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제목 | 작성자 | 날짜 | 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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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차례 | 기회근 | 2026-07-03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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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씨 역사에 관하여 알고 있고 찾은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만든다 1. 역사에 나오는 기씨의 시작 2. 고려시대 중기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기씨와 1세조 3. 3세조 4형제와 3세조모 진원군부인 오씨 4. 7세 황후기씨관련 5. 연천의 이른바 기황후능의 허구 6. 7세 현 할아버지와 신해참화 7. 행주기씨 큰 문중(대파) 8. 조선 태종의 기자재竒自在 대고모의 사면 9. 중흥조 정무공貞武公 청파靑坡 기건奇虔 할아버지 10.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 아들과 손자의 왕실 혼맥 11. 정무공 첨파 할아버지의 증손자 5형제 문중과 기묘사화 12. 기자 후손설 13 원당 정무공 도선산의 연혁 14. 기씨의 도선산 15. 안성 만전상공 묘역과 대종중 연혁 됴녀우냥두오도오ㅗㅇ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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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1. 역사에 나오는 기씨의 시작 | 기회근 | 2026-07-03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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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에 보이는 가장 오래된 기씨奇氏기록은 삼국사기 권제50/열전10/서기936년09월08일(음) 견훤의 멸망에 나오는 기언奇彦 기록이다. [대상大相 견권堅權, 술희述希, 금산金山, 장군將軍 용길龍吉, 기언奇彦 등으로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왼쪽(左翼)을 맡게 하였다.(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領步騎三萬爲左翼)] 같은 사건을 기록한 고려사절요1권/태조신성대왕/병신19년(936년)가을9월(秋九月) 기록엔 기언奇言으로 나온다. [지천군대장군支天軍大將軍이며 원윤元尹인 능달能達 기언奇言 한순명韓順明 흔악昕岳과 정조正朝인 영직英直 광세廣世 등으로 보군 10,000을 거느리게 하여 왼쪽(左綱)을 맡게 하였다.(支天軍大將軍元尹能達奇言韓順明昕岳正朝英直廣世等領步軍一萬爲左綱)] 언彦과 언言은 소리는 [언]이고 뜻은 [말]로 같지만 꼴은 다른 글자이다. 고려중기 편찬된 삼국사기와 조선초기 고려실록을 보고 요약한 고려사절요의 글자가 다르지만 우리 족보는 오래된 삼국사기의 彦을 따른다.(彦一作言) 기언奇言의 직위가 무엇인지는 그 앞에 나오는 장군將軍 용길龍吉과 원윤元尹 능달能達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지천군대장군支天軍大將軍이면서 원윤元尹 이다. 그러나 이분의 출신이나 나이 등등 다른 정보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금석문이 영월寧越 흥령사징효대사탑비興寧寺澄曉大師塔碑에 있다. 다음은 기호철님의 해설글을 따온다. [이것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흥령사 옛터인 법흥사法興寺에 있는 신라말의 선사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826년~900년)의 비이며 보물 612호이다.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비문을 짓고, 최윤崔潤이 해서로 썼으며, 최환규崔奐規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44년 후인 944년(고려 혜종 원년)에 세웠다. 900년에 입적하여 906년에 시호를 내리고 비의 건립은 온 나라의 먼지가 멈춘 944년에 이루어졌다. 비문의 전면(앞면)은 36행(줄)에 1행(줄) 81자, 음기(陰記:뒷면)는 29행(줄)으로 이루어졌다. 이 비에는 징효대사의 제자들이 뒷면에 기록되어 있다. 각 절의 주지寺主부터 뒷날에 고려 정종定宗과 광종光宗이 되는 왕자와 고위 관료 수십 사람과 명주溟州 등 각 연고 지역의 세력가 등등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인물도 있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고려초 원윤元尹벼슬을 하고 있는 기오奇悟와 기달奇達 두 사람이 나란히 나타난다. 원윤元尹은 936년(태조 19년)에 제정하였는데 왕건이 태봉泰封의 위계位階를 본떠서 정한 것으로, 왕건의 직속 부하를 중심으로 하여 고려 왕권에 복속한 친고려적 정치집단인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960년(광종 11년)에 제정된 사색공복 규정에 따르면 원윤 이상의 관료, 호족은 자삼紫衫(붉은 보라색)으로 정하였으며 976년(경종 1년)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의 실시로 원윤 이상은 18품으로 나뉘어 전시를 받았다. 또한 성종 때에는 원윤 이상에게 말을 하사하고, 문무관을 구분하여 정계正階를 주었다. 이렇게 볼 때 자삼은 관직을 가진 관료층을 포함하면서 원윤 이상의 관계만을 가진 호족층을 포함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광종 때 지나의 문산계文散階와 함께 관계官階에 같이 쓰다가 995년(성종 14년)에 중앙관리의 관계가 모두 문산계를 쓰면서 원윤 등은 향직鄕職체제로 존속하였다. 기오奇悟와 기달奇達 두 사람이 징효대사의 제자들을 열거한 비석의 뒷면에 기록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징효대사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지녔던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으며 기오 바로 다음에 기달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부자父子, 형제兄弟 혹은 가까운 친척親戚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모두 원윤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형제 혹은 4촌형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 비에 나타나는 사람들 가운데 고려사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고려의 건국공신들이며 대부분 명주, 죽주, 청주, 음성 일대의 호족들로 혜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정종과 광종을 옹립한 세력들이었다. 기오 기달 두 사람은 우리 족보에 나타나지 않으며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없지만,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나타나는 장군 기언奇彦과 관련 있는 사람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기씨의 선대를 유추한다면 신라말 고려초 지방(아무래도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넓게 보아 경기도 일대)호족으로 대체로 육두품 세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징효대사와 직간접으로 제자였다는 사실은 최소한 육두품세력 이상이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강성한 호족세력은 아니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태조는 강력한 호족들은 혼인을 통해 회유했는데 이 대상은 아니었고 또한 비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18품계 가운데 6품에 속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언, 기오 그리고 기달과 지금 현재 우리 기씨와 어떻게 세계가 연결이 되는 지는 알 수가 없다. [인용] https://db.history.go.kr/KOREA/item/gskoDetail.do?levelId=gsko_001_0640 판독문 뒷면 [01-01] 謹錄賢哲僧俗弟子尊位排在於後 [01-02] 能善寺主 乘全寺主 聡 校勘 月寺主 崔虛大德 [01-03] 弘琳大德 契貞大統 慶甫大統 性言大德 [01-04] 王堯君 [01-05] 王照 校勘 君 [01-06] ▨▨大王 弼榮大王 英章正匡 王景大承 [01-07] 淸端宮 校勘 主 金鎰蘇判 兢達蘇判 王規佐承 [01-08] 權悅佐承 王詢佐承 王廉佐承 誠俊元甫 [01-09] ▨▨▨▨ 校勘 金奐阿飡 金休長史 鎰休郎 [01-10] ▨順元甫 希悅助 兢悅助 式榮韓飡 [01-11] 寬質韓飡 兢鎰海飡 賢逢元甫 官憲元甫 [01-12] 廉相海飡 允逢元甫 憲邕元尹 師尹一哲飡 [01-13] 侃榮阿飡 章劍史上 弼邢大監 姚謙郎 [01-14] 崔芳元尹 奇悟元尹 奇達元尹 知連正衛 [01-15] 與一正朝 平直阿干溟州 [01-16] 剋奇溟州 金芮卿溟州 連世大監溟州 [01-17] 王侃原州 德榮沙干竹州 弟宗沙干竹州 [01-18] 宋嵒史上公州 平直村主堤州 貴平一吉干堤州 [01-19] 堅必村主冷井 堅奐沙干新知縣 越志山人新知縣 [01-20] 哀信沙干又谷郡 能愛沙干又谷郡 世達村主奈生郡 [01-21] 式元大監冷水縣 明奐村主酒淵縣 康宣助別斤縣 [01-22] 金立房所郎 吉舍村主丹越驛 [01-23] 崔山㭆 校勘 [02-01] 當時三綱典名位列 [02-02] 院主希朗長老 [02-03] 典座昕曉上座 [02-04] 史道澄禪師 [02-05] 直歲朗然禪師 [02-06] 檢 校勘 校維那良善長老 校勘 [02-07] 堂維那契融上座 [02-08] 持客契廉禪師 에서 [01-14] 줄의 崔芳元尹 奇悟元尹 奇達元尹 知連正衛 https://ko.wikipedia.org/wiki/영월_흥녕사지_징효대사탑비 왕건의 통일전쟁에 나오는 기언奇彦에 대한 기록 이후에 고려사에 등장하는 기씨 기록은 73년후인 1009년 01월 16일(음) 목종12년에 왕의 주치의였던 태의太醫 기정업奇貞業이다. 그러나 이분도 목종이 아파서 밤새워 자리를 지켰다(直宿)는 것이지 나이나 가족관계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기정업의 기록 24년 후인 1033년에 발해사람 기질화奇叱火 등 11명이 투항해와서 남쪽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보인다[渤海奇叱火等十一人來投處之南地] 기언 기오 기달 기정업 기질화 가운데 현재우리의 직계 조상으로 연결이 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발해사람으로도 기씨가 있었고 발해는 고구려와 연결되며 행주가 옛 고구려의 땅이였다는 점에서 기씨가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것은 알수있다. [_삼국사기 기언.png, left_] [_고려사 기언.jpg, left_] [_영월 징효대사비.jpg, left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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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고려시대 중기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기씨와 1세조 | 기회근 | 2026-07-03 |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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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기씨의 중흥은 기탁성奇卓成부터이다. 기탁성은 무관으로 폴로경기인 격구를 잘하여 의종의 눈에 들고 경호부대인 견룡에 근무하여 경호부대장인 위장군衛將軍까지 되었다. 이어서 정중부의 무신란에 가담하여 권력자가 되었다. 이때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평양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진압군의 부원수로 참전하고 돌아왔다. 이때 19세의 최충헌을 별초도령으로 발탁하여 최충헌 출세의 길을 열어준다. 우리기씨의 중흥과 연관이 있는 기탁성, 최충헌, 기홍수의 졸기(죽은 기록)를 고려사에서 인용한다. [기탁성奇卓誠은 행주幸州 사람이다. 용모와 태도가 아름다웠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했다. 처음 교위校尉에 보임補任되었는데, 의종毅宗이 말타기와 격구擊毬를 좋아해서 그를 견룡군牽龍軍으로 발탁하여 늘 곁에 있게 했다. 권력을 가진 귀족(權貴)들을 잘 사귀더니 위장군衛將軍으로 승진하였고, 명종明宗 초에는 여러 번 승진하여 참지정사叅知政事가 되었다.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키자, 기탁성은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이를 참전하였고, 돌아와서는 판병부사判兵部事로 있다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로 승진하였다. 김평金平이란 사람이 있어 어려서부터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김보당金甫當의 난에 장인 한언국韓彦國이 피살되자 김평은 처자妻子를 데리고 승평군昇平郡에 숨어 살았다. 기탁성이 정권을 잡자 김평이 재능이 있다 하여 직사관直史館으로 발탁하였다. 기탁성은 재물 욕심이 많아 벼슬을 판 까닭에, 어진 이들이 자취를 감추고 남을 모함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다투어 진출하였다. 가신家臣 고충전高忠全과 이인령李仁齡은 모두 교활한 데다 탐욕스럽고 야비하여 그 악명이 멀리까지 퍼졌다. 기탁성은 명종 9년(1179)에 죽었다. 광평궁廣平宮이 오랫동안 버려져 주인이 없자 기탁성은 왕에게 요청하여 그 궁에 살고자 하였다. 그의 처가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고 몇 달 동안 광평궁에서 살다가 죽었다. 뒤에 왕이 조위총의 반란을 토벌한 공을 인정하여 추충협모좌리동덕공신推忠協謀佐理同德功臣 수태사守太師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추증追贈하고 공신각에 초상을 그려 안치하였다. (奇卓誠, 幸州人. 美容儀, 善射御. 初補校尉, 毅宗好馳馬擊毬, 擢爲牽龍, 常在王側. 善事權貴, 驟遷衛將軍, 明宗初, 累轉叅知政事. 趙位寵起兵, 卓誠爲副元帥禦之, 及還, 判兵部事, 進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 有金平者, 少有文名, 金甫當之亂, 妻父韓彦國被戮, 平携妻子, 隱於昇平郡. 及卓誠秉政, 以平有才, 擢爲直史舘. 卓誠貪財賣官, 由是, 賢者屛跡, 讒佞競進. 家臣高忠全·李仁齡, 皆姦黠貪鄙, 惡聲遠播. 九年卒. 廣平宮久廢無主, 卓誠欲請王居之. 其妻諫止之, 不聽居數月而死. 後王論討位寵功, 贈推忠協謀佐理同德功臣守太師·門下侍中, 圖形閣上.)] 최충헌은 기씨는 아니지만 그의 묘지명에서 우리 기씨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만 따온다. [부인夫人 송씨宋氏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송청宋淸의 딸이다. 부녀자로서의 규범[柔範]에 원칙이 있었고, 부인으로서의 도[婦道]에 어긋남이 없었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으며, 공보다 앞서 죽었다. (夫人宋氏, 知樞密院事尙書左僕射上將軍致仕宋淸之女也. 柔範有則, 婦道無違. 生二子一女)] 기탁성이 의종 때에 무관이 되고 정중부의 무신난 이후에 권신이 되면서 기탁성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역사책이나 족보에 보이지 않던 기씨들이 역사책에 나오기 시작하는데 1178년에 장군 기세준奇世俊을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고 1179년엔 중랑장 기세정奇世貞이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족보에서 1세조 기순우奇純祐 할아버지는 高麗 仁宗時人 官門下平章事라 하지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 다른 역사책에 기탁성이 나타나기 이전에 의종의 아버지인 인종 때에 기씨가 이렇게 높은 벼슬하신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선세업적에는 이곡이 지은 영안왕 기자오의 행장 기록에서 가져왔다고 하지만 영안왕 행장을 읽어보아도 영안왕의 최대 선조는 영안왕의 고조부이자 우리에겐 2세조이신 기수전奇守全 할아버지까지는 高祖門下侍郞平章事諱守全으로는 나와도 기순우 할아버지는 기록에 없다. 그러나 17세기에 나온 조종운이 지은 씨족원류 책의 행주기씨 부분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이책에서 시조 기순우 할아버지를 文林郞追封門下平章事太子太傅로 기록되어 있다. 위 내용들로 정리 하자면 기탁성이 정중부의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평양에서 일으킨 1174년 조위총의 반란을 평정하러 부원수로 갈 때 19세의 최충헌을 별초도령으로 발탁하여 출정한 기록으로 보아 기탁성이 정3품의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라 지금의 3성 장군쯤 되고 최충헌은 별초도령이라 중위, 소위의 소대장 정도로 보면 나이는 20여년 차이가 날테고 크게 보면 부모와 자식뻘로 보인다. 이 최충헌의 첫 번째 부인이 송청의 딸이며 2세조 기수전 할아버지도 부인이 송청의 딸이다. 그러니까 둘은 동서간이 된다. 1세조 기순우 할아버지가 벼슬이 말단의 종9품 문관인 문림랑文林郞 이었는데 기탁성이 권신이 되어 여러 기씨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고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동서인 2세조 기수전 할아버지가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면서 1세조 기순우 할아버지도 정2품의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추증이 된 것으로 보인다. 최충헌의 집권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기홍수奇洪壽이다. 족보엔 3세 기윤숙奇允肅의 큰아들로 나오지만 잘못된 것으로 역사기록에는 최충헌과 함께 여러 국정을 논의한 기홍수를 최충헌의 처조카의 아들로 족보에 기록한 것은 기윤숙의 아들들 돌림자가 홍洪이라서 같은 세대로 착각하여 족보를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를 인용하면 기홍수는 어려서는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지였으나, 장년이 되어서 무인이 되었다. 1194년(명종 24) 12월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197년 9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 판병부사判兵部事, 11월엔 수사도守司徒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감수국사監修國史 판병부사判兵部事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 1199년(신종 2) 5월에 명필이라서 신종의 명령으로 대관전무일편大觀殿無逸篇을 고쳐 썼으며, 12월에 수태위守太尉 문하시랑門下侍郎 평장사平章事, 1200년 12월에 수태사주국守太師柱國, 1201년 12월에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를 거쳐 1203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로 물러났다. 1204년 1월에 최충헌崔忠獻 등과 더불어 신종으로부터 희종에게의 왕위를 물려주는 논의를 하였고, 희종 때 이부吏部에서 전선銓選(인사행정)을 맡았으나, 최충헌에게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음악과 글씨를 즐겼다. 시호는 경의景懿이다. 부인은 기록이 없지만 인터넷에는 몰몬교에서 운영하는 족보에 기홍수의 부인이 박씨라고 나온다. 그러나 더 검색은 되지 않고 있다. 기씨로서 기홍수가 높은 벼슬을 지낸 것도 중요하겠지만 기홍수가 물러나 음악과 글씨로 여생을 보낸 집터가 행주산성 안의 우리 행주기씨유허비가 있는 자리이다. 기가우물 즉 기감천은 기홍수 집의 샘터이고 기가바위 즉 기가암은 정원의 바위이다. 기탁성과 기홍수가 기씨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들인데 아쉽게도 두분 다 조상과 자녀에 대한 기록이 없다. 기탁성은 1세조 기순우 할아버지와 같은 세대 기홍수는 2세조 기수전 할아버지와 같은 세대로 보여서 그 많은 고려시대 유명인사들의 묘지명은 많이 나오는데 이 두분의 묘지명은 없나 아쉬운 마음이다. 묘지명엔 대게는 위로는 증조부까지 아래로는 후손도 기록이 있으니까 이 시대 누군가의 묘지명을 찾으면 혹시나 기순우 할아버지나 기수전 할아버지와 연결되는 형제 4촌 혹은 6촌의 관계를 찾을 수 있거나 기순우 할아버지 이전의 할아버지들을 찾을 수도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있다. 한쪽으로는 묘지명은 묘가 도굴꾼들에게나 지역개발로 이름모를 옛무덤이 파해쳐저서 찾아질 텐데 그런 험한 일은 안 당했음을 다행이라는 마음도 든다. 아니면 두분 다 자손이 없어서 묘지명을 준비한 후손이 없나 그런 마음도 든다. 하여간 기순우 기탁성 기수전 기홍수 모두 묘도 모르고 묘지명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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