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제목 | 작성자 | 날짜 | 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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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 차례 | 기회근 | 2026-07-03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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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나오는 기씨의 시작 고려시대 중기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기씨와 1세조 3세조 4형제와 3세조모 진원군부인 오씨 7세 황후기씨관련 영안왕의 손자 문제 연천의 이른바 기황후능의 허구 7세 현 할아버지와 신해참화 행주기씨 큰 문중(대파) 조선 태종의 기자재奇自在 대고모의 사면 중흥조 정무공貞武公 청파靑坡 기건奇虔 할아버지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 아들과 손자의 왕실 혼맥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의 증손자 5형제 문중과 기묘사화 고봉 선생이 우리집안의 제사 모시는 사정을 퇴계 선생에게 질문한 것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기대항奇大恒 고봉 선생 광국공신光國功臣 개백군皆伯君 기효근奇孝謹 도승지공 문중 참판공(장성) 문중 별좌공 문중 덕성군(광주) 문중 문민공 문중 미수 허목의 기상국(기자헌)전 기자 후손설 원당 정무공 도선산의 연혁 기씨의 도선산 안성 만전상공 묘역과 대종중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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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역사에 나오는 기씨의 시작 | 기회근 | 2026-07-03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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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에 보이는 가장 오래된 기씨奇氏기록은 삼국사기 권제50/열전10/서기936년09월08일(음) 견훤의 멸망에 나오는 기언奇彦 기록이다. [대상大相 견권堅權, 술희述希, 금산金山, 장군將軍 용길龍吉, 기언奇彦 등으로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왼쪽(左翼)을 맡게 하였다.(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領步騎三萬爲左翼)] 같은 사건을 기록한 고려사절요1권/태조신성대왕/병신19년(936년)가을9월(秋九月) 기록엔 기언奇言으로 나온다. [지천군대장군支天軍大將軍이며 원윤元尹인 능달能達 기언奇言 한순명韓順明 흔악昕岳과 정조正朝인 영직英直 광세廣世 등으로 보군 10,000을 거느리게 하여 왼쪽(左綱)을 맡게 하였다.(支天軍大將軍元尹能達奇言韓順明昕岳正朝英直廣世等領步軍一萬爲左綱)] 언彦과 언言은 소리는 [언]이고 뜻은 [말]로 같지만 꼴은 다른 글자이다. 고려중기 편찬된 삼국사기와 조선초기 고려실록을 보고 요약한 고려사절요의 글자가 다르지만 우리 족보는 오래된 삼국사기의 彦을 따른다.(彦一作言) 기언奇言의 직위가 무엇인지는 그 앞에 나오는 장군將軍 용길龍吉과 원윤元尹 능달能達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지천군대장군支天軍大將軍이면서 원윤元尹 이다. 그러나 이분의 출신이나 나이 등등 다른 정보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금석문이 영월寧越 흥령사징효대사탑비興寧寺澄曉大師塔碑에 있다. 다음은 기호철님의 해설글을 따온다. [이것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흥령사 옛터인 법흥사法興寺에 있는 신라말의 선사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826년~900년)의 비이며 보물 612호이다.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비문을 짓고, 최윤崔潤이 해서로 썼으며, 최환규崔奐規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44년 후인 944년(고려 혜종 원년)에 세웠다. 900년에 입적하여 906년에 시호를 내리고 비의 건립은 온 나라의 먼지가 멈춘 944년에 이루어졌다. 비문의 전면(앞면)은 36행(줄)에 1행(줄) 81자, 음기(陰記:뒷면)는 29행(줄)으로 이루어졌다. 이 비에는 징효대사의 제자들이 뒷면에 기록되어 있다. 각 절의 주지寺主부터 뒷날에 고려 정종定宗과 광종光宗이 되는 왕자와 고위 관료 수십 사람과 명주溟州 등 각 연고 지역의 세력가 등등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인물도 있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고려초 원윤元尹벼슬을 하고 있는 기오奇悟와 기달奇達 두 사람이 나란히 나타난다. 원윤元尹은 936년(태조 19년)에 제정하였는데 왕건이 태봉泰封의 위계位階를 본떠서 정한 것으로, 왕건의 직속 부하를 중심으로 하여 고려 왕권에 복속한 친고려적 정치집단인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960년(광종 11년)에 제정된 사색공복 규정에 따르면 원윤 이상의 관료, 호족은 자삼紫衫(붉은 보라색)으로 정하였으며 976년(경종 1년)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의 실시로 원윤 이상은 18품으로 나뉘어 전시를 받았다. 또한 성종 때에는 원윤 이상에게 말을 하사하고, 문무관을 구분하여 정계正階를 주었다. 이렇게 볼 때 자삼은 관직을 가진 관료층을 포함하면서 원윤 이상의 관계만을 가진 호족층을 포함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광종 때 지나의 문산계文散階와 함께 관계官階에 같이 쓰다가 995년(성종 14년)에 중앙관리의 관계가 모두 문산계를 쓰면서 원윤 등은 향직鄕職체제로 존속하였다. 기오奇悟와 기달奇達 두 사람이 징효대사의 제자들을 열거한 비석의 뒷면에 기록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징효대사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지녔던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으며 기오 바로 다음에 기달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부자父子, 형제兄弟 혹은 가까운 친척親戚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모두 원윤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형제 혹은 4촌형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 비에 나타나는 사람들 가운데 고려사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고려의 건국공신들이며 대부분 명주, 죽주, 청주, 음성 일대의 호족들로 혜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정종과 광종을 옹립한 세력들이었다. 기오 기달 두 사람은 우리 족보에 나타나지 않으며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없지만,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나타나는 장군 기언奇彦과 관련 있는 사람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기씨의 선대를 유추한다면 신라말 고려초 지방(아무래도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넓게 보아 경기도 일대)호족으로 대체로 육두품 세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징효대사와 직간접으로 제자였다는 사실은 최소한 육두품세력 이상이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강성한 호족세력은 아니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태조는 강력한 호족들은 혼인을 통해 회유했는데 이 대상은 아니었고 또한 비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18품계 가운데 6품에 속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언, 기오 그리고 기달과 지금 현재 우리 기씨와 어떻게 세계가 연결이 되는 지는 알 수가 없다. [인용] https://db.history.go.kr/KOREA/item/gskoDetail.do?levelId=gsko_001_0640 판독문 뒷면 [01-01] 謹錄賢哲僧俗弟子尊位排在於後 [01-02] 能善寺主 乘全寺主 聡 校勘 月寺主 崔虛大德 [01-03] 弘琳大德 契貞大統 慶甫大統 性言大德 [01-04] 王堯君 [01-05] 王照 校勘 君 [01-06] ▨▨大王 弼榮大王 英章正匡 王景大承 [01-07] 淸端宮 校勘 主 金鎰蘇判 兢達蘇判 王規佐承 [01-08] 權悅佐承 王詢佐承 王廉佐承 誠俊元甫 [01-09] ▨▨▨▨ 校勘 金奐阿飡 金休長史 鎰休郎 [01-10] ▨順元甫 希悅助 兢悅助 式榮韓飡 [01-11] 寬質韓飡 兢鎰海飡 賢逢元甫 官憲元甫 [01-12] 廉相海飡 允逢元甫 憲邕元尹 師尹一哲飡 [01-13] 侃榮阿飡 章劍史上 弼邢大監 姚謙郎 [01-14] 崔芳元尹 奇悟元尹 奇達元尹 知連正衛 [01-15] 與一正朝 平直阿干溟州 [01-16] 剋奇溟州 金芮卿溟州 連世大監溟州 [01-17] 王侃原州 德榮沙干竹州 弟宗沙干竹州 [01-18] 宋嵒史上公州 平直村主堤州 貴平一吉干堤州 [01-19] 堅必村主冷井 堅奐沙干新知縣 越志山人新知縣 [01-20] 哀信沙干又谷郡 能愛沙干又谷郡 世達村主奈生郡 [01-21] 式元大監冷水縣 明奐村主酒淵縣 康宣助別斤縣 [01-22] 金立房所郎 吉舍村主丹越驛 [01-23] 崔山㭆 校勘 [02-01] 當時三綱典名位列 [02-02] 院主希朗長老 [02-03] 典座昕曉上座 [02-04] 史道澄禪師 [02-05] 直歲朗然禪師 [02-06] 檢 校勘 校維那良善長老 校勘 [02-07] 堂維那契融上座 [02-08] 持客契廉禪師 에서 [01-14] 줄의 崔芳元尹 奇悟元尹 奇達元尹 知連正衛 https://ko.wikipedia.org/wiki/영월_흥녕사지_징효대사탑비 왕건의 통일전쟁에 나오는 기언奇彦에 대한 기록 이후에 고려사에 등장하는 기씨 기록은 73년후인 1009년 01월 16일(음) 목종12년에 왕의 주치의였던 태의太醫 기정업奇貞業이다. 그러나 이분도 목종이 아파서 밤새워 자리를 지켰다(直宿)는 것이지 나이나 가족관계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기정업의 기록 24년 후인 1033년에 발해사람 기질화奇叱火 등 11명이 투항해와서 남쪽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보인다[渤海奇叱火等十一人來投處之南地] 기언 기오 기달 기정업 기질화 가운데 현재우리의 직계 조상으로 연결이 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발해사람으로도 기씨가 있었고 발해는 고구려와 연결되며 행주가 옛 고구려의 땅이였다는 점에서 기씨가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것은 알수있다. [_삼국사기 기언.png, left_] [_고려사 기언.jpg, left_] [_영월 징효대사비.jpg, left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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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 고려시대 중기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기씨와 1세조 | 기회근 | 2026-07-03 |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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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기씨의 중흥은 기탁성奇卓成부터이다. 기탁성은 무관으로 폴로경기인 격구를 잘하여 의종의 눈에 들고 경호부대인 견룡에 근무하여 경호부대장인 위장군衛將軍까지 되었다. 이어서 정중부의 무신란에 가담하여 권력자가 되었다. 이때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평양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진압군의 부원수로 참전하고 돌아왔다. 이때 19세의 최충헌을 별초도령으로 발탁하여 최충헌 출세의 길을 열어준다. 우리기씨의 중흥과 연관이 있는 기탁성, 최충헌, 기홍수의 졸기(죽은 기록)를 고려사에서 인용한다. [기탁성奇卓誠은 행주幸州 사람이다. 용모와 태도가 아름다웠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했다. 처음 교위校尉에 보임補任되었는데, 의종毅宗이 말타기와 격구擊毬를 좋아해서 그를 견룡군牽龍軍으로 발탁하여 늘 곁에 있게 했다. 권력을 가진 귀족(權貴)들을 잘 사귀더니 위장군衛將軍으로 승진하였고, 명종明宗 초에는 여러 번 승진하여 참지정사叅知政事가 되었다.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키자, 기탁성은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이를 참전하였고, 돌아와서는 판병부사判兵部事로 있다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로 승진하였다. 김평金平이란 사람이 있어 어려서부터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김보당金甫當의 난에 장인 한언국韓彦國이 피살되자 김평은 처자妻子를 데리고 승평군昇平郡에 숨어 살았다. 기탁성이 정권을 잡자 김평이 재능이 있다 하여 직사관直史館으로 발탁하였다. 기탁성은 재물 욕심이 많아 벼슬을 판 까닭에, 어진 이들이 자취를 감추고 남을 모함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다투어 진출하였다. 가신家臣 고충전高忠全과 이인령李仁齡은 모두 교활한 데다 탐욕스럽고 야비하여 그 악명이 멀리까지 퍼졌다. 기탁성은 명종 9년(1179)에 죽었다. 광평궁廣平宮이 오랫동안 버려져 주인이 없자 기탁성은 왕에게 요청하여 그 궁에 살고자 하였다. 그의 처가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고 몇 달 동안 광평궁에서 살다가 죽었다. 뒤에 왕이 조위총의 반란을 토벌한 공을 인정하여 추충협모좌리동덕공신推忠協謀佐理同德功臣 수태사守太師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추증追贈하고 공신각에 초상을 그려 안치하였다. (奇卓誠, 幸州人. 美容儀, 善射御. 初補校尉, 毅宗好馳馬擊毬, 擢爲牽龍, 常在王側. 善事權貴, 驟遷衛將軍, 明宗初, 累轉叅知政事. 趙位寵起兵, 卓誠爲副元帥禦之, 及還, 判兵部事, 進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 有金平者, 少有文名, 金甫當之亂, 妻父韓彦國被戮, 平携妻子, 隱於昇平郡. 及卓誠秉政, 以平有才, 擢爲直史舘. 卓誠貪財賣官, 由是, 賢者屛跡, 讒佞競進. 家臣高忠全·李仁齡, 皆姦黠貪鄙, 惡聲遠播. 九年卒. 廣平宮久廢無主, 卓誠欲請王居之. 其妻諫止之, 不聽居數月而死. 後王論討位寵功, 贈推忠協謀佐理同德功臣守太師·門下侍中, 圖形閣上.)] 최충헌은 기씨는 아니지만 그의 묘지명에서 우리 기씨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만 따온다. [부인夫人 송씨宋氏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송청宋淸의 딸이다. 부녀자로서의 규범[柔範]에 원칙이 있었고, 부인으로서의 도[婦道]에 어긋남이 없었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으며, 공보다 앞서 죽었다. (夫人宋氏, 知樞密院事尙書左僕射上將軍致仕宋淸之女也. 柔範有則, 婦道無違. 生二子一女)] 기탁성이 의종 때에 무관이 되고 정중부의 무신난 이후에 권신이 되면서 기탁성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역사책이나 족보에 보이지 않던 기씨들이 역사책에 나오기 시작하는데 1178년에 장군 기세준奇世俊을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고 1179년엔 중랑장 기세정奇世貞이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족보에서 1세조 기순우奇純祐 할아버지는 高麗 仁宗時人 官門下平章事라 하지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 다른 역사책에 기탁성이 나타나기 이전에 의종의 아버지인 인종 때에 기씨가 이렇게 높은 벼슬하신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선세업적에는 이곡이 지은 영안왕 기자오의 행장 기록에서 가져왔다고 하지만 영안왕 행장을 읽어보아도 영안왕의 최대 선조는 영안왕의 고조부이자 우리에겐 2세조이신 기수전奇守全 할아버지까지는 高祖門下侍郞平章事諱守全으로는 나와도 기순우 할아버지는 기록에 없다. 그러나 17세기에 나온 조종운이 지은 씨족원류 책의 행주기씨 부분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이책에서 시조 기순우 할아버지를 文林郞追封門下平章事太子太傅로 기록되어 있다. 위 내용들로 정리 하자면 기탁성이 정중부의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평양에서 일으킨 1174년 조위총의 반란을 평정하러 부원수로 갈 때 19세의 최충헌을 별초도령으로 발탁하여 출정한 기록으로 보아 기탁성이 정3품의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라 지금의 3성 장군쯤 되고 최충헌은 별초도령이라 중위, 소위의 소대장 정도로 보면 나이는 20여년 차이가 날테고 크게 보면 부모와 자식뻘로 보인다. 이 최충헌의 첫 번째 부인이 송청의 딸이며 2세조 기수전 할아버지도 부인이 송청의 딸이다. 그러니까 둘은 동서간이 된다. 1세조 기순우 할아버지가 벼슬이 말단의 종9품 문관인 문림랑文林郞 이었는데 기탁성이 권신이 되어 여러 기씨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고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동서인 2세조 기수전 할아버지가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면서 1세조 기순우 할아버지도 정2품의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추증이 된 것으로 보인다. 최충헌의 집권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기홍수奇洪壽이다. 족보엔 3세 기윤숙奇允肅의 큰아들로 나오지만 잘못된 것으로 역사기록에는 최충헌과 함께 여러 국정을 논의한 기홍수를 최충헌의 처조카의 아들로 족보에 기록한 것은 기윤숙의 아들들 돌림자가 홍洪이라서 같은 세대로 착각하여 족보를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를 인용하면 기홍수는 어려서는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지였으나, 장년이 되어서 무인이 되었다. 1194년(명종 24) 12월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197년 9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 판병부사判兵部事, 11월엔 수사도守司徒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감수국사監修國史 판병부사判兵部事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 1199년(신종 2) 5월에 명필이라서 신종의 명령으로 대관전무일편大觀殿無逸篇을 고쳐 썼으며, 12월에 수태위守太尉 문하시랑門下侍郎 평장사平章事, 1200년 12월에 수태사주국守太師柱國, 1201년 12월에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를 거쳐 1203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로 물러났다. 1204년 1월에 최충헌崔忠獻 등과 더불어 신종으로부터 희종에게의 왕위를 물려주는 논의를 하였고, 희종 때 이부吏部에서 전선銓選(인사행정)을 맡았으나, 최충헌에게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음악과 글씨를 즐겼다. 시호는 경의景懿이다. 부인은 기록이 없지만 인터넷에는 몰몬교에서 운영하는 족보에 기홍수의 부인이 박씨라고 나온다. 그러나 더 검색은 되지 않고 있다. 기씨로서 기홍수가 높은 벼슬을 지낸 것도 중요하겠지만 기홍수가 물러나 음악과 글씨로 여생을 보낸 집터가 행주산성 안의 우리 행주기씨유허비가 있는 자리이다. 기가우물 즉 기감천은 기홍수 집의 샘터이고 기가바위 즉 기가암은 정원의 바위이다. 기탁성과 기홍수가 기씨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들인데 아쉽게도 두분 다 조상과 자녀에 대한 기록이 없다. 기탁성은 1세조 기순우 할아버지와 같은 세대 기홍수는 2세조 기수전 할아버지와 같은 세대로 보여서 그 많은 고려시대 유명인사들의 묘지명은 많이 나오는데 이 두분의 묘지명은 없나 아쉬운 마음이다. 묘지명엔 대게는 위로는 증조부까지 아래로는 후손도 기록이 있으니까 이 시대 누군가의 묘지명을 찾으면 혹시나 기순우 할아버지나 기수전 할아버지와 연결되는 형제 4촌 혹은 6촌의 관계를 찾을 수 있거나 기순우 할아버지 이전의 할아버지들을 찾을 수도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있다. 한쪽으로는 묘지명은 묘가 도굴꾼들에게나 지역개발로 이름모를 옛무덤이 파해쳐저서 찾아질 텐데 그런 험한 일은 안 당했음을 다행이라는 마음도 든다. 아니면 두분 다 자손이 없어서 묘지명을 준비한 후손이 없나 그런 마음도 든다. 하여간 기순우 기탁성 기수전 기홍수 모두 묘도 모르고 묘지명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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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3세조 4형제와 3세조모 진원군부인 오씨 | 기회근 | 2026-09-07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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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에는 2세조 기수전 할아버지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다. 이 3세조 4분은 기윤위奇允偉, 기윤숙奇允肅, 기필선奇弼宣, 기필준奇弼俊이다. 같은 아버지 밑의 4형제인데 돌림자를 윤允과 필弼로 2가지를 썼다. 족보를 읽다보면 형제를 넘어 4촌, 6촌, 8촌 등이 같은 글자를 돌림으로 쓰고 양자도 나타나는 경우는 고봉 할아버지 이후쯤이 되고 그전에는 형제사이에서 같은 글자를 돌림으로 쓰더라도 4촌만 되어도 돌림자가 다르다. 여기에선 형제 사이에도 2가지 돌림자를 쓰는 것을 보아서 아마도 기윤위, 기윤숙의 윤允자 돌림 쓰는 형제와 기필선, 기필준의 필弼자 돌림 쓰는 형제는 어머니가 다른 배다른 형제들로 보인다. 기윤위와 기윤숙은 역사책에 기록이 보이지만 기필선 할아버지와 기필준은 보이지 않는다. 큰아들 기윤위는 아들이 없어 사위 손정렬이 가문을 이었다하고 둘째 기윤숙은 황후기씨의 고조부이다. 단지 고려사엔 기윤숙을 싫어해서 그런가 길 비키라고 소리지르며 기생집 출입했다고 비웃는 기록이 있다, 기윤숙의 손녀사위가 송염이고 송염의 외손의 외손이 태종의 비 원경황후 민씨로 양령대군, 효령대군, 세종대왕도 기윤숙의 유전자가 통하는데 너무 박하게 기록했다고 생각한다. 셋째 기필선 할아버지의 후손이 현재 살아있는 모든 기씨들의 직계 할아버지이고 넷쩨 기필준의 자식은 없다. 기필선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역사책에서는 볼수 없지만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옥천사에 있는 옥천사玉泉寺 청동금고靑銅金鼓에 남아 있다. 이 절에서 쓰는 꾕과리 같은 종류의 쇠북을 만들면서 제작비의 찬조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이 쇠북에 기록되어 있는데 기윤위의 사위 손정렬과 기필선 할아버지의 부인이신 진원군부인 진원오씨 할머니 기록이 나온다.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menuIdx=584&ksm_idx=3408 에서 판독문을 인용하면 [高麗二十三王環甲之年壬子四月十二日在於京師工人家中鑄成智異山安養社之飯子入重六十餘斤同願施主者 樞密院右副承宣孫挺烈 尙書皇甫琦檢校尙書兪承錫華嚴業三重勝壽大選景興知識正之 故上將軍奇弼宣之嘉偶珍原郡夫人吳氏 이하 생략. 번역문은 고려 23대왕(고려 고종)의 환갑環甲이 되는 해인 임자년(고종39, 1252년) 4월 12일 개경[京師]에 있는 공인工人의 집에서 지리산智異山 안양사安養社의 반자飯子(쇠북)를 주조하여 만드니, 무게가 60여 근이었다. 함께 발원한 시주施主는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손정열孫挺烈, 상서尙書 황보기皇甫琦, 검교상서檢校尙書 유승석兪承錫, 화엄종華嚴宗 삼중대사三重大師 승수勝壽, 대선大選 경흥景興, 지식知識, 정지正之, 돌아가신 상장군上將軍 기필선奇弼宣의 아름다운 배우자 진원군부인珍原郡夫人 오씨吳氏 이하생략] 여기서 기필선 할아버지를 奇弼宣이라 했고 족보엔 弼善으로 宣을 善으로 썼지만 선宣은 선善과 하나의 짝을 이룬다(善一作宣)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이것이 같은 분이라는 것은 명백하지만 공식적으로 사용한 글자가 善이 아니라 宣으로 사용이 되었다고 이렇게 문헌과 금석문이 다를 경우 금석문의 기록이 우선하기 때문에 善을 宣으로 바꾸어 기록하는 것이 좋겠다. 족보에 기필선奇弼宣 할아버지 부인 기록은 없는데 여기에 진원군부인오씨라고 기록되어서 진원오씨라는 것이 확인된다. 행주기씨대동보 갑신보(2004년판)와 같이 배부한 별집의 92페이지 아래부분 추원단축을 보면 1세조모에 대하여 모르니까 군부인 O씨, 2세조모에 대하여는 군부인 송씨이고 3세조에서는 갑자기 군부인에서 숙부인 O씨로 나온다. 이것도 군부인 오씨로 축문을 바로 잡아야겠다. 3세조 4명가운데 큰아들인 기윤위는 아들이 없어 사위가 대를 이었다 했는데 여기에도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손정열孫挺烈이라고 이름이 나온다. 고려 고종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강화도로 서울을 옮기고 능도 강화도 있다. 이 시대를 같이 사신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3세 기필선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도 강화도에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역사 옛사람들이 그물코처럼 엮인 가운데 막연히 조상이라고 했지만 기록으로 찾을 수 있는 성씨는 다르지만 우리에게 유전자가 전달 되었다는 증명이 되는 조상 가운데 고려 고종도 있다. 둘째 기윤숙의 손자 기온薀은 고려 고종의 사위이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시대였으면 옹주였을 고종의 서녀이고 고려 원종의 배다른 동생이 기온의 부인이다. 기온의 사위는 김지복金之福이고 김지복의 사위는 기중평奇仲平 할아버지이시며 이분은 청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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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7세 황후기씨관련 | 기회근 | 2026-09-07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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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윤숙의 장남 기홍영은 황후 기씨의 증조부라서 왕으로 추증이 되었지만 무슨 왕이었는지 왕이름은 모르고 있다. 2004년판 족보편집을 한창하고 있던 2000년쯤에 원당의 도선산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기홍영洪頴의 왕이름을 인왕이라고 한 것을 보고 왕이름은 모른다고 알려졌는데 갑자기 어떻게 알았지 하고 있는데 옆에 계시던 기길수 아저씨께서 족보의 지장록에서 찾았다고 하였다. 1982년판 족보의 지장록에서 이규보가 지은 영안왕 행장의 내용 가운데 仁王妃任氏를 보고 기홍영의 부인이 임씨라서 기홍영의 왕이름을 仁王으로 오해한 것이었다. 그런데 영안왕 행장은 잘 알려진 기록인데 왜 사학계는 모르고 있을까 하면서 이름 찾아 다행이다하였다. 그러나 영안왕 행장을 자세히 다시 읽어보니 해답은 뒤에 있었다. 仁王妃任氏生毅明神三王號恭睿王太后而公之祖母實后弟平章 諱濡之孫는 기홍영의 부인 임씨에 대한 것은 맞지만 내용은 인왕비 임씨는 의,명,신 3왕을 낳은 공예왕태후의 친동생 임유任濡의 손녀라고 해석해야 맞는 것이었다. 여기서 인왕이란 인종을 말하는 것으로 원나라에 눌려 지내던 시기에 황제들이 쓰는 조祖나 종宗을 붙이지 못하고 왕王으로 붙인 듯하다. 그러나 고치지를 못하고 2004년판 족보는 그후에 기홍영의 왕이름은 인왕이라고 인쇄되어 나왔다. 기홍영洪頴의 큰아들 기온薀은 고종의 서녀 그러니까 조선시대면 옹주가 부인이며 1274년에 원나라에 파견되어 원종의 서거를 알리고 원나라에 있던 충렬왕과 왕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왕비로 맞아오게 하였다. 기온의 손녀사위는 이중육이고 이중육의 사위는 김지복이고 김지복의 사위는 기중평 할아버지로 청파 기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이다. 그렇게 또 우리 기씨는 개성왕씨와 유전자가 연결이 된다. 무신난 이후에 떠오른 기씨들이 최충헌 집권과 함께 더 권력층이 되고 최충헌의 묘지명을 쓴 조충의 아들 조계순이 기윤숙의 사위이고 조계순의 사위가 최씨무신정권의 3권째 집권자 최항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씨들과 초충헌의 후손들이 후계구도에서 서로 엮여 고위직에 오르거나 때로는 귀양을 가능 등등 하다가 고려가 몽골에 굴복하여 강화도에서 나오면서 무신정권도 끝나고 같이 권력에서 멀어진다. 이 때에 역사책엔 보이지만 족보엔 안나오던 기씨들을 언급하면 1216년에 기존정奇存靖이 거란과의 전쟁에 참전했고 1219년엔 낭장 기인보奇仁甫가 최충헌崔忠獻을 죽이려다 오히려 살해당했다하고 1228년엔 기저奇泞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가 1229년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1279년엔 기홍석奇洪碩이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감찰제헌監察提憲이 되는 등의 기록이 보인다. 기윤숙의 큰사위가 족보엔 조순趙珣이라 나오지만 조계순趙季珣(https://ko.wikipedia.org/wiki/조계순)이다. 이번엔 황후와 그 가족에 대하여 정리한다. 황후의 가족관계에 대하여 말하자면 공녀로 몽골에간 기자오의 딸이 원나라의 황후가 되자 황후의 아버지 기자오 할아버지 기관 증조부 기홍영은 왕으로 추증이 된다. 영안왕 기자오의 행장은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지었는데 이곡의 문집인 가정집에 실려 전하고 우리의 대동보 지장록에도 그대로 옮겨져 있다. 이 기록이 중요한 것은 우리 행주기씨 상계의 조상이 수록되어있기 때문이다. 행장의 재목부터 첨의정승僉議政丞이라는 직함이 나온다. 아직 영안왕으로 봉해지기 전의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계를 요점만 보면 증조曾祖는 이름諱이 윤숙允肅, 할아버지祖는 이름諱이 홍영洪穎, 아버지考는 이름諱이 관琯, 공公의 이름諱은 자오子敖다. 부인夫人은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이씨李氏다. 할아버지 기홍영의 부인이신 할머니 임씨에 대하여는 인왕비仁王妃(고려 인종의 왕비) 임씨任氏가 의명신毅,明,神三王 3명의 왕을 生낳았으니 호號는 공예왕태후恭睿王太后라 하며 공의而公之 할머니祖母가 (공예왕태후의) 친동생實后弟 평장平章 임유濡의 손녀다 했다. 기황후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가 왕으로 추증이 되었지만 아버지가 영안왕이라는 것은 알아도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왕이름(왕호)는 기록이 없다. 요즘謹按 살펴보니 기씨奇氏는 우리나라自國初(고려) 초기에 무예 혹은 무공以武材稱으로 재능이 알려져 세상에 그 공적 혹은 노력世著其勞을 알렸다. 그러나 족보에는 영안왕행장에 나온다는 중시조 기순우 할아버지는 나오지 않고 2세 기수전 할아버지만 공公의 내외內外가 모두皆 명문가문名家이다. 즉由 고조부高祖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이름諱 수전守全 이하以下로 장군으로 나아가 상국이 되어 혹은 장군과 상국을 배출出入將相하여 공을 백성에게 배풀었다功施于民고만 하였다. 영안왕에 대한 다른 기록으로 원나라 구양현이 묘비문을 지었는데 아직 확인을 못해보았지만 그 내용 속에 중시조의 기록이 있는듯 하다. 왜냐하면 이곳엔 기록이 없는데 족보는 확실히 중시조의 이름을 기록했고 또한 2세 기수전할아버지의 부인이신 홍주송씨 할머니에 대한 기록이 이곳에는 없기 때문이다. 혹시나 그곳에도 기순우할아버지가 언급이 없다면 이는 전부터 전해오던 가승에 근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녀에 대하여 生낳으니 5남 3녀五男 三女로 나누어진分 황후皇后는 그 막네其季이다. 장남長男 식軾은 공보다 먼저先公 죽었다歿. 다음次 철轍은 첨의정승으로서以僉議政丞 지금今 덕성부원군으로 봉해졌다. 次다음 轅원은 以僉議贊成事첨의찬성사로서 今지금 封德陽君덕양군으로 봉했다. 次다음 輈주는 大匡元尹대광원윤封德城府院君이다. 다음次 윤輪은 우상시右常侍이다. 장녀長女는 適商議評理상의평리 조희충趙希忠을 맞아들였다. 다음次 둘째사위는 전의령適典儀令 염돈소廉敦紹를 맞아들였다. 손자孫男는 모두凡 11十一명이다. 큰손자長 천린天麟은 원나라이름小字으로 완택보화完澤普化이며 판도총랑으로서以版圖摠郞 련곡으로 들어와入侍輦轂 지금今은 직성사인을 하고爲直省舍人 있다. 다음次 인걸仁傑은 몽고이름小字이 첩목이단화帖睦邇漙化이며 군부총랑으로以軍簿摠郞 궁궐을 지키고 있다宿衞闕庭. 다음次 천기天驥, 유걸有傑, 전룡田龍은 모두皆 낭장郞將이고 나머지餘는 아직 벼슬이 없다未仕. 손녀孫女는 七7명으로 큰 손녀長는 홍복도감판관適弘福都監判官 홍보환洪寶環을 맞아했고 나머지餘는 모두皆 어리다幼. 여기에서 족보에는 없는 내용이 손자 천린天麟, 천기天驥, 홍복도감판관適弘福都監判官 홍보환洪寶環의 존재이다. 이들은 셋째 아들 원轅의 아들 딸로 보인다. 또 손자들은 어느 아들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족보 기록을 보면 돌림자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초의 찬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 형逈, 원遠, 괄适, 진進, 준遵 할아버지까지는 형제 사이에만 쓰였고 그 이후에나 큰대大자 항렬부터 4촌까지 쓴 것을 보면 당연히 당시는 형제 사이에만 쓴 것을 볼 수 있다. 홍보환洪寶環의 처는 씨족원류에 기원轅의 딸로 나온다. 천린天麟과 천기天驥는 하늘 천자를 돌림자로 쓰고 있다. 이는 형제간이고 큰 손자 천린은 소자小字가 완택보화完澤普化라하고 기원奇轅의 아들 가운데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라는 기록으로 보아서 천린은 완택보화이고 천기는 완자보화로 보인다. 연경에 들어가서 직성사인을 한다는 것으로 보아 연경의 황후에게로 가서 이 행장을 쓸 당시엔 직성사인을 하고 있었던 듯하고 1364년에 황후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으로 새로 고려왕을 봉하여 보낼 때 덕흥군의 원자로 삼아보낸 기삼보노가 이 천린이나 천기의 아들인 듯하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기록엔 영안왕의 손자들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있기는 하다. 즉 공민왕 1354년 2월에 기륜奇輪을 삼사좌사, 기원奇轅의 아들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를 판밀직부사로 삼았고, 1354년 4월에는 기윤을 찬성사 덕산부원군德山府院君, 기완자불화를 삼사좌사 덕양부원군德陽府院君에 다시 임명 했다. 그런데 족보는 여기에 나오는 11명의 손자와 7명의 손녀가 다 기록되어 있지도 않다. 씨족원류에 손녀사위 適弘福都監判官홍복도감판관 洪寶環홍보환은 둘째 기원奇轅의 사위로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공의公之 가문 선세家世의 공덕功德은 국사에 전재되어 있다載在國史 하는 것을 보면 고려실록에는 우리 기씨 선세의 기록이 있었던 듯 하지만 고려실록은 임진왜란 때에 타버려 없어졌고 지금 남아있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기황후가족을 깍아내리고 기철을 반역열전에 넣었으니 재대로 그 조상에 대한 기록을 할리는 없고 우리 선세기록을 잊어버렸으니 안타깝다. 공의公之 혁혁한 사업事業焯焯은 사람들의在人 이목耳目(눈과 귀)을 끌고 있으니。今지금 그 대강을 행장으로 정리할 때 掇其大槪爲行狀 채택될 준비를 한다以備釆擇焉. 1356년 양력 6월 7일엔 원에서 기원奇轅의 아들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기울제이부카)를 보내 영안왕榮安王을 경왕敬王으로 고쳐 책봉하고, 또 3대를 추봉追封하여 왕으로 삼았으며 기철에게 대사도大司徒를 제수하였다. 하고 하여 구양현에게 영안왕의 비문을 짖게 하여 보내왔다. 기자오가 영안왕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원나라에서는 공민왕과 영앙왕의 지위는 명목상 같았다. 원은 자주 사신을 보내 기황후의 어머니 삼한국대부인 이씨를 예우했는데, 공민왕 역시 대우를 극진히 했다. 공민왕은 특히 새해의 시작엔 이씨를 방문했으며, 원나라 사신[元使]들이 베푸는 잔치에도 빠지지 않았다. 기황후의 생일에는 예외 없이 사신을 원에 파견했다. 1355년 8월에 열린 잔치에서의 자리 배치를 보면, 공민왕과 이씨李氏는 모두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서 앉고 황후의 언니 조희충趙希忠의 처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앉고 기철과 원나라 사신元使은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재추宰樞는 계단위階上에 앉았다. 만만巒巒태자가 황태자에 책봉되어 고려를 방문하여 외할머니께 인사할 때 축하 잔치에서는 노국魯國공주와 황태자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고 공민왕은 서西쪽에 앉고 이씨李氏는 동東쪽에 앉았는데, 공민왕이 술을 부어 먼저 무릎을 꿇고 황태자에게 올리니 황태자가 서서 마시고 황태자가 술을 부어 외할머니 이씨李氏에게 드리고 다음에 공민왕과 노국공주에게 드렸다. 기원奇轅이 공민왕과 말을 타고 나란히 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 황후의 형제들이 공민왕과 같은 지위를 가진 것으로 과시하려 하고, 황후의 친척 동생 기삼만은 남의 땅을 함부로 빼앗다가 1347년 감옥에 갇혀 옥사하는 등의 여러 문제를 일으키자 원 황실과 연결된 기씨들은 존재만으로도 공민왕에게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이에 1356년에 공민왕은 원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서 기철 등을 제거하자 일부는 원으로 도망갔다. 기철 등의 제거는 고려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황후는 가만히 있지 않고 공민왕을 폐하고 중이 되어 원에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하고 중이어서 결혼하진 않아 아들이 없던 덕흥군의 원자로 기씨를 삼아 1만의 군사를 주어 고려로 보냈다. 덕흥군 이후의 고려는 왕씨의 고려가 아니라 기씨의 고려로 만들려고 했지만,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지고 물러난다. 원으로 도망가거나 원에 있던 기철의 아들 기세인첩목아 등은 이성계의 요동 공격으로 물러나 이후엔 역사책에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 후손들이 끈어지지 않았고 성씨도 기씨를 계속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고려에 남은 기철의 아들들은 머리 깎고 숨은 아이도 찾아내어 다 죽였지만 딸과 손자는 죽이지 않았나 보다. 기철의 사위 왕중귀의 먼 외손의 외손 가운데에서 3명의 왕비가 나온다. 이에 대하여는 족보를 인용한다. 왕중귀王重貴 안동사람安東人이다. 본성本姓은 권씨權氏. 벼슬은 동지밀직同知密. 아버지는 정승政丞 정헌공正獻公 왕후王煦. 아들들이 권씨權氏로 다시 돌아갔다. 큰아들 소윤少尹 권숙權肅, 둘째 집의執義 권엄權嚴, 셋째 사직司直 권도權道, 큰사위 박중의朴仲宜는 본本이 죽산竹山. 둘째사위 순성군順城君 왕정王侹. 셋째사위는 이판吏判에 추증된 본本이 양천陽川인 허기許愭. 허기의 아들은 허비許扉, 허비의 큰아들은 영상領相에 추증된 허손許蓀. 둘째는 군수郡守 허훈許薰, 셋째는 군수郡守 허지許芝. 넷째는 주부主簿 허형許蘅. 허손의 사위는 감찰監察 신영석申永錫, 첨지僉知 박임종朴林宗은 본本이 나주羅州. 신영석의 사위는 사인舍人으로 영상에 추증된 심순문沈順門으로 본本이 청송靑松. 심순문의 아들은 영상 심연원沈連源, 심연원의 아들은 청능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綱으로 명종明宗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를 낳았다. 박임종의 아들은 정랑正郎 박조년朴兆年, 박조년의 아들은 사련司諫 박소朴紹, 박소의 아들은 번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으로 선조宣祖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를 낳았다, 허형의 아들은 부정副正 허감許瑊, 허감의 아들은 찬성贊成에 추증된 허초許礎, 허초의 아들은 지사知事 허잠許潜, 허잠의 사위는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 이광정의 사위는 본이 여흥인 민광훈(閔光勳), 민광훈의 아들은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으로 숙종肅宗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낳았다. 족보에 나오는 명종明宗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선조宣祖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숙종肅宗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 3명의 왕비 말고ᄃᆂ 민유중維重의 후손인 민치록致祿의 딸은 고종高宗비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기철이 없었다면 이 4분의 왕비들은 탄생 할 수가 없는 분들이다. 그러나 4분 모두 후손이 왕이 되고 이어진 왕이 없다. 또한 기철-기인걸-기신-기석손-기채로 이어지던 기철의 후손은 현손자 기채가 아들이 없어 딸이 경주정씨 제난공 정효상에게 시집가서 황후집안에 내려오던 모든 재산은 경주정씨 문헌공파 제안공종중으로 넘어갔다. 이 들이 기철의 기계 후손인 것이다. 경기도 파주시 금릉동의 파주시청에서 봉일천 방향으로 나가면 파주시에서 건설한 파주스타디움이 있고 그 위가 기철의 선산(경기도 파주시 학령로 41-16)이다. 그러나 묘를 소개하는 경주정씨의 홈에는 기철의 손자 기신, 기석손, 기채의 묘는 소개하는 것이 없다. 재산 가운데 가장 값있는 종산은 가져 갔지만 묘는 관리하지 않은 듯하다. 황후기씨의 묘가 연천에 있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고 굳이 있다면 이곳 파주 금촌에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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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영안왕의 손자 문제 | 기회근 | 2026-09-07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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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왕 행장에는 기자오의 아들은 다섯이고 손자는 11명이고 손녀는 7명이라 했으나 손자는 벼슬했거나 손녀는 시집간 것을 기준으로 그 이름을 기록하고 나머지 아직 벼슬하지 못한 손자와 아직 어려서 결혼하지 않은 손녀는 기록이 없다. 그 손자손녀들도 기자오의 아들들 5명가운데 누구의 아들과 딸인지 기록하지 않고 손자들 손녀들 이렇게 죽 늘어 놓았다. 이 손자와 손녀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자료를 찾아 연결을 해본다. 그 손자들 기록은 다음과 같다. 孫男凡十一。長天麟。小字完澤普化。以版圖摠郞入侍輦轂。今爲直省舍人。次仁傑。小字帖睦邇漙化。以軍簿摠郞宿衞闕庭。次天驥,有傑,田龍。皆郞將。餘未仕。孫女七。長適弘福都監判官洪寶環。餘皆幼 다시 정리하면 손자들은 長天麟。小字完澤普化。以版圖摠郞入侍輦轂。今爲直省舍人。 次仁傑。小字帖睦邇漙化。以軍簿摠郞宿衞闕庭。 次天驥 有傑 田龍。 손녀는 정리하면 長適弘福都監判官洪寶環 이 된다. 씨족원류에는 영안왕의 다섯 아들 가운데 큰아들 軾은 영안왕 보다 먼저 죽었고 자녀는 없다. 둘째 轍의 아들로는 仁傑, 有傑, 世傑, 賽因帖木兒, 賽人不花이고 딸로는 王重貴의 처妻가 나오고 傑과 몽골이름엔 賽를 돌림으로 쓰고 있다. 셋째 轅의 아들로는 完者不花가 있고 딸들로는 洪寶環의 처妻, 李壽林의 처妻, 奉文의 처妻가 나온다. 넷째 輈의 아들로는 武龍이 우리 족보에 나오고 씨족원류엔 딸만 白璘의 처妻가 나온다. 다섯째 輪의 아들로는 田龍이 나온다. 이 가운데 손자들 仁傑과 有傑은 傑자돌림으로 둘째 轍의 아들이고 田龍은 다섯째 輪의 아들로 밝혀진다. 손녀인 洪寶環의 처妻는 셋째 轅의 딸이다. 문제는 손자들인 天麟, 天驥이다. 天麟, 天驥은 같은 天을 돌림으로 쓰는 것으로 보아서 4촌은 아니고 형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天麟의 몽골 이름이 完澤普化이다. 轍의 아들들 가운데 몽골이름으로는 맨앞에 賽를 쓰는 것으로 보아서는 天驥의 몽골이름에도 完을 돌림으로 쓰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는 [원나라에서 기원奇轅의 아들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기울제이부카)를 보내 영안왕榮安王을 경왕敬王으로 고쳐 책봉하고, 또 3대를 추봉追封하여 왕으로 삼았다(元遣轅子完者不花, 改冊榮安王爲敬王, 又追封三代爲王)]는 기록이 있다. 轅의 아들이 完者不花라면 完澤普化도 完을 돌림으로 쓰는 轅의 아들로 추정이 된다. 完者不花는 天驥이고 天麟과 天驥는 모두 셋째 轅의 아들로 보인다. 영안왕 행장 公諱子敖字子敖。幸州人。始以門功拜散員。至元庚寅。叛王乃顔之黨哈丹。與其衆。東走眞番。闌人我疆。逆氣張甚。所至殺掠。忠烈王偕帝女安平公主。率百官入江華島。避其鋒。州郡皆據險。且戰且守。中外洶洶。公時爲中軍偏將。負纛前驅。頗有功。賊平。累遷揔部散郞。出守宣州。所居稱職而有去思。自以奕世衣冠。仕不甚達。性又寬厚。且不喜干謁。日與賢士大夫遊。務盡其歡。不理家人事産。年六十三。以天曆戊辰。卒于家。夫人三韓國大夫人李氏。左僕射諱湊之孫。國學祭酒諱行儉之女。族大德茂。克配君子。生五男三女。今皇后其季也。謹按奇氏。自國初以武材稱。世著其勞。及仁王妣任氏生毅,明,神三王。號恭睿王太后。而公之祖母。實后弟平章諱濡之孫。判事諱景恂之女。自是任奇兩姓。益大以貴。甲於東國。侍中康靖。以冢宰相毅,明,神。當毅王末年。武人鄭仲夫作亂。殲朝臣擅廢立。自是權臣繼踵。搢紳重足。而能從容以道。終始扶持。不失舊物。侍中之力居多矣。僕射慷慨持節義。當國步艱難。晉陽公崔怡顓擅。雖連姻權臣。不肯阿諛。每曉以逆順禍福。姦不得發。怡旣病。其子沆不肖。人多附沆。而僕射獨疾之。怡甞問後於人。僕射卽擧賢以對。及沆嗣。以前嫌見斥。飮恨以卒。時人惜之。三司始諱璋。後避國諱更焉。初以將軍出爲忠州牧。專尙寬和。蒲鞭薤水。民不忍欺。政最召拜上將軍。俄遷鷹揚軍。國制。凡軍政賞罰。將校進退。一聽於鷹揚。三司不私其恩威。動以禮法。軍士感服。由是驟登相府。忠烈王以巨室國老。尤加禮貌。哀榮無及焉者。公之妣延興郡夫人朴氏。典法判書諱暉之女。侍中李文眞公藏用之外孫也。至元元年。有詔今歲王公群牧。咸會上都。王其乘驛而朝。文眞以平章。從忠烈王入覲。寵遇異常。文眞德業文章。聞于中國。時右丞相東平忠憲王。甚器重之。待以殊禮。坐必虛其右。翰林王學士諸公。歆其風裁。皆願內交。凡所對揚休命。與本國興利除害者。民到于今賴之。公內外皆名家。由高祖門下侍郞平章事諱守全以下。出入將相。功施于民。而不食舊德。卒於下位。天將大其報。而有待于後乎。長男軾。先公歿。次輒。以僉議政丞。今封德城府院君。次轅。以僉議贊成事。今封德陽君。次輈。大匡元尹。次輪。右常侍。長女適商議評理趙希忠。次適典議令廉敦紹。孫男凡十一。長天麟。小字完澤普化。以版圖揔郞入侍輦轂。今爲直省舍人。次仁傑。小字帖睦邇溥化。以軍簿揔郞。宿衛闕庭。次天驥,有傑,田龍。皆郞將。餘未仕。孫女七。長適弘福都監判官洪寶環。餘皆幼。公之家世功德。載在國史。公之事業。焯焯在人耳目。今掇其大槩爲行狀。以備采擇焉。至正▣▣八月初一日。謹狀。 공(公)의 이름은 자오(子敖)이고, 자(字)도 자오(子敖)이다. 행주(幸州) 사람이다. 처음에는 가문의 공훈으로 산원(散員) 벼슬을 받았다. 지원(至元) 경인년(1290년, 충렬왕 16년)에 반역을 일으킨 원나라 왕족 나얀(乃顔)의 잔당 하단(哈丹)이 무리를 이끌고 동쪽 진번(眞番)으로 달아나 우리 국경을 침범했다. 그 반역의 기세가 매우 사납고 성하여, 이르는 곳마다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충렬왕은 황제의 딸인 안평공주(제국대장공주)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들어가 그 날카로운 기세를 피했다. 각 주와 군에서는 모두 험난한 지형에 의지해 싸우면서 성을 지키니, 나라 안팎이 몹시 소란스럽고 두려움에 떨었다. 공은 당시 중군(中軍)의 편장(偏將)이 되어 대장기를 짊어지고 선봉에 서서 제법 큰 공을 세웠다. 도적들이 평정되자 여러 차례 승진하여 총부산랑(揔部散郞)이 되었고, 나가서 선주(宣州)를 지켰는데, 다스림이 직분에 알맞아 백성들이 떠나간 그를 그리워했다. 공은 스스로 대대로 고관을 지낸 명문가(奕世衣冠) 출신이면서도 벼슬이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 성품 또한 너그럽고 후덕했으며, 권세가에 빌붙어 청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날마다 어진 사대부들과 더불어 노닐며 온전히 그 즐거움을 다하려 힘썼고, 집안의 재산 관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이 63세가 되던 천력(天曆) 무진년(1328년, 충숙왕 15년)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이씨(李氏)로,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이주(李湊)의 손녀이자 국학제주(國學祭酒)를 지낸 이행검(李行儉)의 딸이다. 가문이 번창하고 덕이 무거워 군자(기자오)의 배필이 될 만했다. 5남 3녀를 낳았는데, 지금의 황후(기황후)가 바로 그 막내딸이다. 삼가 살피건대, 기씨(奇氏) 가문은 고려 초부터 무예의 재능으로 칭송받아 대대로 그 공로를 드러냈다. 고려 인종의 비(妃)인 임씨(任氏)가 의종, 명종, 신종 세 임금을 낳아 공예왕태후(恭睿王太后)라 일컬어졌는데, 공의 할머니가 실은 태후의 동생인 평장사 임유(任濡)의 손녀이자 판사 임경순(任景恂)의 딸이었다. 이로부터 임씨와 기씨 두 성씨는 더욱 번창하고 귀해져 동방(고려)에서 으뜸가는 갑족이 되었다. 시중(侍中)을 지낸 강정공(康靖公)은 총재(冢宰, 총리)로서 의종, 명종, 신종을 보필했다. 의종 말년에 무신 정중부가 난을 일으켜 조정 신하들을 몰살하고 왕을 마음대로 폐하고 세웠다. 이때부터 권신들이 대를 이어 권력을 잡고 선비들이 두려워 발을 포개고 섰으나, (강정공은) 도리로서 침착하게 대처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왕실을 붙들어 옛 국가의 체제를 잃지 않게 하니, 시중(강정공)의 힘이 가장 컸다. 복야(僕射, 기자오의 조부 기윤숙)는 강개하고 절개와 의리를 지켰다. 나라의 운명이 간고하고 난처할 때에 진양공 최이(崔怡, 최우)가 권력을 독점했다. 비록 권신(최우)과 혼인으로 얽혀 있었으나 결코 아첨하지 않았으며, 매번 거역과 순종, 화와 복의 이치를 깨우쳐 주어 간사한 짓이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최이가 병이 들자 그 아들 최항(崔沆)이 어리석고 불초했으나, 많은 사람이 최항에게 아부했다. 그러나 복야만은 홀로 그를 미워했다. 최이가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후계자를 물었을 때, 복야는 곧바로 어진 이를 천거하여 대답했다. 최항이 권력을 이어받자 예전의 혐오감 때문에 배척을 당했고,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안타깝게 여겼다. 삼사사(三司使)를 지낸 (기자오의 아버지)는 처음 이름이 장(璋)이었으나, 후에 국휘(임금의 이름)를 피하여 이름을 고쳤다. 처음에 장군으로서 나아가 충주목사(忠州牧)가 되었는데, 오로지 너그럽고 화평함을 숭상하여 채찍 대신 부들나무로 벌하고 부드럽게 다스리니(蒲鞭薤水), 백성들이 차마 그를 속이지 못했다. 정치의 성적이 가장 좋아 조정으로 불러 올려져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고, 곧 응양군(鷹揚軍)으로 옮겼다. 나라의 제도에 군사의 정사와 상벌, 장교의 진퇴는 모두 응양군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 있었는데, 삼사사(기장)는 그 은혜와 위엄을 사사로이 대하지 않고 매사 예법으로써 행동하니 군사들이 감복했다. 이로 말미암아 재상의 반열(상부)에 급격히 올랐다. 충렬왕은 그를 거물급 가문의 국로(國老)로 여겨 더욱 예우를 더했으니, 그 애도함과 영예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의 어머니는 연흥군부인(延興郡夫人) 박씨(朴氏)로, 전법판서 박휘(朴暉)의 딸이며 시중 이장용(李藏用, 문진공)의 외손녀이다. 지원(至元) 원년(1264년)에 "올해에 왕과 공들, 그리고 여러 목축 관리들은 모두 상도(上都)로 모이라"는 원나라 황제의 조서가 내려져, 왕이 역말을 타고 조참하러 가게 되었다. 이장용(문진공)은 평장사로서 충렬왕을 수행하여 들어가 황제를 알현했는데, 총애를 받음이 예사롭지 않았다. 문진공의 덕업과 문장은 중국(원나라)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우승상이었던 동평충헌왕(바얀)이 그를 매우 그릇이 큰 인물로 아껴 특별한 예로 대우했으며, 자리에 앉을 때 반드시 우측 자리를 비워두고 모셨다. 한림원의 왕학사 등 여러 공들도 그의 풍채와 지조를 흠모하여 모두 사사로이 교제하기를 원했다. 그가 (황제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들어 대답하고 아뢴 것과, 본국(고려)을 위해 이익을 일으키고 폐단을 제거한 것들은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 혜택에 의지하고 있다. 공은 이처럼 안팎이 모두 명문가였다. 고조부인 문하시랑평장사 기수전(奇守全) 이하로 조상들이 장상(將相, 장군과 재상)을 드나들며 백성들에게 공을 베풀었으나, 정작 공은 조상의 덕만을 누리지 못하고 낮은 관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는 하늘이 장차 그 보답을 크게 내리려고 후손을 기다리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첫째 아들 기식(奇軾)은 공보다 먼저 죽었다. 둘째 아들 기철(奇轍)은 첨의정승(僉議政丞)이며 지금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셋째 아들 기원(奇轅)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이며 지금 덕양군(德陽君)에 봉해졌다. 넷째 아들 기주(奇興)는 대광 원윤(元尹)이다. 다섯째 아들 기윤(奇輪)은 우상시(右常侍)이다. 첫째 딸은 상의평리 조희충(趙希忠)에게 시집갔다. 둘째 딸은 전의령 염돈소(廉敦紹)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모두 11명이다. 첫째 손자 천린(天麟)은 어릴 때 이름이 완택푸화(完澤普化, 올제이부카)인데, 판도총랑으로서 황제의 수레(輦轂)를 가까이서 모셨고 지금은 직성사인(直省舍人)이다. 둘째 손자 인걸(仁傑)은 어릴 때 이름이 첩목이부화(帖睦邇溥化, 테무르부카)인데, 군부총랑으로서 궐정을 숙위(경호)하고 있다. 다음 손자인 천기(天驥), 유걸(有傑), 전룡(田龍)은 모두 낭장(郞將)이다. 나머지는 아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손녀는 7명이다. 첫째 손녀는 홍복도감판관 홍보환(洪寶環)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공의 가세(家世)와 공덕은 국사에 실려 있고, 공의 업적은 사람들의 귀와 눈에 명백히 남아 있다. 이제 그 대략적인 개요를 모아 행장(行狀)을 지어 채택에 대비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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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 연천의 이른바 기황후능의 허구 | 기회근 | 2026-09-07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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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황후 능(陵)의 연천 소재설에 대한 역사적 검증 및 반박 ### 1. 개요 최근 경기도 연천군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기황후의 능이 존재한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를 관광 자원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원사(元史)』, 『고려사(高麗史)』 등의 정사(正史) 기록과 당시의 국제 정세, 문헌의 정확한 해석을 종합해 볼 때 **기황후의 능이 연천을 포함한 한반도 내에 존재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이는 후대에 형성된 전설과 잘못된 문헌 해석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 2. 역사적·정치적 상황에 따른 불가론(不可論) **① 사망 시기와 장소의 문제** 『원사』 기록에 따르면, 1368년 주원장의 명나라 군대가 대도(북경)를 공격하자 원나라 혜종(순제)과 기황후는 내몽골 자치구에 위치한 응창부(應昌府)로 천도하였다. 이후 1370년 혜종이 사망하고 아들 아유르시리다르(소종)가 북원 황위를 계승하였으며, 1378년 소종이 사망하였다. 기황후의 사망 시기는 이 응창으로 물러난 1368년에서 소종이 사망한 1378년 사이로 추정된다. 당시 명나라와 원나라(북원)가 치열하게 대립하던 전쟁 상황에서, 몽골 초원 깊숙한 응창에서 사망한 황후의 시신을 적국인 명나라 영토를 뚫고 고려까지 운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② 고려 내부의 정치적 상황 (이장 주체의 부재)** 설령 시신을 운구하려 했다 해도, 고려 내에서 이를 실행할 정치적 세력이 전무했다. * **1356년 (병진참화):**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으로 기철을 비롯한 기황후의 친정 가족이 이미 몰살당했다. * **1364년:** 기황후가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세우려 군대를 보냈으나 최영, 이성계 등에게 대패하였다. * **1370년:** 기황후의 조카 기새인첩목아가 동녕부에서 고려를 공격했으나 역시 패퇴했다. * **1371년 (신해참화):** 신돈과 연루된 기현(할아버지) 및 아들 5형제가 처형당했다. 즉, 기황후가 사망할 무렵 고려 조정은 기씨 일족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축출한 상태였으며, 남아있는 일족 또한 멸문지화를 당해 능을 조성하거나 이장을 주도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국가적 사업으로 진행되었다면 『고려사』에 기록이 남았겠지만, 그러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 3. 문헌 기록의 오독과 와전 **① 『동국여지지』의 오역과 진실** 연천에 기황후 능이 있다는 주장의 주요 근거로 『동국여지지』나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들고 있다. 연천 동북쪽 15리에 '기후묘(奇后墓)'가 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편찬자가 전설을 채록한 것에 불과하며, 편찬자조차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며 사실이 아님을 암시했다. > *"按史記, 奇皇后無東還以葬之事, 其或后母國大夫人之葬歟?"* > *(역사 기록을 살펴보건대, 기황후가 동쪽(고려)으로 돌아와 장사를 지낸 사실이 없으니, 혹시 황후의 어머니인 국대부인(삼한국대부인 장씨)의 장례를 치른 곳이 아닌가?)* 즉, 해당 기록은 기황후의 묘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기황후는 고려로 돌아온 적이 없으니, 전해지는 무덤은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 묘일 것이다"**라고 추측한 내용이다. 이를 기황후 묘의 실재 증거로 삼는 것은 명백한 오역이자 견강부회다. **② 읍지(邑誌) 기록의 한계** 조선 후기 『연천현읍지』 등에 기황후가 죽어서 고려에 묻해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사건 발생 수백 년 뒤인 조선 말기에 민간에 떠돌던 전설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여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 4. 전국적인 '기황후 전설'의 실체 기황후의 능이나 출생지에 대한 전설은 연천뿐만 아니라 전국 여러 곳에 분포한다. 이는 공녀 출신에서 원나라 황후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신데렐라 스토리)에 대한 민중의 동경이 만들어낸 허구적 설화들이다. * **남한 내 기황후 능 전설지:** 연천군 외에도 충북 진천, 전남 보성(모후산), 화순 등 약 6곳에 달한다. * **진천군 설화의 허구성:** 충북 진천군 이월면의 경우, 원나라 쿠빌라이 칸(홀필렬)이 기황후를 데려갔다고 전해지나, 기황후는 쿠빌라이 사후 한참 뒤인 혜종의 황후이므로 이는 명백한 역사적 오류다. 이처럼 각 지역의 기황후 관련 설화는 역사적 사실(Fact)이 아닌 민간 전승(Folklore)일 뿐이다. ### 5. 결론 및 제언 역사적 사료와 당시 정황을 종합할 때, **기황후는 몽골 초원(북원)에서 사망하여 그곳에 묻힌 것이 명백하다.** 연천에 있다는 묘소는 기황후의 어머니인 이씨(혹은 장씨)의 묘소일 가능성은 있으나, 기황후 본인의 능일 수는 없다. 연천군 등 지자체에서 관광 자원 개발을 목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기황후 능' 홍보를 진행하는 것은 '승자의 기록'이나 '역사의 대승적 해석'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역사 왜곡이다. 따라서 행주 기씨 대종중 및 종원들은 다음의 사항을 유념해야 한다. 1. 근거 없는 전설을 기반으로 한 지자체의 관광 사업 홍보에 동원되거나 동조하지 않는다. 2. 명확한 가짜(Fake) 역사에 문중의 예산이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3. 개인적 차원의 참여는 자유이나, 대종중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참여하여 역사적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연천의 기황후 능은 역사적 실체가 없는 허구이며, 이에 대한 맹목적인 동조는 지양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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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7세 현 할아버지와 신해참화 | 기회근 | 2026-09-07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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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기씨의 본류를 이루고 있는 3세 필선 할아버지의 후손 역사를 살펴보겠다. 3세 필선 할아버지의 사위 김기손에 대하여 족보는 먼 외손들 가운데 4명의 왕비를 배출한다. 족보를 인용해 본다. [김기손金起孫, 경주김씨慶州金氏, 벼슬은 시중侍中, 아들은 시랑侍郞 신우信佑, 사위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이천李仟, 이천의 큰 아들은 전한典翰 이자원李子蒝, 작은 아들은 정승政丞을 지낸 문장공文莊公 이혼李混, 이자원의 아들은 대제학大提學 이언충李彦冲 이언충의 아들은 판사判司 이광기李光起, 이광기의 사위는 본관이 파평坡平사람으로 영평군鈴平君 윤척尹陟, 윤척의 손자는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번尹番이며 세조世祖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를 낳았다, 윤번의 현손자는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 이광기의 동생은 부사副使 이광익李光翊, 이광익의 손자는 판사判司 이욱李勖, 이욱의 사위는 본관이 청주淸州로 판중추判中樞를 지낸 한창韓昌, 한창의 아들은 청주부원군淸州府院君 한백륜韓伯倫으로 예종睿宗비 안순왕후安順王后를 낳았다. 이광기의 넷째 아들은 이사안李思安, 이사안의 현손은 감사監司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이덕영李德榮, 사위는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윤지임尹之任으로 중종中宗왕비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낳았다.] 4세 기겸 할아버지에게는 아들이 3명이고 큰아들인 기강 후손은 절손되었고 둘째 아들 기유奇裕의 후손이 기씨의 대종손가이지만 번성하지 못했다. 이 집안은 묘의 위치들을 보면 안산의 사내곡과 용인 그리고 충북 옥천 등지에 거주해 왔다. 많은 집은 아니고 10가구 이내의 집안으로 보인다. 역사책에 나오는 기염奇廉의 문중분은 임진왜란에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경호하여 종전후에 호성공신이 된 12세손 기효복이 있다. 그 후엔 크게 이름이 오르신 분이 없다. 그리고 같은 시기의 만전상공이 16세손인 것을 보면 4세손이나 차이가 난다. 이에 대하여 족보엔 평을 하고 있다. 인용하면 [재신宰臣 기염奇廉의 아들 기삼동奇三同의 구보舊譜에 관한 내용은 이 기록이 전부이다. 그러나 지금今 그 세수를 고찰하는데考之其世數 있어서 항상 의문이 있다尙有可疑. 고려말 기염奇廉의 세수차이를 고찰하는데 기록상 현손 고흥군 기효복奇孝福이 있다其玄孫高興君孝福. 고려말 재신宰臣 기염奇廉 공公과 조선 선조 때 임진2등공신壬辰二等功臣 기효복奇孝福 공公과의 사이에 200년간은 맞지 않는다宣廟壬辰功臣則二百年間不應世數止. 즉 2~3세의 누락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지만此宰臣高興之間恐有二三世失漏 옛 기록이 부족하여 확실한 단정은 할 수 없고不能臆斷 이러한 내용을 여기에 기록하여 남긴다故姑錄於此.] 4세손 기겸 할아버지의 사위로 김지수라고 있다. 족보엔 화평김씨로 나오고 요즘 본관으로는 광산김씨이다. 그 손자 가운데에 김원명이 있는데 기철을 제거하는 데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된다. 이 김원명이 신돈을 공민왕에게 소개하여 신돈이 고려 정치에 등장한다. 기겸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신 5세손 기절 할아버지의 후손이 현재 남북 전체 기씨의 후손으로 공민왕시대에 사셨고 신돈이 숙청되면서 같이 죽임를 당하신 7세손 기현 할아버지가 있다. 기현 할아버지는 두번 결혼하신 족보기록이 있고 첫 번째 부인은 윤씨 할머니이고 두 번째 부인이 김황의 딸 김씨로 자식을 낳아 기른 적은 없다[無育]고 족보는 기록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황후 기씨의 할아버지이신 기관의 형이 기온 할아버지로 호부상서를 지내셨다, 그 둘째 아들이 진소 할아버지이시며 사위는 이중육이다. 이 이중육의 사위가 강능김씨 김지복으로 김황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기현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 강능김씨와 김지복은 남매사이가 되고 김지복의 사위는 기현 할아버지의 큰아들 8세손 기중평 할아버지이다. 기중평 할아버지의 부인이신 강능김씨와는 고모와 조카이면서 새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된다. 기중평 할아버지는 청파 정무공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이다. 이 기황의 딸 김씨와 신돈과의 인연으로 기현 할아버지와 연결이 되는 데 고려사의 지저분한 기록을 순화하여 풀어본다. [처음에 기현奇顯의 후처는 과부였을 때에 신돈과 승려로서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나중에 기현奇顯과 결혼했다. 신돈이 궁궐에서 나와서 기현奇顯의 집에 머물렀다. 모든 관리들이 모두 기현奇顯 집에 와서 일을 의논하니 기현奇顯의 처가 음식 시중을 주관하게 하였다. 신돈辛旽이 기현奇顯의 집에 살면서 개성 봉선사奉先寺 소나무 언덕을 지나 궁을 출입하였다. 봉선사가 있는 언덕 서남쪽에 약간 빈 땅이 있어 신돈이 이곳에 집을 지었다. 이 집을 기현奇顯의 처가 관리자가 되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거나 관직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처나 첩을 보내서 먼저 기현奇顯의 처에게 뇌물을 주고서야 들어가 신돈을 만날 수 있었다. 처첩들이 뇌물을 가지고 홀로 들어가 바라는 바를 전달하게 하였다. 신돈이 홀로 상대하니 추악한 소문이 돌았다. 기현奇顯과 그 처가 신돈을 모시면서 아침 저녁으로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으니, 늙은 노비 같았다.] [공민왕恭愍王 20년(1371) 신돈辛旽의 잔치가 열렸는데, 왕이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니 시중侍中부터 그 이하 관작이 있는 자가 모두 참여하여 200여 명이나 되었다. (중략) 신돈이 은혜와 원한이 있으면 반드시 갚으니, 세가대족世家大族이 거의 다 죽임을 당하여 사람들이 (그를) 범이나 이리처럼 보았고, 심지어 벼슬아치를 밤에 자기 집에서 숙직시키기도 하였으며 자질을 따져 벼슬을 주기도 하니, 나가면 시중 이하가 앞뒤를 에워싸서 도로가 막힐 지경이어서 시장에서는 물건도 벌여놓지 않았다. 기현奇顯과 최사원崔思遠이 심복이 되고 이춘부李春富와 김란金蘭이 양팔이 되었으며 그 무리가 조정에 가득 차니, 왕도 스스로 불안한 뜻이 있어 영상領相이라고만 부르고 감히 관직명을 부르지 못하였다.] 신돈은 요승이다 개혁가다 등 평가가 여러 가지 이지만 공민왕이 세력이 커진 신돈에게 위협을 느껴 신돈을 숙청하면서 기현奇顯 할아버지와 연좌된 아들들 기중평 할아버지, 기중리, 기중제 할아버지, 기중수 할아버지가 다 죽임을 당하신다. 고려사를 인용하면 [1371년 7월 6일(음) 병진(丙辰) 1371년 8월 16일(양) 병진날에 선부의랑選部議郞 이인李韌이 익명서를 올려 신돈辛旽의 모역謀逆을 고발하였고, 그 일당 기현奇顯 최사원崔思遠 정구한鄭龜漢 진윤검陳允儉 기중수奇仲修 등을 국문하고 죽였다. 丙辰 選部議郞李韌上匿名書, 告辛旽謀逆, 鞫其黨奇顯崔思遠鄭龜漢陳允儉奇仲修等, 誅之. 1371년 7월 26일(음) 병자(丙子) 1371년 9월 5일(양) 병자날에 신돈辛旽의 무리 이춘부李春富 김란金蘭 이운목李云牧을 죽였고, 그 아들들을 유배 보냈다. 또한 신돈의 아들인 2세 아이와 기현奇顯의 아들 기중평奇仲平을 죽였고, 김진金縝 및 대호군大護軍 김정金鼎을 장형에 처하고 유배 보냈다. 丙子 誅辛旽黨李春富金蘭李云牧編配其子. 又斬旽子二歲兒及奇顯子仲平, 杖流金縝及大護軍金鼎. 1371년 8월 11일(음) 신묘(辛卯), 1371년 9월 20일(양) 신묘날에 신돈辛旽 같은 무리인 신돈辛純 신귀辛貴 임희재林熙載 기숙륜奇叔倫 기중제奇仲齊 최진崔津을 죽이고, 홍영통洪永通 김횡金鋐 허완許完 오중화吳仲華 성준덕成俊德 오일악吳一鶚, 그리고 이춘부李春富의 아우 이광부李光富 이원부李原富를 유배 보냈다. 辛卯 誅旽黨辛純辛貴林熙載奇叔倫奇仲齊崔津, 流洪永通金鋐許完吳仲華成俊德吳一鶚, 及李春富弟光富原富.] [기현奇顯의 아들 기중제奇仲齊 기숙륜奇淑倫 기중평奇仲平 奇顯子仲齊淑倫仲平] [기현의 아들 전 정랑正郞 기중수奇仲修 顯子前正郞仲修] 족보엔 기현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 가운데 기숙륜이 안나오고 기중리가 나오는데 벼슬이 사간이라고 하고 고려사엔 우사간右司諫 기숙륜奇叔倫이라는 기록으로 기숙륜이 기중리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기현 할아버지의 형 기자수의 사위인 오일악吳一鶚이나 기중제의 사위 고민高敏도 같은 무리로 유배를 당한다. 기현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 기중민 할아버지가 이때 연좌되어 죽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사건 이전에 죽은 듯하다. 기현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의 부인들과 자녀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을 것이다. 황후의 일족이 당한 것과 함께 공민왕에게 이때 다시 기씨들이 몰살당하는 처참한 기씨의 가장 침체기를 맞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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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행주기씨 큰 문중(대파) | 기회근 | 2026-09-07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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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행주기씨가 여러 큰 문중으로(대파로) 갈라지는 내용이다. 족보상으로 7세조 기현 할아버지에게는 아들이 5형제 있다. 순서는 기중평, 기중리, 기중민, 기중제, 기중수이다. 첫째 기중평 할아버지는 종7품 직장直長 벼슬을 지내셔서 직장공으로 불리시며 청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시고 후손이 기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둘째 기중리 할아버지는 자식이 없다고 하지만 벼슬이 사간司諫이라고 해서 앞서 고려사에서 확인되는 기숙륜의 벼슬 우사간右司諫인 것으로 보아 기중리가 기숙륜으로 판단을 했다. 자녀는 없다. 셋째 기중민 할아버지는 벼슬이 정6품의 낭장郎將을 지내셔서 낭장공으로 불리시며 후손은 황해도 지역에서 해서문중의 주류를 이룬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행주기씨 최초로 1664년에 족보를 발행한 곳이 해방전 일제시기까지 가장 큰 행주기씨 집성촌이 황해도 금천군 좌면 암사리에 있었고 그 외에도 많은 가구가 재령평야가 있는 재령군에 살며 가까운 신천군, 봉산군, 평산군, 서흥군, 해주, 연백군, 송화군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일부가 평안도로 넘어가 평양 옆의 평안남도 성천군 사가면에 살았다. 넷째 기중제 할아버지는 벼슬이 종6품의 규정糾正을 지내셔서 규정공으로 불리시며 후손도 황해도 평산군 안성면 지역에 살며 해서문중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기중민 할아버지 후손에 비해서는 미약하다. 후손은 군수 현령 등의 벼슬을 지내고 있으며 현손녀 사위 2명에게 왕족이 있다. 큰사위는 검천부정劒川副正 이즙李楫이고 둘째사위가 사천부수泗川副守 이탑李榻으로 효령대군의 증손자이다. 조선초기까지는 왕족들과도 교류했음을 알수 있다. 다섯째 기중수 할아버지는 벼슬이 관리들을 감찰하는 종5품 지평持平을 지내셔서 지평공으로 불리신다. 지평공은 아들이 다섯이고 첫째 아들 기렴은 딸 하나만 두었고 둘째 아들 기임稔 할아버지의 후손은 경남 김해시에 산다. 셋째 아들 기책責 할아버지의 후손은 손자 기정지 할아버지가 파주 교하 송촌에 정착하여 산다. 넷째 기질質 할아버지는 벼슬이 강화부사와 부평부사를 거처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족보에 자녀는 아들이 하나 기시경 이라 나오지만 조선세조실록 1461년 7월 3일 기록은 선조와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대입 한다면 무슨 내용인지 이해 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기질 할아버지의 후손은 족보에 경남 의령군 부림면에 산다고 나온다. 실록의 기록은 이렇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부평부사富平府使 기질奇質의 첩妾의 아들 기중산奇仲山은 이미 속신贖身하여 양인良人이 되어 충찬위忠贊衛에 소속되었는데, 기질이 막내아들 기보奇寶를 종애鍾愛 하여 가계를 이어 제사를 받들게 시키려고 하고 도리어 기중산을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천한 아내에게 장가들었으니 가계를 이어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은 도리에 마땅치 못하다고 하고, 혹은 말하기를, 충찬위에 입속入屬한 것은 나의 아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여, 여러 가지로 말을 얽어서 그 아들을 아들로 여기지 아니하여 장고狀告까지 하였으며, 큰아들을 폐하고 작은아들을 세우는 것을 그 마음대로 하니, 나라의 법을 허물어뜨리고 강상綱常을 어지럽게 하여 형상이 없음이 막심합니다. 만약 사유赦宥를 지난 까닭으로써 다스리지 아니하면 징계함이 없을 것이니, 청컨대 기중산으로 하여금 예전대로 가계를 이어 제사를 받들게 하고, 기질은 파직시키소서 하니, 명하여 기중산은 가계를 이어 제사를 받들게 시키고, 기질은 파직시키지 말게 하였다. ○司憲府啓: 富平府使奇質妾子仲山, 旣贖身爲良, 屬忠贊衛, 質鍾愛季子寶, 欲令承重, 反以仲山爲非己之子, 或言 娶賤妻, 義不當承重, 或言 入屬忠贊衛, 非吾所知, 多般構辭, 不子其子, 至於狀告, 廢立長少任其情私, 棄毁國典, 紊亂綱常, 無狀莫甚。 若以經赦不治, 無以懲戒, 請令仲山仍舊承重, 罷質職。 命仲山承重, 勿罷質職] 다섯째 아들 기분賁 할아버지는 벼슬이 공조참판工曹參判까지 지내셨고 아들 기자환 할아버지이다. 기분 할아버지의 현손자 기원길 할아버지와 큰아들 기복성 할아버지는 묘가 평산에 있다는 것으로 보아 개성 옆의 황해도 평산군에 사신 것으로 보인다. 기복성 할아버지의 아들 기윤전 할아버지는 묘가 한전에 있고 자손이 이어 내려오며 산다고 한 것으로 보아 한전이 어디 인지는 옛지명이라 모르지만 그 아들 기준영 할아버지의 묘는 정족우산동이라는 것을 보아서는 황해도 재령군의 정족산부근으로 이주하여 후손이 사시는 것으로 보인다. 기원길 할아버지의 작은 아들 기복량 할아버지와 아들 기극창 할아버지는 묘가 구례인 것으로 보아 황해도 평산에서 전남 구례로 이주하셨고 다시 아들 기택룡 할아버지부터 묘가 전남 곡성군 죽곡면 반송리인 것으로 보아서 구례에서 다시 곡성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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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조선 태종의 기자재奇自在 대고모의 사면 | 기회근 | 2026-09-07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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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년 신해참화가 일어나고 19년후 1392년 고려는 망하고 조선이 된다. 조선개국후 17년후이고 신해참화후 38년후인 1409년 4둴 7일의 조선 태종실록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임금(태종)이 문소전文昭殿(태조太祖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를 모신 사당)에 직접 제사하고, 드디어 인덕궁仁德宮(경기도 개풍군開豊郡 흥교興敎面 흥교리興敎里에 있던 정종定宗이 퇴위退位한 뒤에 살던 궁)에 가서 문병하고 돌아왔다. 상왕上王(정종)의 궁인宮人 가운데 이름이 자재自在라는 사람이 있는데, 공안부恭安府(정종이 태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자, 태종이 정종의 남은 삶을 돌보기 위해 설치한 기관) 여종이었다. 상왕이 불쌍히 여겨 임금에게 부탁하여 왕패王牌(임금이 서명하고 대보大寶를 찍어서 면역시킬 때 내려 주던 서류)를 주어 영구히 양인良人으로 방면放免하도록 하였다. 대개 상왕에게 총애를 받아 자녀 여덟을 낳았는데, 이군생李群生이 그 맏이다. ○己卯/上親祭于文昭殿, 遂詣仁德宮, 問疾而還。 上王宮人名自在者, 恭安府婢也。 上王憐之, 囑于上, 令給王牌, 永放爲良。 蓋寵於上王, 生子女八, 羣生, 其長也。] 여기서 관노비로있던 자재自在는 큰아들 이름 이군생으로 알 수 있는데 8세손 기중평 할아버지의 손녀이고 9세손 기면 할아버지의 따님이고 10세손 정무공 청파 기건 할아버지의 누이이다. 조선시대 여자이름으로 온전하게 전하는 분이 별로 없는데 조선실록에 정확히 기자재自在라고 기록이 남은 특이한 경우이다. 1428년 세종대왕이 선물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41권, 세종 10년 8월 28일 순평군順平君의 어머니에게 관곽과 쌀 콩 아울러 20석과 종이 70권을 내려 주었다. ○賜順平君母棺槨及米豆幷二十石、紙七十卷。] 48년후인 1457년 세조실록 세조 3년 6월 13일엔 돌아가신 기록도 있다. [○정석정貞石正 이융생李隆生의 어머니가 졸卒하니, 부의賻儀로 쌀 콩 아울러 20석과 종이 70권卷과 관곽棺槨을 하사下賜하였다. ○貞石正 隆生母卒, 賜賻米豆幷二十石、紙七十卷、棺槨。] 1371년 신돈의 숙청과 그래서 돌아가신 7세손 기현 할아버지 그리고 연좌되어 죽임을 당하신 8세손 기중평 할아버지이후 9세손 기면 할아버지와 그 자녀분들은 죽음은 면했지만 관노비가 되었다가 1409년 태종이 정종을 문병간 자리에서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의 누이 기자재 대고모를 사면 요청하고 태종이 받아들여서 관노비에서 풀려나고 종2품 내명부의 숙의가 되는 이 과정에서 살아계셨다면 할머니 강능김씨, 아버지 기면 할아버지, 남매사이인 청파 할아버지, 자매 사이인 남원윤씨 윤지득의 부인과 진주류씨 류양식의 부인도 노비 신분에서 양인으로 돌아왔을 것으로 보이다. 이후 벼슬이 없다는 뜻의 베로 만든 옷(布衣:포의)으로 계시던 청파 할아버지가 왕가의 인척이 되어 세종시대에 음서로 벼슬을 시작하며 기탁성이후 다시 기씨의 중흥조가 되신다. 9세 기면 할아버지가 공조전서를 지냈다고 하지만 기자재 대고모가 종2품 숙의가 되면서 아버지에게 내린 벼슬이나 추증으로 본다. 기자재 대고모가 기씨를 구했다면 원당 정무공 도선산에 있는 남원윤씨 윤지득의 부인이신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의 누이에게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원당 도선산은 9세 기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를 쓰려고 했는데 첫째딸 윤지득의 부인이 아버지 묘자리가 탐나서 자기 남편 윤지득의 묘자리로 쓰고자 밤새워 파놓은 묘자리에 물을 날라 부어 놓았고 묘자리에서 물이 나온다고 판단한 청파 할아버지는 묘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그 명당 자리는 윤지득이 차지하여 남원윤씨의 묘가 우리 도선산에 있는 연유이다. 옮겨간 묘소는 족보의 설명대로 행주기씨 대종중의 진짜 도선산인 지금은 남의 땅이 된 천보산으로 보이다. 조선에 처음 시작하신 분은 9세손 전서공 기면 할아버지이다. 전서공 할아버지는 1남3녀를 두셨고 족보상 첫째는 도선산에 전서공 묘자리를 차지한 윤지득의 처이다. 족보내용 [남원윤씨南原尹氏 벼슬은 선공봉사繕工奉事. 아버지는 감사監事 윤임尹臨. 아들은 판관判官 윤은尹訔. 윤은尹訔의 5세손은 문부사文府使 윤형갑尹衡甲. 윤형갑의 큰아들은 벼슬이 응교應敎를 지내고 절의로 죽은 윤계尹棨. 작은 아들은 척화파斥和派로 병자호란 때 심양瀋陽에 끌려가 죽은 윤집尹集. 윤은尹訔의 외증손은 병랑兵郞을 지낸 이진충李藎忠. 이진충의 사위는 문지사文知事 조존성趙存性. 조존성趙存性의 아들은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으로 인조仁祖왕비 장렬왕후莊烈王后를 낳았다.] 두 번째는 정종의 후궁으로 숙의를 지내신 기자재 대고모로 족보상 외후손으로는 효종비 인선왕후, 그리고 세도정치를 대표하는 안동김씨가 후손으로 순조비 순원왕후, 헌종비 효현왕후, 철종비 철인왕후, 직계후손으로 유명한 사람은 청장관전서를 지은 이덕무와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이규경이 있다. 족보내용[조선 2대왕 정종定宗의 후궁后宮, 내명부內命婦 정2품 숙의淑儀. 큰아들은 순평군順平君 이군생李群生(?~1456), 둘째는 원윤元尹 이의생李義生(?~1435), 후에 금평군錦平君으로 추증. 셋째는 정석도정貞石都正 이융생李隆生(1418~1474), 후에 정석군貞石君으로 추증. 넷째는 무림군茂林君 이선생李善生(1419~1475). 큰딸은 숙신옹주淑愼翁主로 경주김씨 판돈령判敦寧 양평공良平公 김세민金世敏에게 시집갔다下嫁. 작은 딸은 상원옹주祥原翁主로 평양조씨 행사직行司直 조효산趙孝山에게 시집갔다. 순평군의 사위는 벼슬이 부사府使이고 본이 연안延安인 김후金煦, 김후의 사위는 동지同知 허확許確, 허확의 아들은 판서判書 허흡許洽, 허흡의 외증손은 벼슬이 판서判書이고 본이 덕수德水인 장운익張雲翼, 장운익의 아들은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신張維新으로 효종孝宗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를 낳았다. 정석군의 손녀사위는 감사監司 원계채元繼蔡, 원계채의 사위는 본이 동래東萊인 정유길鄭維吉, 정유길의 아들은 정창연鄭昌衍, 정창연의 손자는 정태화鄭太和, 정치화鄭致和, 정유길의 외손은 안동김씨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으로 모두 재상宰相이 되었다. 후손後孫 김조순金祖淳은 순조순원왕후純祖純元王后를 낳고 김조근金祖根은 헌종효현왕후憲宗孝顯王后를 낳고 김문근金汶根은 철종철인왕후哲宗哲仁王后를 낳다. 정석군의 외현손外玄孫은 참판參判 박숭원朴崇元이고 박숭원의 사위는 장운익張雲翼이다. 셋째는 류양식 처이다. 외후손으로는 숙종비 인현왕후와 인원왕후 그리고 고종비 명성황후가 있다. 족보 기록 [진주류씨晉州柳氏, 벼슬은 참판參判. 아버지는 순문사巡問使 류의柳依이다. 큰아들은 문장사인文壯舍人 류자빈柳自濱, 둘째는 문사인文舍人 류자분柳自汾, 셋째는 생장生壯 류자한柳自漢. 류자빈의 큰사위는 광산김씨光山金氏 김겸광金謙光, 둘째 사위는 영월신씨寧越辛氏 문사인文舍人 신중거辛仲琚, 신중거의 딸은 연안이씨延安李氏 직제학直提學 이채李埰의 후실後室로 시집갔다. 이채의 아들은 군수를 지낸 이경종李慶宗, 이경종의 증손녀사위는 감사監司 민광훈閔光勳, 민광훈의 아들은 민유중閔維重이다.(민유중閔維重은 숙종肅宗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낳았다. 민유중의 5대손 민치록은 고종비 명성황후를 낳았다) 이채의 사위는 안동권씨安東權氏 부사府使를 지낸 권용權鎔, 권용의 사위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인 이연화李延華, 이연화의 아들은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이귀의 아들은 좌의정 이시백李時白, 이시백의 사위는 풍양조씨豐壤趙氏인 진사進士 조래양趙來陽, 조래양의 사위는 경주김씨慶州金氏 김일진金一振, 김일진의 아들은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으로 숙종肅宗왕비 인원왕후仁元王后를 낳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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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중흥조 정무공貞武公 청파靑坡 기건奇虔 할아버지 | 기회근 | 2026-09-07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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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 도선산의 중심이신 정무공 청파 기건 할아버지이다.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기록은 조선실록에 기록이 있어 1460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언제 태어나셨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지은 고봉선생의 행장엔 고봉선생의 선조를 소개하면서 청파 할아버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 한 것이 있다. [세종조世宗朝에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고, 문종文宗 말기에 나이 50세도 안 되어 벼슬을 그만두었다. 世宗朝官至判中樞院事。文宗末年。年未五十致仕。] 문종은 음력으로 1450년 2월 22일부터 1452년 5월 14일까지 2년 2개월까지 왕으로 있었다. 문종말기를 1452년으로 보고 50이 않되었다고 하면 49세에 은퇴한 것으로 가정하고 49년년전은 1403년쯤에 태어나신 것으로 추정된다. 누나인 기자재 대고모가 1409년 사면이 되었으므로 6살 무렵에 집안이 복권되고 집이 청파만리현靑坡萬里峴에 있었다 한다. 오늘날의 서울 용산구 청파동은 청파 할아버지가 사시던 동네라고 해서 그 동명이 생긴 유래가 되었다. 조선시대는 나라에서 받은 시호인 정무가 더 중요시해서 정무공으로 아직도 정무를 더 높게 불리지만 오늘날까지 할아버지의 호가 동이름 청파로 남아서 세상사람들에게 청파 할아버지는 몰라도 청파는 들어봤을 것이기에 정무공은 우리 후손들이 간직하고 청파 할아버지를 정무보다 더 부르는 것이 좋겠다 생각합니다. 옛날 분들 이름은 여러 가지이며 명名은 왕 혹은 족보나 정부같은 공식 문서에 기록하는 이름으로 함부로 부르지도 못하게 하였고 어른이 되며 자字를 만들어 불렀지만 이것도 명보다는 못해도 역시나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 호號를 만들어 함부로는 아니지만 후손들도 친근하게 불렀던 이름이라 이제부터 저는 정무공 청파 건 할아버지를 청파 할아버지라고만 하겠다. 청파만리현은 청파동에서 훈민정음 반대산소문을 대표로 올린 최만리가 살던 동네이름에서 유래한 만리동의 고개라고 하니까 지금 숙명여대가 있는 청파동에서 북쪽으로 배문중고등학교부근에 집이 있었던 듯하다. 조선시대 역원제가 있다. 용산구 청파동엔 공문서 전달, 사신 파견 등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말을 갈아타거나 빌릴 수 있도록 한 시설인 청파역이 아마도 이곳은 철도가 놓이면서 서울역이 되었을 것이고 인근엔 공무원이나 일반 여행객들이 여독을 풀고 쉬어갈 수 있도록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인 이태원이 있다. 청파역부근의 이 집은 용재총화를 지은 성현의 옆집이라하고 집이 크고 좋아서 명나라 사신이 와서 임시로 묵을 숙소 후보로 나라에서 살펴볼 정도 였다 한다. 청파 할아버지께서는 이 집에서 걸어서 혜화동의 성균관까지 등교하면서 반드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등의 경서經書를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 세종 때에는 포의布衣(벼슬이 없음)로 발탁되어 집의執義를 시작으로 황해도 연안부사, 전라감사겸전주부윤, 제주목사, 호조참판, 중추원부사, 세종이 승하하자 명나라에 이를 알리는 고부사의 부사로 다녀오고 함길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개성부유수, 한성부윤, 사헌부 대사헌, 평안도관찰사, 판한성부사, 중추원사가 되어 명나라에 2번째 다녀오고 행첨지중추원사,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옛날에 여자들이 집밖에 나올 때에는 머리덥개가 없었으므로 청파 할아버지가 새로이 남바우를 만들어서 임금에게 올렸는데 이것이 조선시대에 여자들이 뒤집어쓰고 다니는 머리덥개가 되었다 한다. 제주목사 시절에 제주의 풍속은 부모를 매장하지 않고 죽으면 구덩이에 버렸었지만 청파 할아버지가 부임하여 관을 마련하고 염을 하고서 매장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제주도에서는 어버이를 매장하는 방법이 청파 할아버지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청파 할아버지의 꿈에서 300여명이 뜰 아래서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며 그들이 말하기를 [공公의 혜택으로 우리들의 뼈가 땅에 묻히었으니 땅 위에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보은할 길이 없사오나 공公께서는 꼭 금년今年에는 현손賢孫을 보실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전에 公의 아들 세명이 모두 아들이 없었다가 과연 이해에 공公의 아들 장령공 기축軸이 아들을 낳았으니 정렬공 기찬奇襸이었다 합니다. 또, 황해도 연안부사로 있을 때에는 붕어가 나오는 큰 못이 있었는데 전임 부사가 붕어를 먹기 좋아하여 백성들이 붕어 잡느라 고생하여 사람들이 붕어무덤이라고 비웃었지만, 청파 할아버지가 부사로 부임하여 {어찌 입과 뱃속이 즐겁자고 청렴이 상하게 하겠는가?} 하고는 먹지 않았으며 손님을 대접하는 때가 아니면 붕어잡기위해 그물을 못하게 금지하였으므로 주민들은 크게 좋아하였다 한다. 단종 때부터는 벼슬을 끊고서 지낼 때인데 수양대군이 여러 번 찾았으나 눈은 뜨고 있으나 볼 수 없는 청맹과니인척하자 수양대군이 어느날 바늘로 찔러 시험해 보려 했지만 청파 할아버지는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바라보며 눈동자를 굴리거나 피하지 않았으므로 수양대군은 청파 할아버지를 기용하지 못하여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는 계유정란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집안의 화도 면하였다 한다. 세조실록 22권, 1460년 세조 6년 12월 29일 신축에 청파 할아버지 돌아가신 기록이 있다. [중추원사中樞院使 기건奇虔이 졸卒하였다. 기건은 기현奇顯의 후손인데,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정고貞苦하여 작은 행실도 반드시 조심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연안延安 군수가 되었는데, 군민郡民들이 붕어[鯽魚]를 바치는 것 때문에 그물질하여 잡기에 피곤해 하니 3년 동안 먹지 않고 또 술도 마시지 않았다. 체임遞任하여 돌아올 때에 백성(父老)들이 전송하니, 기건이 종일토록 마시어도 취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탄식하기를, 이제서야 우리 백성을 위하여 마시지 않은 것을 알겠다. 하였다. 또 제주濟州를 안무安撫하는데, 백성들이 전복[鰒魚]을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기니, 역시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 두어 도의 관찰사觀察使와 대사헌大司憲을 역임歷任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시호諡號를 정무貞武라 하니, 청렴하고 결백하여 절개를 지키는 것이 정貞이요, 백성에게 모범되게 하여 복종시키는 것이 무武이다. ○辛丑/中樞院使奇虔卒。 虔, 奇顯之後, 性淸簡貞苦, 細行必謹, 好讀書。 嘗守延安, 以郡民進鯽魚, 困於捕網, 三年不食, 又不飮酒。 及遞還, 父老餞之, 虔終日飮不醉。 父老歎曰, 今乃知爲吾民不飮耳。 又按撫濟州, 民病所貢鰒魚, 亦三年不食鰒。 歷數道觀察使、大司憲, 所至有名。 諡貞武, 淸白守節 貞, 刑民克服 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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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 아들과 손자의 왕실 혼맥 | 기회근 | 2026-09-07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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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기자재 대고모가 조선왕실과 인연이 되면서 청파 할아버지의 후손들은 서울사는 동안은 조선왕실과 혼인으로 연결이 된다. 우선 아들이신 11세 기축 할아버지의 족보기록을 보면 단종 때에 음서로 주부主簿를 세조 때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그리고 조봉대부朝奉大夫 행풍저창부사行豐儲倉副使 지낸후에 증손자 기대항이 한성판윤 그러니까 정2품의 서울시장이 되면서 정3품의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신다. 부인이신 해주정씨 할머니의 아버지는 정충경鄭忠敬으로 태종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 공을 세운 사람이며 고모는 효령대군의 부인인 예성부부인 정씨이고 남동생은 문종의 사위이며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총이고 여동생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사이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부인인 춘성부부인 정씨이다. 아들 5형제를 두었고 둘째 기찬奇襸 할아버지께서 역시 5형제를 두어 5대 문중을 이루고 있다. 행주기씨가 고려시대엔 무관이었고 문과 과거 급제자가 없다가 12세 기찬奇襸 할아버지는 행주기씨 최초로 과거에 급제하신다. 족보기록을 정리하면 성종 때에 이조전랑, 영광군수, 응교 등을 지냈고 손자 기대항이 한성판윤이 되면서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으로 추증되신다. 정렬공 기찬奇襸 할아버지의 첫 번쩨 부인이신 파평윤씨 할머니는 할아버지 윤암尹巖이 태종의 부마이며 숙경옹주淑慶翁主와의 사이에선 태어난 윤준원尹俊元의 따님이며 큰 아들 기형奇逈 할아버지와 둘째 기원奇遠 할아버지를 낳으셨다. 2번째 부인은 안동김씨이신데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기찬奇襸 할아버지의 바로 아래 동생이신 기저 할아버지도 과거에 급제 하시고 연산군 때 벼슬을 하셨는데 예문관봉교禮文館奉敎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첨정僉正으로 있으면서 함경도채은경차관咸鏡道採銀敬差官을 맡아 함경도咸鏡道 은광銀鑛 개발開發을 답험踏驗했다. 중종 때에 벼슬이 부평부사富平府使에 이르렀다. 연산군 때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있던시기에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編纂에 참여參與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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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의 증손자 5형제 문중과 기묘사화 | 기회근 | 2026-09-07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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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찬奇襸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 책받침 부수 돌림의 다섯 할아버지의 후손이 지금의 행주기씨 대종중의 5대 문중이고 이분들 가운데 막내 기준奇遵 할아버지가 가장 역사에 남아 있다. 호는 복재 혹은 덕양이시고 남기신 문집은 유고로 덕양문집이 있다. 기씨가 당한 3번째 화禍로 위의 2번은 참화이고 이번엔 사화 곧 기묘사화를 당하신다. 연려실기술에서 기묘사화의 문민공 기준奇遵 할아버지 부분을 추려서 옮겨왔다. 기묘사화(己卯士禍) ○ 임금이 언문으로 쓴 밀지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경연에서 기준奇遵이 말하기를, 조광조 같은 자는 정승 자리에 합당하다. 하였으니, 벼슬을 명하는 것이 모두 이 무리들에게서 나오는 터이니 나를 반드시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요, 한갓 그 이름만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내가 이름은 임금이나 실상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옛날에 유용근이 거만하게 나를 보았으니 반드시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경들은 먼저 그를 없앤 뒤에 보고하라.] 하였다. ○ 기묘년 11월 15일 밤에 밀교(密敎)를 내려 신무문을 열고 여러 정승들을 들어오게 하였다. ○ 근정전勤政殿 서쪽 뜰에는 군사들이 죽 둘러서 있었다. 승지 성운成雲이 나와 소매에서 쪽지를 꺼내어 말하기를 [이것은 어필御筆이다. 이 사람들을 즉시 금부에 내리라.] 하였다. 그들은 바로 윤자임,공서린,안정,이구李構 및 응교 기준奇遵과 수찬 심달원沈達源 등이었다. 모두 입직해 있었다. 이에 궐문이 열리고 조금 있다가 대사헌 조광조, 우참찬 이자李耔, 형조판서 김정金淨, 도승지 류인숙柳仁淑, 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 박훈朴薰, 부제학 김구金絿, 대사성 김식金湜 등이 함께 대궐 뜰로 붙들려 왔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이날 초저녁에 기준奇遵이 윤자임,안정,이구 등과 함께 천문天文을 관측하기 위해 간의대簡儀臺로 갔는데, 이윽고 정원 사령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몇 정승이 서문으로 입궐을 했고, 또 근정전 가운데에 불빛이 있는데 군사가 호위해 서 있다 운운.] 하니, 서로 말하기를, [어째서 정원에서 모르는 일이 있단 말이냐.] 하고, 곧 내려왔다. 조금 있다가 입번 승지 두 사람 윤자임과 공서린과 홍문관 두 사람 기준奇遵과 심달원과 한림 이구, 주서 안정 등을 의금부에 내리라고 명하니, 이경二更에 이미 옥에 가두었다. 조금 있다가 이자,김정,조광조,김식,김구,유인숙,박세희,홍언필,박훈 등을 잡아 가두었다. 조금 뒤에 유인숙,공서린,홍언필 세 사람을 놓아주라고 명하고, 또 심달원,안정,이구 세 사람을 놓아주라고 명하고, 또 이자를 놓아주라고 명하였다. 덕양일기德陽日記 ○ 임금이 남곤에게 명하여 조광조 등의 죄안罪案을 초草하게 하였다. 남곤이 쓰기를 마치고 임금 앞에 올리니, 임금이 이를 보고 전교하기를, [죄안이 이미 성립되었으니, 다만 조광조 등 8명만 가두고 나머지는 모두 방면하라.] 하였다. 그 죄안에,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등이 서로 붕당을 지어 자기들과 뜻을 같이하는 자는 진출시키고 자기들과 뜻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서로 의지하고 중요한 자리에 들어앉아 후진들을 꾀어 궤격(詭激)이 습성이 되게 하여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이 날로 글러지게 하므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윤자임,기준奇遵,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 등은 조광조의 무리의 궤격한 버릇에 부화뇌동하였다.] 하였다. ○ 16일 아침 의금 부사 김전金詮,이장곤李長坤,홍숙洪淑 등이 좌기坐起하여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이 사사로이 붕당을 지었다는 것과 윤자임,박세희,박훈,기준奇遵 등이 조광조에게 부화뇌동한 일들을 국문하였다. ○ 기준奇遵이 공술하기를, [신은 어려서부터 옛사람의 글을 읽어 자못 향방을 알아서 집에 있으면 효도와 우애를 다하고, 나라에 있어서는 충의를 다할 것을 생각하였고, 뜻을 같이하는 선비와 더불어 옛 도리를 강마하여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고, 세도世道가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게 하려고 작은 정성을 다하였다. 또 남이 착한 것은 착하다 하고 착하지 않은 것은 착하지 않다고 하였는데, 어찌 감히 사사로이 부화뇌동하였겠습니까. 조광조 등과는 뜻이 같고 도가 합하였기 때문에 서로 사귀어 좋아했을 뿐, 궤격한 줄은 몰랐다.]고 하였다. -덕양일기 ○ 의금부에서 형신刑訊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조율하라고 명하였다. 추관推官 김전金詮 등이 마땅히 간당奸黨 죄에 해당되는 율을 써서 마땅히 베야 하고 그 집을 몰수하고 처자를 노비로 삼아야한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조정은 이것으로 죄를 결정한다.] 하고, 이에 하교하기를,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네 사람은 사사賜死하고, 나머지는 귀양보내라.] 하였다. 이때 날이 이미 저물었다. -석담일기 ○ 날이 저물고 또 모두 늦은 저녁 무렵까지 앉아 있었다.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4명에게는 사형을 결정하고 나머지 4명은 곤장 일백대에 유배 삼천리三千里로 아뢰니, 임금이 승지 김근사金謹思를 불러 탑전에서 판부判付를 쓰게 하기를, [조광조와 김정은 사사하고 김식과 김구는 곤장 일백 대를 때려 먼 곳에 안치하고, 윤자임,기준奇遵,박세희,박훈은 먼 곳으로 부처하라.] 하였다. 김근사가 명을 받고 머뭇거리니 사관 채세영蔡世英이 아뢰기를, [대신에게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과연 다시 의논하는 게 옳겠다.] 하였다. 정광필 등이 빈청에 있는데 김근사가 나와 임금의 뜻을 전했다. 그 때 날이 저물어 촛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정광필이 하교를 듣고 촛불을 만지다가 놀라 좌우를 돌아보고 곧장 입대를 청하여 아뢰기를, [소신이 이 직에 있은 지 또한 오래되었으나, 오늘같은 일이 생길 줄을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단지 어리석어서 사리를 알지 못하고 이같이 되었으니, 중죄라면 신들이 어찌 청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힘써 사형에서 감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말을 따라 눈물이 떨어졌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과연 중대한 일이다. 마땅히 다시 생각해서 해야겠다.] 하고, 승지 성운成雲을 불러 하교하기를, [조광조 등 4명은 장을 쳐 먼 곳에 안치하고, 윤자임 등 4명은 먼 곳에 부처하라.] 하였다. 성운이 판부를 쓰고 물러나자 정광필이 빈청으로 물러나 안당安瑭과 함께 또 아뢰기를, [이 사람들이 죽음을 면한 것은 하늘과 땅 같은 어짐 덕분이다. 그러나 다만 모두 병약하여 만일 장을 맞고 멀리 가면 중도에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조정에서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얻게 되고 사형을 감해준 실재가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7번이나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동각잡기 ○ 16일 밤 삼경에 모두 풀어주자 집으로 와서 조금 자게 하고, 17일 이른 아침에 동소문東小門 밖 민가로 나가 있게 하였다. 또 모두 금부에 모이라고 명하니 승지 성운成雲이 와서 전교하기를, [근래에 너희들이 조정 일을 처치한 것이 지극히 그릇되어 인심을 불평하게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죄주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사사로운 마음이 없이 나라를 위했기 때문에 형벌을 가볍게 하여 죄주는 것이니, 너희들도 알고 가라.] 하였다. 이날 밤은 동소문 밖 민가에서 잤다. -덕양일기 ○ 드디어 조광조를 능주綾州로, 김정을 금산錦山으로, 김구를 개녕開寧으로, 김식을 선산善山으로, 박세희를 상주尙州로, 박훈을 성주星州로, 윤자임을 온양溫陽으로, 기준奇遵을 아산牙山으로 귀양보냈다. ○ 21일에 전교하기를 [저번에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윤자암, 기준奇遵, 박세희, 박훈이 모두 시종侍從에 있어서 성리학性理學으로 밤낮 강론하므로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사람됨이 더불어 나의 정치를 도와서 이룩하겠기에 좋은 벼슬을 주고 대우하였다. 그런데 조광조가 서로 결탁하여 자기들에게 붙는 자는 올려 쓰고 자기들과 뜻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해서 세력으로 서로 의지하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심지어 일을 의논할 적에 조금만 의견이 다르면 반드시 극력 배척하고 막아서 기어이 꺾어놓고야 마니, 국가의 의논이 거꾸로 되고 조정이 날로 잘못되어도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그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들이 한 바를 살펴보니, 정치를 어지럽히는 데로 귀결되었다. 이 어찌 내가 그만둘 수 있는 일이겠느냐. 오직 너희 의정부는 안팎에 포고해서 다 같이 내 뜻을 알게 하라.] 하였는데, 이 글은 남곤이 초한 것이다. -동각잡기 ○ 이날 어필로 남곤과 이유청을 제수하여 좌상과 우상으로 삼고, 김전을 올려서 영상으로 삼아 즉시 비현각丕顯閣에서 소대하여 조광조 등에게 죄 줄 뜻을 하교하고, 또 금부 당상 심정沈貞, 손주孫澍 등을 불러서 조광조,김정,김식,김구를 사사賜死하고, 윤자임, 기준奇遵, 박세희朴世熹, 박훈朴薰을 절도絶島에 안치하라고 하교하였다.-동각잡기 ○ 김식金湜은 절도로 이배되자 망명하다가 자살했다. 김구金絿는 남해南海로 옮겼다가 신사년에 다시 임피臨陂로 양이量移 되고, 계사년에 풀린 뒤에 죽었으며, 김정金淨은 진도珍島로 옮겼다가 경진년에 잡혀서 국문을 당한 뒤에 제주濟州에 위리안치되었다. 윤자임尹自任은 북청北靑으로, 박세희朴世熹는 강계江界로, 박훈朴薰은 의주義州로, 기준奇遵은 온성穩城으로 옮겼다가 경진년에 잡혀서 국문을 당한 뒤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도로 귀양갔다. ○ 세상에서 영의정 정광필, 우의정 안당, 병조판서 이장곤, 형조판서 김정, 대사헌 조광조, 대사성 김식, 응교 기준奇遵, 유생 신명인申命仁을 팔현八賢이라고 한다. ○ 처음에 기준奇遵이 홍문관 직소直所에 있다가 옥에 갇히고 매질당하여 아산牙山으로 귀양 갔다. 아산으로 귀양가있을 때 그의 형인 기형奇逈이 무장 현감이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임지로 갈 때 직산稷山을 지나게 되었는데, 아산과의 거리가 50리 밖에 되지 않았다. 기준奇遵이 그 현감 배철중에게 간청하여 중도에 그 어머니를 보고 하룻밤 자고 돌아왔다. 그 뒤에 그 사실이 발각되어 아산 현감 배철중裵鐵重과 함께 옥에 갇혔다. 배철중이 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기준奇遵이 도망치다가 돌아왔다고 진술했다. 기준奇遵이 옥중에서 옷자락을 찢어서 상서했는데, 그 대략에, [신은 태어난 지 1개월이 지나서 부친을 잃고 오직 편모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처음 신이 죄를 입었을 때 어머니가 무장에 있어서 신이 귀양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 없이 울면서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비록 가서 뵙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는데 마침내 온성으로 옮기게 되자 철없는 생각에 북쪽 하늘과 남쪽 땅이 서로 먼데 한번 북방으로 가면 다시 볼 길이 없고 생사도 모르고 소식조차 서로 통할 길이 없을 것 같아서 한번 얼굴이나 보고 서로 영원히 이별하려고 생각하니, 슬픈 심정을 다시 스스로 그치지 못하고 사세가 급박하여 갑자기 경망히 뛰어나갔으나, 나가서 다시 생각하니 뒷일이 난처하므로 뉘우치고 유배 장소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도망한 죄를 스스로 변명하기 어려우나, 단 하루 사이의 일이요 다른 뜻이 없었으며, 신이 비록 사람답지 못하지만 일찍이 사대의 반열에 있던 터인데, 어찌 끝내 망명한 사람이 되어 밝은 태양 아래에서 구차히 살려고 했겠습니까. 진정 모자지간에 참지 못하여 이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마땅히 그 죄를 받아야 할 것이나, 효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전하께서 이 하찮은 심정을 살피신다면 또한 거의 만물을 기르시는 덕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장을 때리고 배소로 돌려보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논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묘록 ○ 기준奇遵의 자는 경중敬仲, 또는 자경子敬이며, 호는 복재服齋요,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판중추 기건奇虔의 증손이고, 응교 기찬奇襸의 아들이다. 판서 윤금손尹金孫의 사위이다. 계유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갑술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년에 아산牙山으로 귀양 갔다가 온성穩城으로 옮겼다. 다시 올려 국문하고서 배소로 돌려 보내어 위리 안치하였다가 신사년에 사사하였다. 인종이 복직을 명하였다. 아들 기대항奇大恒은 벼슬이 판윤에 이르렀다. ○ 공이 일찍이 정암 조광조에게 편지하기를, [벼슬을 버리고 산림 속에 몸을 감추고 싶을 뿐 세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하니, 정암이 말하기를, [나도 그렇다.]고 하였다. -정암집 ○ 기준奇遵이 하루는 궐내에서 숙직하다가 관외關外를 여행하는 꿈을 꾸었는데, 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 등 기구한 노정을 전전하면서 여행 길에서 근체율시近體律詩 한 수首를 읊기를, 낯선 땅 강과 산은 고향과도 같은데 / 異域江山故國同 하늘 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높은 봉우리에 기대었네 / 天涯垂淚倚高峰 아득한 검은 구름에 (다른 기록에는 호수 소리 적막하다로 되어있다.) 강가 관문이 닫기고 / 頑雲漠漠河關閉 고목 나뭇잎 지는 소리에 (다른 기록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쓸쓸하다로 되어있다.) 빈 성곽이 쓸쓸하다 / 古木簫簫城郭空 들 길은 가을 풀 밖으로 가늘게 뻗치었고 / 野路細分秋草外 인가는 멀리 석양 속에 있구나 / 人家遙住夕陽中 가는 배 만리에 돌아오는 돛대 없으니 / 征帆萬里無回棹 망망한 푸른 바다에 소식 통하지 못하네 / 碧海茫茫信不通 하였다. 홀연히 깨어나 꿈을 기억하며 관의 벽에다 시를 썼다. 얼마 되지 않아서 기묘 당적에 연좌되어 충청도로 귀양갔다가 얼마 안 되어 또 온성으로 옮겼는데, 도중에 보이는 것이 모두 시에 읊은 경치 그대로였다. 말을 멈추고 꿈 속의 시를 읊으면서 처량하게 흐느끼니 따라온 자들도 모두 눈물을 뿌렸다. 온성에 이르러 조금 있다가 사사되니, 사람의 일이 미리 정해진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림들이 그 시를 전하여 외면서 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재척언 ○ 덕양유고德陽遺藁에는 깬 뒤에 꿈속에서 본 바를 기억하여 지은 것으로 되어있다. 기묘사화로 문민공 기준奇遵 할아버지가 죽임을 당하자 큰형 도승지공 기형奇逈 할아버지는 무장현감으로 있다가 함경도 온성으로 천리먼길에서 막내동생의 시신을 운구하여 원당 도선산에 장사지내고 더 이상의 벼슬을 그만둔다. 둘째 참판공 기원奇遠 할아버지와 넷째 기진奇進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장성으로 내려온다. 5형제 후손은 첫째 도승지공 기형奇逈 할아버지 후손과 셋째 별좌공 기괄奇适 할아버지 후손이 친근하게 엮이고 둘째 참판공 기원奇遠 할아버지 후손과 넷째 덕성군 기진奇進 할아버지 후손이 친근하게 엮여 나가는 양상을 보인다. 족보 첫장의 맨위에 보면 느닷없이 태종원경왕후라고 나온다. 그 뒤로도 여러 왕비들이 나온다. 이게 무엇을 뜻하나? 조선의 왕비들을 적은 건가 하면서도 그럼 왜 1대 태조부터 죽 나와야지 3대 태종비부터인가 더구나 왕비순서도 뒤죽박죽으로 나오나? 답은 밑에 나오는 기록 가운데 이렇게 왕비를 기록해야 하면 존귀한 왕비를 밑에 적을 수 없어 책장의 맨위에 적고 그 왕비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는 oooooo 라고 빈자리로 남긴 것이다. 그러니까 기홍영 왕의 사위 가운데 송염이라고 있고 이 송염의 외손의 외손들 가운데 태종원경왕후가 있다는 뜻이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큰아들은 양령대군이고 양령대군이 왕이 되었다면 왕비가 되었을 광산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딸이 있다. 왕의 딸은 공주이지만 대군의 딸은 현주 품계를 주는 것인지 양령대군에서 검색해 보면 영평현주永平縣主라고 있다. 안동김씨 김철균金哲勻과 결혼하여 아들들 가운데 김수형과 김수인이 있다. 김수형의 따님은 정렬공 기찬奇襸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신 안동김씨 할머니이시며 별좌공 기괄奇适 할아버지 덕성군 기진奇進 할아버지 문민공 기준奇遵 할아버지를 낳았다. 김수인의 따님은 참판공 기원奇遠 할아버지의 부인이신 안동김씨이다. 김철균-김수형-김언묵-김석으로 이어지는 후손에서 그러니까 영평현주의 현손자 김석은 도승지공 기형奇逈 할아버지의 큰사위이고 김석의 손자는 임진전쟁 진주성 전투의 영웅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다. 다시 돌아와서 참판공 할아버지와 덕성군 할아버지는 친가로는 배다른 형제이지만 외가로는 4촌 이모부와 처조카 사이다. 덕성군 할아버지가 기묘사화 후에 참판공 할아버지와 형수이자 이모 그리고 3명의 조카와 함께 서울에서 장성으로 이주를 한다. 장성으로 내려간 이유는 정렬공 기찬奇襸 할아버지가 인근의 영광군수를 지내서 그렇다고 한다. 기찬奇襸 할아버지를 조선실록에서 검색하면 할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영광의 수령시절엔 청파 할아버지의 청백리를 무색하게 탐관오리로 나온다. 믿었던 임금을 배신했다고도 나오고 어떤 산을 그린 그림을 보여주자 풀어 얘기하면 산이 옮길 수 없는 부동산이어서 망정이지 옮길 수 있는 동산이었다면 벌써 없어졌을거라는 조롱도 나온다. 양반이라 먹고살만한 장소로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1521년 막내 기준奇遵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첫째 기형奇逈 할아버지는 벼슬을 그만두었고 둘째 기원奇遠 할아버지는 장성으로 내려와 그 다음 해인 1522년 돌아가시고 부인이신 안동김씨 할머니는 1523년 돌아가신다. 정렬공 기찬奇襸 할아버지와 안동김씨 할어니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기괄奇适 할아버지는 서울에 사셨지만 다른 일이 없으셨고 넷째 기진奇進 할아버지는 1522년 생원, 진사 과거시험을 보고 1528년에 어머니 안동김씨가 돌아가시자 완전히 광주로 내려가신다. 기진奇進 할아버지는 처음 남양방씨와 결혼 하셨지만 자녀없이 돌아가셔서 청주 수신리에 묘가 있지만 잃어버렸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구테타를 일으키고 왕이 될 때 회군에 참가하여 회군공신이된 심덕부沈德符가 조선왕가와 인연을 맺어 심덕부의 5째 아들 심온沈溫의 큰딸이 충령대군의 부인이 되고 나중에 세종의 왕비가 되고 심온은 태종이 세종의 외척을 제거하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고 오다가 죽는다. 심온의 둘째 딸이 강석덕姜碩德과 결혼하여 큰아들 강희안의 훈민정음 책을 지은 8명의 유학자들 중의 한명이고 둘째가 강희맹姜希孟을 낳았다. 강희맹의 둘째 아들 강학손姜鶴孫이 훈민정음 책을 지은 8명의 유학자들 중의 한명인 신숙주의 둘째 아들 신면申㴐의 딸과 결혼하여 강영수姜永壽를 낳으니 이분이 기진奇進 할아버지의 두 번쩨 부인이신 긴주강씨 할머니의 아버님이시다. 고봉집에서 기진奇進 할아버지의 묘기와 진주강씨 할어니의 묘를 이장한 기록을 옮긴다. [현고顯考 장사랑將仕郞 경기참봉慶基參奉 기부군奇府君에 대한 묘기墓記 아버지(선부군:先府君)의 이름은 진進이요, 자는 자순子順이며, 성은 기씨奇氏이니, 행주인幸州人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건虔인데 판중추부원사判中樞府院使로 시호는 정무공貞武公이며, 증조의 부인은 정경부인 홍씨洪氏이다. 조부의 이름은 축軸인데 행풍저창부사行豐儲倉副使로 사헌부 장령에 추증되었으며, 조부의 부인은 영인令人 정씨鄭氏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찬襸인데 홍문관 부응교이며, 어머니는 숙인淑人 김씨이다. 아버지께서는 성화成化 정미년(1487, 성종18) 12월 정해일에 출생하였는데, 6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성하자 높은 뜻이 있어 아우 준遵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하루에 수백 자를 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자에 힘을 써 경사經史를 통달하고 옛날과 지금의 일을 꿰뚫었다. 아버지께서ᄂᆖᆫ 널리 배우고 예禮로 몸을 단속하고자 하였고, 오로지 과거에 급제하여 녹을 먹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아우가 먼저 조정에 올라 이름을 드날렸는데 불행히도 견책받아 죽자 아버지께서ᄂᆖᆫ 이미 당세에 벼슬할 뜻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님인 숙인께서 살아 계셨으므로 남을 따라 과거에 응시하였다. 가정嘉靖 원년인 임오년(1522, 중종17)에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며, 그 후 5년에 재상의 천거로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고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다음 해인 무자년(1528)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며, 초상을 마치자 벼슬을 하려 하지 않고 마침내 광주光州에 거주하였다. 집은 광주 읍내의 서북쪽 40리쯤 되는 곳에 있었으니, 지방 이름을 고룡古龍이라 하고 동네 이름을 금정金井이라 하였다. 아버지께서ᄂᆖᆫ 집에 있을 때에 쓸쓸하여 일이 없는 듯하였다. 꽃과 나무를 심어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구경하였으며, 책을 읽고 얻는 것과 잊는 것을 따질 뿐이었다. 말년에 흉년을 만나 아침저녁의 끼니가 걱정인데도 태연히 지내셨다. 을묘년(1555, 명종10) 1월 신해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 69세였다. 아버지께서ᄂᆖᆫ 천품이 정직 성실하고 소탈하여 자기 주장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엄하면서도 까다롭지 않고 검박하며 사치하지 않았다. 책을 볼 때에는 대의를 통달하기에 힘썼으며, 옛날부터 다른 사람의 글귀나 문장을 베끼려 하지는 않았다. 지은 시문이 수백 편이다. 첫 번째 부인은 남양방씨南陽房氏인데 일찍 별세하였고, 두 번째 부인은 유인孺人 강씨姜氏인데 관향이 진주晉州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영수永壽로 충좌위사과忠佐衛司果이며, 조부의 이름은 학손鶴孫으로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이며, 증조부의 이름은 희맹希孟으로 의정부 좌찬성을 지내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다. 유인은 단정하고 공손하며 은혜로워 아버지에게 배필할 만하였다. 5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대림大臨이요, 차남은 대승인데 생원이며, 막내는 대절大節이다.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다. 유인은 부군보다 22년 전에 별세하였는바 집 뒤 2리쯤 되는 갑좌경향甲坐庚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군이 별세하자, 그해 3월 경신일(1555년 음력3월25일-양력4월16일)에 유인의 무덤 남쪽에 장례하니 선산이기 때문이었다. 선비께서 별세할 때에 여러 아들들은 모두 10세가 넘지 못하였다. 부군께서는 홀아비로 살면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자식들을 부지런히 어루만지고 가르쳐 장성함에 이르렀는데, 모두들 미련하고 어질지 못해서 가정의 교훈을 만분의 일도 현양하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죄악이 쌓여 마침내 부군에게 화가 미쳐 별세하였으니, 슬피 울부짖으매 애통한 마음이 뼛속에 사무친다. 이에 감히 묘기를 이와 같이 짓는 것이다. 묘표에 글을 적는 일은 후일을 기다려 할 것이다. 슬픈 마음 하늘처럼 다함이 없으니, 아, 애통하다. 선비先妣 유인孺人 강씨姜氏를 이장한 묘기 아, 슬프다. 우리 선비께서 동원東原에 안장된 지 22년 만에 선부군께서 우리들을 버리고 별세하였다. 그리하여 장차 그해 3월 경신일에 장례하여 쌍분雙墳을 만들려고 했는데, 땅을 파자 물이 나와 마침내 유인의 묘 위 5, 6보 되는 곳으로 옮겨 묏자리를 잡고 장례를 마쳤다. 아들들은 선비를 모신 곳이 좋은 땅을 얻지 못함을 서글퍼하여 애통함이 뼛속에 사무쳤으므로 즉시 옮겨 모시기로 상의하였으나, 빈궁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마침내 금년 3월 경신일에 부군의 묘 옆에 옮겨 모셨다. 가문과 품행에 대해서는 남편의 묘기에 이미 간략히 적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쓰지 않는다. 어머니는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7)에 태어나서 향년 34세에 별세하였으며, 5남 1녀를 낳았는데 생존한 자는 세 사람이다. 거듭 생각건대 어머니께서는 부도婦道를 닦아 아버님과 짝하였는데, 아버님은 은둔하여 덕을 쌓고 드러내지 않았으며, 후손들에게 법을 남겼으나 여러 아들들은 어질지 못하여 만분의 일도 현양하지 못하니, 사무쳐 울부짖으니 하늘도 다함이 없다. 이에 감히 그 일을 이처럼 기록하는 것이다. 훌륭한 작자作者에게 묘문을 청하여 덕행의 대략을 자세히 드러내어 묘에 표하는 것으로 말하면 장차 기다림이 있는 것이지, 감히 뒤늦게 하려고 해서가 아니다. 아, 애통하다. 아들 대승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기록한다. 고봉 기대승奇大升 할아버지가 고봉집에 올려진 아버지 덕성군 기진奇進 할아버지의 훈육 내용을 기록한 글을 고봉집에서 찾아 올린다. 과정기훈過庭記訓 [DCI]ITKC_BT_0185B_0130_020_0010_2008_003_XML DCI복사 URL복사 내가 어릴 때부터 부친의 훈육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이룬 것이 있는 듯 하다. 그런데도 기질이 낮고 용렬하여 어리석기가 처음과 같으니 생각하면 슬프기 그지없다. 지나간 일은 지금 어찌할 수 없지만 앞으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소씨邵氏에게도 문견록聞見錄이 있었다. 학자들은 모름지기 듣고 보는 대로 기록하여 잊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 하셨다. 이에 들은 것을 기록하여 조석으로 완미하려 한다. 선친께서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문을 하는 데는 모름지기 부지런해야 하고 또 반드시 외워야 하며 슬쩍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된다. 읽으며 생각하고 생각하며 짓곤 하되 모두 부지런히 해야 하며 또 그중에 한 가지도 폐해서는 안 된다. 내가 너희들에게 학문에 힘쓰게 하고자 한 것이 어찌 작록爵祿을 바라서이겠느냐. 바로 너희들로 하여금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다행히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게 하고자 함일 뿐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과 행동을 너무 달리해서는 안 된다. 다만 모쪼록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다. 요컨대 순수한 태고太古로 마음가짐을 하고 자연스러움으로 몸가짐을 하는 것이 매우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연못에 가서 고기 낚고 산에 가서 땔나무 하고 거친 밭을 김매고 가꾸어 어버이를 섬기게 하려고 한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내가 어렸을 적에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께서 몹시 고생하시면서 나를 길러 주셨다. 그래서 매양 어서 입신출세하여 이 망극한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그 뜻을 이루기도 전에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이것이 나의 영원한 슬픔이 되어 버렸다. 너희들은 오늘날 잘 먹고 잘 입고 살면서 왜 공부를 하지 않느냐? 내가 자경子敬(동생 기준奇遵)과 가장 우애로워 항상 한이불을 같이 덮고 누워서 우리 형제가 모름지기 한 모퉁이를 담당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항상 천문도天文圖를 모사模寫하고 또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베끼고 기예技藝에도 두루 알기를 기약하여, 한 가지라도 터득한 것이 있게 하고자 했다. 나더러 우리가 뜻을 얻으면 의당 다른 궁핍한 이들을 구휼할 것이고 만일 뜻을 얻지 못하더라도 남의 구휼을 받지는 않겠다. 하였다. 불행하게 자경子敬은 죄를 얻어 유배되었고 나 또한 떠돌아다니느라 한 번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한탄을 금할 수 없다. 너희들은 이 뜻을 알아야 한다. 지금 세상에는 학문을 강구하지 않아 한때는 서로 좋게 지내다가도 뒤에는 도리어 곤욕을 보이곤 하니, 말을 하자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부디 함부로 친구를 사귀지 말라. 요컨대 친구가 없을 수는 없지만 또한 사귐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벼슬길의 풍파는 매우 두려운 것이다. 자기의 뜻을 행하기도 전에 재앙이 이미 따르게 되니 다만 잘 헤아려서 가고 오고 하는 것이 좋으나, 그것도 은거하는 것만은 못하다. 주자朱子는 벼슬한 날짜가 겨우 40여 일밖에 되지 않았으니, 학자들은 또한 이 뜻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진실로 자기의 뜻을 행하려면 일개 현縣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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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고봉 선생이 우리집안의 제사 모시는 사정을 퇴계 선생에게 질문한 것 | 기회근 | 2026-09-07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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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고봉선생이 퇴계선생에게 당시의 우리집안을 설명한 글로 다시 정서하여 설명과 함께 올린다. 조선시대에 주자가례에 따라 사대부는 4대를 기제사지내고 그후엔 신주를 사당에서 옮겨 땅(묘)에 묻는다. 4대를 기제사 지내면 한세대를 20년으로 보면 100년이고 30년으로보면 120년으로 대략 100년은 넘어간다. 제사는 장손만 지내는 줄 알지만 그것이 아니고 4대를 봉사한다는 것이 장손 4대가 아니라 살아있는 후손 4대다. 그러니까 장손의 4대는 고조부까지 기제사 지내는 것이고 큰아들로만 이어져 100년쯤 가는 동안 4세손이 죽고 5세손이 나와서 5대조인 현조부는 신주를 묘에 묻는 매안을 해야 하지만 작은집의 작은집에서는 장손에게는 현조부가 아직 고조부이거나 증조부인 후손이 있다면 신주를 묻는 것이 아니라 신주를 그 살아있는 증손자나 현손자(최장)의 집으로 옮겨 기제사를 이어 나가고 모든 현손자가 죽어야 신주를 묘에 묻는 매안을 해야 한다. 그런데 고봉 할아버지가 퇴계선생에게 질문하는 이 편지글은 그러면 현손자는 죽었지만 그 부인이 살아있다면 이때 신주를 묻는 매안을 해야 하나 아니면 그대로 있어야 하나 하는 문제이다. 고봉 할아버지에겐 고조부이신 청파 할아버지의 신주에 대한 물음에 대한 것은 기은 할아버지에 대하여 아드님 정자공 기침 할아버지가 쓰신 기의헌 행장을 소개 하면서 다시 올리겠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에서 인용한다. 그냥 읽으면 무슨 말인가 모를 듯하여 갈호안에 약간의 주를 달았다. [저의 가문은 영락하여 여러 종반들이 흩어져 살기 때문에, 온 집안의 높은 조상에 대해 오래도록 예를 거행하지 않아, 고조(청파 할아버지)의 신주가 아직도 제사를 주재하는 집에 있는데, 제사를 주재하는 이는 바로 그분의 5대손(의 할아버지인 듯)입니다, 전에 숙모(준 할아버지의 부인)가 살아 계실 때는, 그 분이 증손대(청파 할아버지의 증손자대는 책받침부수 돌림자 5형제대)가 되기 때문에, (옮겨야 하지만 준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안계시는 등 사정상)옮겨가 모실 수가 없어서 감히 체천(신주를 옮김)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숙모 역시 돌아가셨으니, 지금의 제도로 미루어 보건대 체천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이고, 증조(축 할아버지)도 제사를 이은 이(의 할아버지인 듯)에게는 고조가 되니, 이 분도 옮겨다가 모셔야 마땅합니다. 다만 최장(항렬상 가장 높은 분)이 되는 형(대림 할아버지)이 멀리 호남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옮겨다 모시는 예를 실행하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주재하는 이(의 할아버지인 듯)가, 어머니(대복 할아버지의 부인 전주이씨)가 아직 살아 계신다 하여, 다른 집으로 옮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비록 맏며느리가 주제하는 것에 관계되지만, 한때의 편의를 따른 것이니, 행할 수 있는 일인 듯합니다. 고조를 체천하는 의논에 대해서는 종형(4촌형으로는 이웃의 호남에 살던 참판공의 아들 3형제와 서울사는 고봉 할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의 대항 할아버지가 있지만 이분들 가운데에서 아마도 대항 할아버지인 듯) 이 [주자가례에도 고조까지 제사한다는 말이 있으니, 지금 체천하는 것은 편치 않다] 했습니다. 만약 다른 집으로 옮기고자 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실행하기 어려운 형편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주재하는 이의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다 하여 그대로 그 집의 별실에 모셔 두면, 이것은 5대를 제사하는 것이 됩니다. 제사를 주재하는 이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천봉하기가 이미 어렵고 그렇다고 매안(땅에 묻음)하는 것도 편치 않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제사를 주재하는 이의 나이가 많아서 종숙의 항렬에 있는 이들 가운데 도리어 젊은 사람이 많습니다. 상식적인 이치로 말하자면, 제사를 주재하는 이가 혹시 먼저 죽고 그 아들이 제사를 이을 경우, 한 집안에 6대의 제사가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예의 본뜻에나 시속의 편의에나 더욱 방해됩니다. 저희 집안이 비록 한미하다고는 하지만, 소종小宗을 받드는 이들이 무려 여나문 집이나 됩니다, 만약 4대를 봉사하는 것으로 정한다면, 마땅히 집안의 일족이 돌아가면서 받들어야지, 단지 종가에서만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제도를 어기고서, 집안이 돌아가며 제사를 받드는 것을 한 집안의 법으로 삼고자 한다면, 또한 의례가 꺼리는 데에 걸리고 옳지 못한 죄를 범하게 되어 매우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지금의 제도를 따르는 쪽으로 결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형님(대림 할아버지)이 마침 사당을 세운다고 하시며, 편지를 보내어 몇 분의 감실을 만들어야 하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그 때문에 다시 마음이 편치 아니하여, 새로이 가례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결정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종가의 경우에는 3대로 결정하고 우리 사당의 경우에는 4대로 정한다면, 남의 일을 처리하고 나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판이하게 둘로 갈라져, 더욱 편치 않게 느껴집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예에도 맞고 지금의 제도도 거스르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가르쳐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무릇 이러한 여러 곡절에는 또한 편지로 말씀드리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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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기대항(奇大恒) | 기회근 | 2026-09-07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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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필선 할아버지의 사위 김기손의 외손의 외손들 중에서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가 있고 그 남자 형제들의 후손인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 윤원형이 대윤 소윤하면서 싸워 윤형원이 이기고 외척으로 권세를 부리자 왕이 윤원형을 견재 제거하기위해 효령대군의 5세손 이량을 중용하여 이량이 정권을 잡는다. 기형 할아버지의 아들 기대복 할아버지의 부인은 2분이신데 모두 전주이씨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시간이 흘러 왕과는 10촌이상이 되는 사람들이 많아져 왕족을 벋어난 전주이씨라고만 나오지만 역시나 유력 가문들이다. 2번째 부인이신 전주이씨 할머니의 아버지가 위에 언급한 이량이다. 서울살던 정무공의 후손들도 이량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량은 사림을 싫어하여 기대승 할아버지 등 사림을 배척하다가 기준 할아버지의 아드님이시고 이량과 가까운 사이이던 기대항 할아버지가 왕에게 차자를 올려 숙청시킨다. 이후에 기대항 할아버지는 기묘8현이신 아버지 기준 할아버지의 후광도 더해져 승승장구하여 정2품 판서급의 한성판윤이 된지 10여일만에 종기가 퍼져서 돌아가신다. 몇일의 서울시장기간이었지만 정2품의 품계를 받자 아버지 기준 할아버지는 같은 품계의 정2품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할아버지이신 기찬 할아버지는 한등급아래의 종2품 이조참판겸 홍문관대제학으로 증조부인 기축 할아버지는 다시 한등급아래 정3품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이 되신다. 고봉집에는 4촌형인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와 작은 어머니이신 파평윤씨 할머니에 대한 글들이 많이 나온다. 판윤공 제문을 보면 1564년 여름에 판윤공 어미니가 병환이 나시자 판윤공이 극진히 보살폈고 그러다 판윤공 몸에 종기가 나서 요즘 같으면 항생연고 바르면 금방 고칠 것을 당시엔 종기가 몸에 퍼져 돌아가시고 파령윤씨 할머니도 병환 가운데 아들이 죽자 상심하여 그 한달 후에 돌아가신 것으로 나온다. 4촌형 한성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의 행장과 작은 어머니 파평윤씨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고봉 할아버지가 지으신 만장시가 있어 올린다.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기공(奇公) 행장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이름은 대항(大恒)이요, 자는 가구(可久)이며, 성은 기씨이니, 그 선대는 행주인(幸州人)이다. 증조의 이름은 축(軸)인데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로 여러 번 추증되어 승정원 좌승지에 이르렀으며, 증조모는 해주 정씨(海州鄭氏)로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찬(襸)인데 홍문관 부응교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할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와 안동 김씨(安東金氏)인데,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준(遵)인데 홍문관 응교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윤씨(尹氏)로 파성군(坡城君) 이름 금손(金孫)의 따님인데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다. 공이 높은 벼슬에 올라가면서 3대를 추증한 것이다. 기씨는 고려 초기로부터 무재(武才)로 일컬어져 대대로 공로를 드러냈다. 먼 할아버지이신 이름 수전(守全)은 지위가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는데,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공로가 백성들에게 베풀어졌으며, 그 후 자손들이 높은 벼슬을 지낸 이가 많아 집안이 크게 번성했는데, 그 후 다소 침체되었다. 이름 면(勉)은 조선조에 벼슬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가 되었는바 이분이 휘 건(虔)을 낳았는데, 청렴하고 지조가 있어 세종조에 유명하였다. 벼슬은 정헌대부 판중추부원사를 지냈으며, 별세하자 정무(貞武)로 시호하였으니, 바로 공의 고조이다. 공의 증조이신 승지공께서는 화를 만나 벼슬하지 못하고 집에서 있었으며, 할아버지인 참판공이 비로소 문장으로 이름났으나, 모두 장수하지 못하였다. 아버지인 판서공께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질로 성리학을 탐구하였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있어 일찍 큰 명망을 지니고 있었다. 중종께서 정치를 힘쓰던 때를 당하여 한두 명의 신하들과 함께 특히 신임을 받고 세속을 크게 변혁하려는 뜻을 두었다. 그리하여 경연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아는 것을 모두 말하여 국가를 위해 순고(淳古)한 정치를 다시 회복하려고 했었는데, 불행히도 죄를 입고 온성(穩城)으로 유배되었다가 마침내 옥리(獄吏)의 논죄를 받아 나이 30세에 별세하니, 말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애석히 여긴다. 공은 정덕(正德) 기묘년(1519, 중종14) 6월 17일에 태어났다. 태어나서 겨우 3세에 부친을 잃었는데, 어려서부터 빼어난 자질이 있었다. 차츰 장성하자 외가에서 공부하였는데, 영특하고 총명함이 뛰어나 하루에도 100여 자를 기억하였다. 외조이신 파성군은 공을 사랑하면서도 가엾게 여겨, 매양 억제하기를 “나는 온갖 세상의 화를 겪었으니, 자손 중에 뛰어난 재주가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였다. 공은 이로 말미암아 학문하는 데 느슨하여 재질을 다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약관 시절에는 우뚝이 두각을 나타내어 이미 명사들과 사귀었다. 가정(嘉靖) 경자년(1540) 봄에 사마시에 참여하여 반궁(泮宮 성균관 )에서 유학하니, 명성이 더욱 드러났으며 교유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병오년(1546, 명종1) 가을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정미년(1547) 8월에 추천되어 예문관 검열로 있다가 얼마 후 주서에 임명되었는데, 잘못한 일로 말미암아 체직되었다가 다시 검열이 되고 봉교로 전직되었다. 무신년(1548) 7월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고 저작과 박사를 지냈으며, 기유년(1549) 가을에는 부수찬으로 승진되고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부수찬이 되었다. 경술년(1550) 1월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체직되고 전적에 제수되었으며, 예조 좌랑으로 전직되었다가 다시 부수찬이 되고 수찬으로 승진되었다. 7월에 이조 좌랑으로 임명되었으며, 임자년(1552) 9월에는 경기 도사(京畿都事)로 나갔다. 10월에는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는데, 계축년(1553) 봄에 대관(臺官)이 전조(銓曹)에서 인물을 잘못 주의(注擬)하였다고 탄핵하여 장관인 판서와 차관인 참판이 함께 파직되었다. 공 역시 색랑(色郞)으로 파직되었는데, 얼마 안 있어 다시 서용되어 헌납에 임용되고 부교리가 되었다가 지평과 교리를 지냈으며, 또다시 헌납이 되었다가 체직되고 직강(直講)에 임명되었으며 병조 정랑이 되었다. 갑인년(1554, 명종9) 1월에 다시 이조 정랑이 되었으며, 2월에는 검상(檢詳)으로 전직되었다. 6월에 함경도 감군어사(咸慶道監軍御史)로 나가라는 명령이 내리자, 의정부에서는 전직에 유임할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체직하여 직강으로 삼아 군기시 첨정으로 옮겨졌다. 12월에 감군의 6개월간 임기가 차서 조정으로 돌아올 때 도중에서 사간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인 을묘년(1555) 6월에 다시 검상이 되었으며, 8월에는 전한에 임명되고 11월에는 다시 검상이 되었다가 얼마 후 사인(舍人)으로 전직되었으며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 병진년(1556) 5월에 통정대부로 특진되어 병조 참지가 되었는데, 전 참지가 그 임무를 그대로 수행하게 되어 공은 서반직(西班職)으로 옮겨져 호군 겸 오위장(護軍兼五衛將)에 보직되었다. 12월에는 황해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정사년(1557) 2월에 병으로 체직되어 조정으로 돌아오고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공이 서해(西海 황해도)에 부임해 있을 때에 간사한 사람 중에 자기를 추천해 주지 않는다고 공을 원망하는 자가 있어 비방하는 말을 퍼뜨려 공을 축출하려고 하였다. 이에 김홍도(金弘度) 등은 공을 헐뜯었는데, 이때까지도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공은 대부인이 당(堂)에 계심으로 인하여 외직으로 나가 봉양하기에 편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무오년(1558) 봄에 춘천 부사로 나갔는데, 관직에 있은 지 3년 동안 관리와 백성들이 크게 편안하였다. 경신년(1560) 7월 임기가 만료되어 예조 참의로 들어왔고, 호조 참의로 옮겨졌다가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우부승지로 옮겨졌다가 체직되고 부호군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예조 참의가 되었다. 신유년(1561, 명종16) 2월에 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글을 올려 과실을 규탄해서 조정에 도움이 매우 많았다. 이보다 먼저 시종관(侍從官)이 시호를 정하는 일로 유언비어를 당하여 화가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은 주선하여 힘을 다해서 이 화를 막으려고 노력하였는데, 마침 대관(臺官)이 다시 한두 명이 시세(時勢)를 좇아 이랬다저랬다 하는 모습을 논박해서 그 사이를 싸움 붙이려고 하였다. 이때 공은 건의하여 이것을 배척해서 이 사건이 마침내 가라앉게 되었다. 6월에 대사헌으로 특별히 제수되니, 품계는 가선대부였다. 공은 기강을 바로잡고 힘써 충성을 다하였다. 임술년(1562) 1월에 병으로 체직되고 4월에는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에 제수되었다. 계해년(1563) 2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5월에 병으로 체직되고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후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8월에 사헌부에서는 이량(李樑)의 사주를 받아 사림에게 화를 전가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은 동료들을 거느리고 차자(箚子)를 올려 이량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죄를 탄핵하고, 아울러 대간들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을 논박하였다. 차자를 올리자, 상께서는 크게 깨닫고 즉시 이량을 축출하도록 명하고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원을 교체시켰다. 공은 이날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자 사간원과 함께 아뢰어 화근에 대해 극진히 말하고, 이량 및 그 무리들을 귀양 보낼 것을 청하여 죄의 경중에 따라 차등을 두어 처벌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량은 외척을 이용하여 좋은 벼슬을 은밀히 차지하니, 청의(淸議)가 그를 비루하게 여겨 돌보아 주지 않았다. 이량은 이에 크게 분함을 머금고 밤낮으로 나쁜 사람들과 결탁한 다음, 총애를 믿고 권력을 남용하여 간계를 이루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몇 년 사이에 기세가 등등하여 흉계가 하늘을 찌르니, 사람들이 감히 어쩌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청의들이 자기들을 비난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이감(李戡)을 끌어들여 대사헌으로, 윤백원(尹百源)을 사간으로 삼고는 서로 음모하기를, 일시의 명유(名儒)로서 자기들과 이의(異議)하는 자들은 죄줄 만한 큰 잘못이 없으니 이들을 한 가지 죄목으로 지적하기가 어렵다고 하고는, 마침내 이들이 “선을 한다고 칭탁하고 청담(淸談)으로 정사를 비방한다.”고 모함하여 자기가 평소 미워하던 자들을 먼저 공격해서 그 솜씨를 시험해 본 다음, 장차 차례로 자기에게 붙지 않는 자들을 모두 제거하려고 하였다. 당시 국세가 매우 위태로웠으니, 만일 공께서 기미를 알고 임금에게 올바른 말을 아뢰어 상의 마음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사림은 거의 어육(魚肉)이 됨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에 사림들은 모두 공의 공로를 위대하게 여기고 공의 식견에 감복하였다. 이량이 권세를 부릴 때에는 조정에 있는 대소 관원들이 그의 앞에 달려 나가 아첨하였다. 그러나 그가 실패하자, 의논들이 과격해져서 모두 뿌리를 찾아내어 통렬히 단죄하려고 하였다. 공은 말씀하기를 “죄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많은 것은 조정의 좋은 일이 아니니 마땅히 공평하고 용서함을 힘쓸 것이요, 각박한 의논을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들에게 죄상을 논할 때에 너무 너그러운 결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크게 일어나 다투어 공을 비난하니, 공은 책임을 지고 면직되기를 요청하였다. 얼마 후 예조 참판으로 겸지성균(兼知成均)이 되었으며, 다시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으로 바뀌었다. 이때 권간(權奸)들을 새로 물리친 뒤라서 인재 등용을 매우 삼가고 있었는데, 공은 이조 참판이 되어 인물을 등용할 때에 선발을 잘하여 국가가 힘입은 바가 많았다. 당시 훈척대신(勳戚大臣)이 위엄과 권세를 농간하여 권력이 임금에 비견되니, 조야(朝野)에서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였다. 공은 마침내 왕실에 마음을 두고 끝내 화의 빌미가 될까 두려워하여 차츰 억제해서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형세상 어려움이 있어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갑자년(1564, 명종19) 5월에 대부인께서 종기를 앓아 매우 고생하니, 공은 정성을 다해 약을 쓰고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직하고 6월에 서반(西班)으로 옮겼다가 공조 참판으로 바뀌었다. 대부인의 증세는 조금 덜하였는데, 공이 또 어깨와 목 사이에 종기가 나 의원에게 치료를 받고 약을 썼으나 효험이 없어 날로 점점 위독하였다. 7월 갑진일에 특별히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니, 품계는 자헌대부였다. 공은 항상 지위가 높아짐을 두려워하였으므로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는 교서가 내리자, 아들과 조카들은 공이 놀라고 동요될까 염려하여 아뢰지 않았다. 그랬는데 9일이 지난 임자일에 병세가 더욱더 위중해져서 치료할 수가 없게 되자 마침내 이 사실을 아뢰었다. 공은 낙심하여 한동안 있다가 말씀하기를 “나의 병세는 이와 같은데 특별한 총애가 거듭 이르니, 나는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시고는 말씀을 거듭하셨으나 분명하지 않았고,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니 향년 46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께서는 크게 애통해하고 철조(輟朝)하였으며 부의와 구휼함을 특별히 더하였다. 공은 덕성이 심후(深厚)하여 외모 꾸미기를 일삼지 않았으며, 마음을 두고 행신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집에서 어버이를 받들 때에는 그 정성을 지극히 하였으며, 규문(閨門) 안에서는 매우 화락하였다. 벼슬을 담당하여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너그러움과 용서를 근본으로 삼고 세세히 살피는 것을 현명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사람을 널리 사랑하고 용납하여 신분의 귀천과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다 기뻐하였다. 손님과 벗이 항상 자리에 가득하여 하루 종일 담소하면서 게으른 빛이 없었다. 흉금이 화평하고 도량이 넓어 흔들리지 않았다. 혹자는 청탁이 서로 뒤섞여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마음은 경위(涇渭)가 매우 분명하였다.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을 즐거워함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와 남들이 기예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좋게 여겼으며, 기상이 후중하여 바라보면 매우 의젓하였다. 겉으로는 심히 가타부타하는 것이 없는 듯이 보였으나, 중심은 참으로 밝고 결단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큰 의심스러운 일을 결단함에 있어서는 크게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간사한 사람들을 제거할 때에 공이 힘을 가장 많이 썼으므로 중망이 더욱 공에게 돌아갔다. 공 역시 세상을 바로잡는 것으로 자임하여 선한 사람들을 북돋아 주고 심어 줘서 국운을 붙들고자 하여 비호하고 장려 선발하기를 항상 미치지 못할 듯이 하니, 사림에서는 공을 의지하기를 마치 제방이 홍수를 막아 주듯이 여겨 두려움이 없어졌으며, 간사한 무리들은 공을 두려워하여 감히 나쁜 마음을 내지 못하였다. 공이 별세하자, 조정의 대신들로부터 아래로는 마을에 있는 선비에 이르기까지 공을 아는 자들은 놀라 부르짖고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모두들 말하기를 “공의 존망에 국운이 달려 있는데 하늘이 갑자기 공을 빼앗아 갔으니, 하늘은 참으로 알 수 없다.” 했으며, 명종께서 어제(御題)로 독서당(讀書堂)에 내린 글에 맨 먼저 말씀하기를 “기 판윤(奇判尹)을 애도하노라.”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상이 친필로 쓰신 것이다. 공의 사망에 대해 애통해한 것은 비단 아랫사람들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성상께서도 그러했던 것이다. 대부인께서는 애통해한 나머지 옛날의 병이 다시 도져서 1개월 후에 또다시 별세하였으니, 하늘의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이 이러하단 말인가. 이해 10월 1일 경오에 고양군 원당리(元堂里)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안장하니, 참판 부군의 묘 아래에 있었으며 판서 부군의 묘와는 서로 바라보이는 수백 보 사이에 있었다. 공이 처음 별세하자 친구들과 관리들이 애통하고 실성통곡하여 친척을 잃은 듯이 슬퍼하였는데, 장례 때에도 이와 같이 해서 더욱 지극히 하였으니, 여기에서도 공의 덕이 인심에 사무쳤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공은 양주 조씨(楊州趙氏)에게 장가드니, 성균관 사성 조방종(趙邦宗)의 따님이다. 아들은 한 사람인데, 응세(應世)로 부원군 임백령(林百齡)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으며, 측실(側室)의 아들은 직남(直男)인데 어리다. 공은 큰 재주와 훌륭한 그릇으로 마땅히 크게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수(壽)가 덕에 차지 못하여 중도에 탈락되었고 학문 또한 세상에 크게 드러나지 못했으니, 이는 슬퍼할 만하다. 감히 역임했던 관직과 행적의 대강을 상고하여 위와 같이 기록해서 작자에게 묘지(墓誌)를 청하여 불후(不朽)를 도모하려고 하는 바이다. 삼가 행장을 짓는다. 고봉 할아버지께서 숙모가 돌아가시자 숙모에 대한 만장〔挽叔母 : 판윤공(判尹公)의 모부인(母夫人)〕을 지었는데 같이 올린다. 이위를 슬퍼하는 외로운 인생 / 孤露悲伊蔚 오히려 숙모님을 의존하였네 / 猶依叔母存 말씀을 받든 지 얼마였던고 / 幾多親警欬 돌이켜 혼정신성하는 것 같았네 / 還似奉晨昏 이다지도 갑자기 돌아가시니 / 奄忽今何遽 쓸쓸함은 차마 말할 수 없네 / 凋零不忍言 거친 산 상여끈을 자르는 곳에 / 荒山斬紼處 통곡의 눈물 물동이 기울인 듯 쏟아지네 / 摧痛淚傾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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