸, 生子曰禶, 官至應敎。 禶五子: 曰逈、遠、适、進、遵。 逈, 持平; 遵, 應敎。 逈之孫苓, 承旨。 又其孫協, 江華府使。 适之子大鼎, 掌令。 遠之孫孝謹, 皆伯君。 進之子大升, 大司諫。 遵稱服齋先生, 大升稱高峯先生, 皆以道德文章, 冠冕士林。 服齋之子大恒, 判尹。 又其孫自獻, 今領議政。 吁, 盛矣! 公自魯山朝, 休官杜門, 謝絶人事, 手抄《四書》、《三經》、《左傳》、《綱目》。 光廟在潛邸時, 三訪公於私第, 公托以靑盲。 光廟一日持針擬刺以試之, 公瞪視不目逃, 竟不能起公, 而亦免於禍。 卒諡貞武, 諡法: 淸白守節曰“貞”, 剛强直理曰“武”。 且錄其淸白, 子孫因蔭調用者多云。 嗚呼! 公之言行事業, 宜不止此, 而不小槪見, 惜矣。 然我朝人才莫盛英廟朝, 而公不由科第, 擢置臺憲, 則公之拔萃高名, 負一世重者, 爲如何哉? 明良際遇, 身旣自致, 而及乎時事艱危, 度不可有爲, 則視棄官如弊屣, 托疾屛迹, 以終天年, 卒能不變節而名亦完, 玆其所謂守死善道、明哲保身者非耶? 此可見公之大。 銘曰: 德陽之奇, 派于殷師。 綿綿以奕, 積厚爲基。 公惟其裔, 克有遺風。 佑我英廟, 焯著聲庸。 惟廉自持, 惟善之施。 是公細行, 人可以窺。 德行政事, 用儒達吏。 皆學之推, 亦公餘事。 壁立危朝, 見機自守。 礭乎其志, 可謂不負。 利不爲疚, 威莫能屈。 艱貞保哲, 有是哉節。 是宜有後, 奚但陰報? 篤生賢碩, 蟬聯登造。 菀彼佳城, 垂二百年。 孰治公阡? 公有孫焉。 有孫伊何? 國之上相。 其尙未艾, 益遠不忘。 崇祿大夫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 世子左賓客 李廷龜 撰 資憲大夫吏曹判書知三軍府事知經筵禁府春秋館訓練院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官奎章閣提學 世子右賓客 金炳始 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原任奎章閣提學 洪淳穆 篆 右碑銘成於萬曆年間。而今年崇禎五己卯。始入石。嗚呼。二百五十餘年矣。其輾轉蹉過之由。煩不敢究。言顧亦不必究。久鬱之餘。一宗齊力而正鎭。縷息危淺。不能爲有無。殿後數語。以齒髮不得遜避。皇恐皇恐。十月初四日甲辰。不肖後孫正鎭小記。 崇禎紀元後五己卯十月 日 始 壬午十一月 日 後孫 亮衍竣功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무공(貞武公) 청백리(清白吏) 현암(眩菴) 선생(先生) 기공(奇公) 신도비명(神道碑銘)** 이정귀(李廷龜) 월사(月沙) 현재 상국(相國, 영의정)이신 기공(奇公, 기자헌)께서 하루는 글과 행장을 가지고 나(신흠/호: 정구)에게 부탁하여 말씀하셨다. “우리 6대조 판樞公(판중추부사)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이제 150여 년이 되었습니다. 묘소는 고양(高陽)에 있으나 돌에 명확히 새겨진 글이 없고, 세월이 오래되어 가문의 족보(가승)도 실전되어 고증할 길이 없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기록이 사라져 전해지지 않을까 심히 두려웠습니다. 이에 현재 국사(정사)에 나오는 내용과 문한(文翰)을 다루는 여러 공들이 저술한 책 및 세상에 전해오는 기록들을 모아 얼마간 정돈해보았습니다. 비록 십분의 이삼에도 미치지 못하나, 공의 평생을 대략 살피기에는 족하니 그대가 묘갈명을 적어주십시오.” 내(廷龜)가 공의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을 가상히 여겨 절하고 받아 읽어보니, 그 행장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공의 휘(名前)는 건(虔)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타고난 성품이 영민·명달하였고 학업이 정수(精粹)하였다. 집이 청파(靑坡) 만리현(萬里峴)에 있었는데, 항상 걸어서 반궁(泮宮, 성균관)을 왕래하며 반드시 《중용》과 《대학》을 암송하였다. 세종조(英廟朝)[^1]에 부의(布衣, 벼슬 없는 선비)의 신분으로 발탁되어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고, 호조·형조 참의,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연안부사와 제주목사,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으며, 관직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옛적에는 부녀자가 외출할 때 머리를 가리는 개두(蓋頭)가 없었는데, 공이 새로운 양식(너울·장옷 등의 시초)을 창안하여 바치니 세상에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달성(達城)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 및 《태평한화(太平閑話)》에 이르기를, “연안부에는 붕어가 많이 나는 큰 못이 있었는데, 전임 수령들이 붕어 먹기를 좋아하여 그 폐단이 백성들에게 미치니 백성들이 ‘붕어 무덤’이라 비웃었다. 공이 이 부사로 부임하여 이르기를, ‘어찌 입과 배(식욕) 때문에 염치를 상하게 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붕어를 전혀 먹지 않았으며, 연회 때가 아니면 그물질하여 잡는 것을 금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고, 나그네들이 시를 지어 이를 찬양하였다.” 고 하였다. 또한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다음과 같이 칭송하였다. “기재樞(기건)는 평생 전복을 먹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일찍이 제주목사가 되었을 때 백성들이 전복을 채취하느라 고통받는 것을 보았으므로 차마 먹지 못한다’고 하였다.” 제주의 옛 풍속에는 부모가 돌아가셔도 장사를 지내지 않고 죽으면 곧바로 골짜기에 버렸다. 공이 아직 부임하기도 전에 먼저 제주 관원에게 칙령을 내려 관곽(棺郭)을 준비하게 하고, 염습하여 장사 지내는 법을 가르쳤다. 제주의 백성들이 부모를 장사 지내게 된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온 고을이 탄복하고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 하루는 공이 꿈을 꾸었는데, 300여 명의 사람이 뜰 아래에서 절하며 말하기를, “공의 은혜 덕분에 시신이 들판에 노출되는 것을 면하였으니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공께서는 응당 올해에 현명한 손자를 얻으실 것입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의 세 아들이 모두 후사가 없었는데, 과연 그해에 공의 아들인 장령 휘 축(軸)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찬(禶)이라 하였고, 관직이 응교에 이르렀다. 찬(禶)은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형(逈), 원(遠), 괄(适), 진(進), 준(遵)이다. 형은 지평이고, 준은 응교였다. 형의 손자 령(苓)은 승지이고, 또 그 손자 협(協)은 강화부사이다. 괄(适)의 아들 대정(大鼎)은 장령이다. 원의 손자 효근(孝謹)은 개백군(皆伯君)이다. 진의 아들 대승(大升)은 대사간이다. 준은 복재(服齋) 선생이라 칭하고, 대승은 고봉(高峯) 선생이라 칭하는데, 모두 도덕과 문장으로 사림(士林)에서 으뜸이었다. 복재의 아들 대항(大恒)은 판윤이며, 또 그의 손자 자헌(自獻)은 지금의 영의정이다. 아, 성하도다! 공은 노산군(단종) 시절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문을 닫아 걸어 인사를 사절하였으며, 《사서》, 《삼경》, 《좌전》, 《강목》을 손수 베껴 적었다. 광묘(세조)께서 잠저(潛邸, 즉위 전)에 계실 때 세 번이나 공의 사저로 찾아왔으나, 공은 소경(청맹)이라 핑계 대었다. 세조께서 하루는 침을 들고 찔러보아 시험하려 하였으나 공은 눈동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피하지 않으니, 끝내 공을 벼슬길에 일으켜 세우지 못하였고 화(禍) 또한 면할 수 있었다. 돌아가신 후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받았으니, 시법(諡法)에 ‘청백하게 절개를 지킨 것’을 정(貞)이라 하고, ‘강직하고 이치를 곧게 편 것’을 무(武)라 한다. 또한 공의 청백함이 기록되어 자손들이 그 음덕으로 등용된 자가 많았다고 한다. 오호라! 공의 언행과 사업이 어찌 이뿐이겠는가만은, 그 대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애석하도다. 그러나 우리 조선의 인재가 세종조만큼 성한 적이 없었는데, 공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사헌부 관직에 발탁되어 올랐으니, 공의 뛰어나고 높은 명망과 세상의 무게를 짊어진 기상이 어떠하였겠는가? 성군을 만나는 운을 스스로 이루었으나, 시국이 위태로워짐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도모할 수 없음을 알고 관직 버리기를 헌신짝처럼 보았다. 병을 핑계 대고 자취를 숨겨 천수를 다하였으니, 끝내 절개를 바꾸지 않고 이름 또한 보전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죽음으로 도를 지키고 밝고 지혜롭게 몸을 보전한 자’가 아니겠는가? 이로써 공의 위대함을 볼 수 있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덕양(德陽)[^2]의 기씨 성은, 은나라 스승(기자)에서 갈라져 나왔네. 연연히 이어져 온 세대, 두텁게 덕을 쌓아 기반을 이루었도다. 공은 오직 그 후손으로서, 능히 남겨진 풍모를 가졌도다. 우리 세종 임금을 보좌하여, 명성과 공적이 밝게 드러났네. 오직 청렴함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오직 선함만을 베풀었으니, 이는 공의 작은 소행일 뿐이나, 사람들이 엿볼 수 있는 바라네. 덕행과 정사는, 유학을 적용하여 관리의 도리에 달통하였으니, 배움을 미루어 실천한 것일 뿐, 이 또한 공의 여사(餘事)라네. 위태로운 조정에 벽처럼 당당히 서서, 기미를 보고 스스로를 지켰으니, 확고한 그 뜻은,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도다. 이익 때문에 근심하지 않고, 위엄으로도 능히 굴복시킬 수 없었네. 어려움 속에서도 정절을 지키고 지혜롭게 보전했으니, 참된 절개로다. 이러하니 마땅히 후손이 번창함이 있으리니, 어찌 음덕의 보답뿐이겠는가? 도타이 현석(賢碩)들을 낳아, 계속해서 조정에 올랐도다. 울창한 저 아름다운 묘역, 200년이 흘렀도다. 누가 공의 묘지를 단장하는가? 공에게 손자가 있음이로다. 그 손자는 누구인가? 나라의 으뜸 정승(영의정)이라네. 그 융성함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더욱 멀리까지 잊히지 않으리라. 숭록대부(崇祿大夫) 행이조판서(行吏曹判書) 겸판의금부사(兼判義禁府事)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이정귀(李廷龜) 찬(撰)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 지경연금부춘추관훈련원사(知經筵禁府春秋館訓練院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 김병시(金炳始) 서(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영경연(領經筵) 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원임규장각제학(原任奎章閣提學) 홍순목(洪淳穆) 전(篆) 이 비명(碑銘)은 만력연간(萬曆年間)에 지어졌으나, 올해 숭정(崇禎) 다섯 번째 기묘년(五己卯)에 비로소 돌에 새겨졌으니, 아, 이백오십여 년(二百五十餘年)이 지났도다. 그 우여곡절(輾轉蹉過)의 연유(由)는 번거로워 감히 다 밝히지 못하며, 말이 되돌아보건대 또한 반드시 밝힐 것도 없다. 오래 답답하던 끝에 온 종중(一宗)이 힘을 모았는데, 정진(正鎭)은 목숨이 실낱같이 위태로워(縷息危淺) 있고 없음을 능히 가늠하지 못하나, 비석 뒤에 몇 마디를 덧붙임은 나이(齒髮)로 보아 사양(遜避)할 수가 없으니 몹시 황공(皇恐)하고 황공(皇恐)할 따름이다. 갑진년(甲辰年) 시월 초나흗날, 불초(不肖) 후손(後孫) 정진(正鎭)은 삼가 적는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다섯 번째 기묘년(五己卯) 시월 모일(十月 日)에 시작하여, 임오년(壬午年) 십일월 모일(十一月 日)에 후손(後孫) 량연(亮衍)이 준공(竣功)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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