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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고봉 선생 | 기회근 | 2026-09-07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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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선생이 19살에 자기 생을 뒤돌아보며 지은글 자경설自警說 고인古人들은 모두가 과거의 허물을 자책하여 스스로 경계하였으니, 이는 과거의 실수를 마음 아프게 여기고 앞으로 잘하겠다는 생각을 일으키려고 해서이다. 이는 모두 성인聖人과 현사賢士들이 뜻을 붙여 공부하던 것인데, 나만 어찌 유독 그러하지 않겠는가. 가영歌詠하던 나머지 아득히 19년 전의 일을 멀리 생각해 본다. 나는 가정嘉靖 정해년(1527, 중종22)에 태어났으니, 곧 대행왕大行王(중종)22년이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할머니를 여의고 이갈이를 할 무렵에 어머니를 여의고서 오직 아버지만을 의지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고생하시면서 나를 길러 주셨는데, 나는 어려서부터 질병이 많아 죽다가 살아나곤 하였다. 이제 와서 아련히 그때 일을 생각하니, 비통함이 하늘에 사무친다. 아,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가끔 소싯적 일을 생각해 보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한두 가지 생각나는 것도 있다. 계사년(1533)에 비로소 가정에서 수학하였다. 이듬해인 갑오년(1534) 초가을에 어머니상을 당하여 이로 인해 결연히 학업을 내팽개치고 더 이상 학문을 일삼지 않았으며, 아버지께서도 막 상喪을 당한 터라 가르치지 않으셨다. 을미년(1535)에 효경孝經을 읽고 글씨를 배웠으며, 또 소학小學을 외우기도 하여 거의 자포자기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고 귀신 역시 무정하여 병신년(1536) 겨울에 작은누이가 역질로 죽었다. 아버지께서는 환난과 재앙이 거듭 미침으로 인해 산의 절로 피해 가 계셨으므로 나 또한 따라가서 글을 읽고 글씨도 익혀 자못 학업이 진전될 가망이 있었다. 병신년 겨울부터 정유년(1537) 가을까지 아버지께서 절에 계시다가 늦가을에 서울에 가실 일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서울에 가신 뒤 나는 집에 있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10월 초에 스스로 분발하여 서당에 가서 대학을 다 배우고 이어 한서漢書와 한유韓愈의 문장을 읽으니, 그해가 벌써 저물었다. 따라서 집에 내려와 근친覲親한 다음 다시 올라가서 맹자와 중용을 읽었으며, 늘 동료들과 더불어 연구聯句를 짓거나 문장을 짓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공부에 소질이 있다고 하였다. 고문진보 전집前集을 읽고 또 고부古賦를 읽고는 끊이지 않고 줄줄 외웠는데, 그때가 무술년(1538, 중종33)이었다. 이 당시 내 외조부(강영수)의 첩인 외조모께서 가문의 어른으로서 항상 여러 손자들을 어여삐 돌보셨다. 나의 어머니께서 어릴 적에 일찍이 그 집에서 자랐고 나의 형(기대림)도 그 집에서 자랐는데, 우리들이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매우 극진하게 돌보아 주셨다. 연세가 팔순이 넘었는데도 청력이나 시력이 조금도 감퇴하지 않았다. 항상 나를 어루만지며 [반드시 대인大人이 될 것이니 열심히 글을 읽으라!] 하셨는데, 그해 봄에 별세하였다. 집안에 화(家禍)가 갑자기 닥치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고문진보 후집을 수백 번 읽고 나니 때는 7월이었다. 그대로 이듬해 10월까지 읽어 마치고 나니, 기해년(1539)이었다. 이때 선배들이 감시監試를 보기 위해 서당에 모여 글을 읽고 문장을 짓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나도 따라 배웠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가송歌誦은 시속을 따르지 않았고 시부詩賦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 비록 법도에 맞지는 않았지만, 더러 글을 잘 짓는다고 칭찬한 사람도 있었다. 10월 그믐께 아버지께 사략史略을 배우기 시작하여 3개월에 걸쳐 끝내고 나니, 해는 경자년(1540)이요 달은 1월이었다. 그 후 차츰차츰 우매함이 트이고 학업이 진전되었다. 이어서 논어論語를 수학하여 가을에 끝마쳤다. 이해 봄에 외숙부께서 문과에 급제하여 가을에 성묘를 하러 이곳에 오셔서는 내가 닦은 학업을 살피시고 당시 배우고 있던 것을 강론하시면서 나에게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고 면려하셨다. 그러자 서울의 친척들이 내가 장차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내가 저술한 글들을 요구하였으므로 나는 즉시 글을 다 모아서 친척들에게 부쳐 주었다. 이 때문에 나의 상자 속에는 그전에 지었던 초고草稿가 없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는 서전書傳을 읽어 모두 외웠다. 이듬해 가을에는 시전詩傳을 읽고 이어 주역周易을 읽었다. 경자년(1540, 중종35)부터 신축년(1541)까지 8개월 동안과 신축년부터 임인년(1542) 봄까지 10개월 동안을 합해서 계산하면 달로는 18개월이요, 햇수로는 1년 반쯤 되는데, 그동안 뜻이 해이해지고 성질이 나태해져서 입으로 읊지도 않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않은 시간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비록 가끔씩 분발하려는 기분을 가져 보기도 했지만 상황이 도와주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아버지께서 내가 조금 아는 것이 있다고 하여 항상 수강授講을 엄하게 하지 않으시고 훈계하고 권장하는 일도 소홀히 하셨으며, 때로 방탕하게 노는 일이 있어도 심히 책망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내 안일하게 지낼 수 있다고 여겨, 그 결과 나이가 들수록 학문은 더욱 떨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뜻은 더욱 해이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소득이 없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신축년(1541) 봄에는 외종조모外從祖母를 곡哭하였다. 외종조모께서는 항상 우리 어머니를 양녀로 삼아 오시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우리를 자식처럼 여겨서, 추울까 염려하여 옷을 입히시고 주릴까 염려하여 밥을 먹여 주셨다. 어린 내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오직 외종조모가 내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때 이르러 별세하여 영원히 이 세상을 하직하셨으니, 이 원통함이 어찌 다하겠는가. 하늘이여, 귀신이여! 몇 해 전에는 우리 어머니를 빼앗아 가고 이제는 또 우리 외종조모를 빼앗아 가니, 하늘이여, 귀신이여! 한결같이 어쩌면 나에게 이처럼 모진 고초를 내린단 말인가! 아버지를 수발하여 봉양하는 일로부터 많은 식구들과 어머니 여읜 우리 두 형제에 이르기까지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옷이 해지거나 하면 어디서 도움 받아 구할 것이며, 제쳐 두고 거행하지 않은 뒷일은 누구에게 고할 것이며, 어리석고 용렬한 노비들은 누구에게 명령을 받아 일을 한단 말인가! 밤낮으로 묻고 배우며 출세하기를 바라던 것도 이제는 영화롭게 봉양하는 데 쓸모가 없게 되고 말았으니,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이해 늦봄에 모두 130구句가 되는 서경부西京賦를 지었다. 용산龍山(정즐鄭騭)이 평론하기를 [그 글을 읽어 보면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있으니, 그 명성이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퍼지겠다. 생각이 심원하고 기상이 장대하며, 어조가 고상하고 문장이 통창하다. 비록 간간이 서투르고 껄끄러운 데가 있기는 하나 단지 이것은 조그마한 흠일 뿐이다. 조금만 더 진취하면 곧 옛 작자作者의 경지에 이를 것인데, 더구나 그 밖의 과문科文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축하할 뿐이다.] 하였다. 여름에는 서정부西征賦를 차운次韻했는데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이듬해 봄에는 가을에 과거를 보리란 기대를 갖고 시험 삼아 시부를 지어 보았다. 그러나 학문을 한 것이 보잘것없고 생각이 꽉 막혀서 끝내 편篇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슬퍼하기를 [나는 다행히 세상에 태어나 두 가지 낙樂을 얻었으니, 질병과 가난에 대한 걱정도 없고 농사짓는 수고로움도 없다. 그런데도 포기한 채 학문을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일삼을 것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개탄스러워 말을 하지 못했다. 며칠 뒤 선배들이 서당에 모였다는 말을 듣고 나도 가서 어울렸지만, 거기서도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다. 한번은 조정몽주부吊鄭夢周賦를 지어 보았는데 이때는 붓끝이 저절로 막힘이 없었으니, 끝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5월에는 제생諸生들이 모두 돌아갔으므로 나 또한 집에 내려와 매일 부지런히 하여 날마다 한 번 읊을 때마다 고부古賦 10여 수를 온습溫習하고는 시험 삼아 의정부부議政府賦와 고소대부姑蘇臺賦 총 100여 구를 지어 보았는데, 그제야 비로소 옛날에 배웠던 것을 회복하여 거의 학업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기대하게 되었다. 가을에 시험에 응시했으나 끝내 이룬 것이 없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지기志氣가 쇠퇴하여 끝내 개연히 분발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대학 한 책만 끼고 어영부영 한 해를 마쳤다. 그 후 파방罷榜되었다는 기별을 듣고는 열흘 동안 산사에서 원부元賦 가운데 초抄한 것을 외웠다. 그러나 하해河海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한갓 근원 없이 두절된 연못가에서 머뭇거리며 큰 바다에 나아가지 못하여 소견이 커지지 못했으니, 아무리 속을 태우고 오래 생각을 해 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떤 직무에 종사도 해봤지만 역시 남에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의의疑義를 지은 것이 매우 좋아 사람들이 모두 허여하였으므로 일득一得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끝내 얻지 못했으니,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책을 싸 들고 산재山齋로 갔으니, 때는 벌써 초여름이었다. 목사牧使 이공 홍간李公弘幹이 제생들을 불러 모아 학교에서 강의를 하였으므로 나도 찾아가서 함께 어울리며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고는 6월 그믐에 파접罷接하고 돌아왔다. 그 후 8월 초하루에는 목사가 다시 생도 10여 명을 모아 놓고 소학을 강의하였으므로 나도 거기에 끼었다. 그로 인하여 교적校籍에 이름을 올리고 분주히 맡은 직분을 수행하였는데, 길이 또 매우 멀고 험해 한 번 출입할 때마다 4, 5일씩 쉬는 바람에 학업이 폐해지고 뜻이 해이해졌으니, 그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오가는 가운데 홀연히 세모歲暮를 만났으니, [세월은 말 위에서 다 보내고, 시서는 상자 속에 쟁여 두었다[日月馬上過 詩書篋中藏]]고 한 옛사람의 말이 꼭 맞는 말이라 하겠다. 다음 해 갑진년(1544)에 목사 송공순宋公純이 유생 가운데 더 배우기를 청한 자들을 선발하여 글을 강송講誦하도록 하고, 반드시 그 강송하기 시작한 때를 기록하여 기간이 오래되었으면 곧 학업이 얼마나 성취되었는지 심사하곤 하였다. 나는 이로 인해 맹자를 읽어 3월 그믐에 끝내고 한유韓愈의 글을 읽었다. 4월 보름에는 용산龍山 선생을 찾아뵈었다. 5월에 장차 도회都會에 가려고 선생을 뵈었더니, 선생께서 민암부民嵒賦를 지으라고 명하셨다. 부를 다 짓자 선생께서는 자주 칭찬하셨다. 한유의 글은 제문祭文까지 읽고 돌아왔는데, 5월도 이미 그믐이 되었다. 6월에 도회에 갔다가 그믐에 집으로 돌아왔다. 초가을에는 재차 용산 선생께 가서 또 한유의 글을 읽다가 보름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달부터 8월 말까지는 더위에 지친 나머지 마냥 누워 책상만 마주하였을 뿐이다. 9월 초에는 용산 선생께 가서 문선文選을 강습하다가 열흘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10월 초하루에 또 용산 선생께 가서 상서商書의 대문大文을 읽다가 1, 2권도 못다 읽고 돌아오니 그때가 이미 16일이었다. 세월이 하도 빨리 흘러 또 세모를 만났다. 머리 돌려 천지를 바라보매 해는 곧 지려고 하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처음에는 수년 이래로 게으르고 방탕함이 고질이 되어 학업은 진취되지 못하고 나이만 많아진다고 여겨 매우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겨울철이나마 학업을 부지런히 닦으려니 하였으나 입지立志가 견고하지 못하고 습관을 제거하지 못하여 헛되이 세월만 보냈을 뿐이다. 아, 내가 태어난 해의 1월 1일이 기묘일이었는데 지금 벌써 110번째의 기묘일을 맞게 되었다. 유학儒學을 공부한 날도 꽤 오래되었고 세상에 태어난 지도 적지 않은 햇수가 되었건만 포기해 버리고는 성립할 것을 미처 꾀하지 못했으니 심하다, 나의 무지함이여! 역시 좋은 쪽으로 변화하지 못한 것이로다. 돌이켜 생각하니 참으로 분하고 가슴 아프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 슬프고 괴로운 나머지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때를 헤아리고 자신을 헤아려 보니, 슬픔이 가슴에 가득하여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지나간 일들을 편차編次하여 행해 온 일들이 어떠했는가를 추적해서 한편으로는 경계를 하고 한편으로는 권면을 하고, 또 스스로 좋지 않은 때에 내가 태어났음을 슬퍼하는 바이다. 아마도 이 말들은 모두가 지난날의 사소한 일로서 과실을 경계하고 공부에 진취하지 못했던 일에 관한 것이니, 대체로 기억하여 잊지 않으면 되지 언외言外의 의미는 논할 바가 아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를 항상 나의 이목耳目에 접하게 하여 옛날의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고 지금의 성취 없음을 돌아보면서 개연히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감발하고 격려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밖의 일의 내용에 대해서는 생각은 빤하지만 글로 옮기기는 참으로 쉽지 않아 마침내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고봉 선생의 행장과 시장을 합친 전기 선생의 이름은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 성은 기씨奇氏, 관향은 행주幸州이다. 행주에 고봉속현高峯屬縣이 있어서 이 때문에 자호를 고봉高峯이라 하였다. 기씨는 고려조에 무예武藝로 입신하여 장상將相을 지낸 이가 퍽 많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이름 면勉이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이분이 이름 건虔을 낳았는데 세종조에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고, 문종 말년에 연세 50세가 채 안 되어 벼슬에서 물러나셨다. 세조가 즉위한 뒤 권람權擥을 시켜 다시 나오도록 강요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고 돌아가셨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이분이 선생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이름 축軸은 풍저창부사豐儲倉副使를 지내고 승정원좌승지丞政院左丞旨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이름 찬襸은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이름 진進은 아우 준遵과 더불어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아우가 죄를 입은 뒤부터 세상일에 마음을 끊고 광주光州의 고룡향古龍鄕에 은거하였다. 대신大臣의 천거로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감사함을 인사하고 취임은 하지 않았다. 뒤에 선생이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면서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덕성군德城君에 봉해졌다. 부인 진주강씨晉州姜氏는 사과司果 이름 영수永壽의 따님이요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증손녀인데, 가정嘉靖 정해년(1527, 중종22) 11월 18일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겨우 이를 갈 나이가 지나자 성인처럼 의젓하였다. 7세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는데,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단정하게 앉아서 쉬지 않고 글을 읽었다. 누가 혹 위로 삼아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저는 스스로 이것을 즐깁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8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사람들이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애통하게 울었다. 조금 장성하여 선생은 집에서 공부를 하면 방해되는 점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마침내 향숙鄕塾에 나아가 글을 읽되 날마다 과정課程을 두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또 한가한 날에는 육갑六甲이 쇠락하고 왕성해지는 이치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대략 통달하였다. 한번은 어떤 손님이 연구聯句를 가지고 선생을 시험하려고 식食 자를 들어 시제詩題를 냈다. 이에 선생이 즉시 응수하여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食無求飽君子道)] 라고 읊었다. 그러자 손님은 한참이나 칭찬하다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너의 작은 아버지 덕양공德陽公(기준奇遵)이 도덕과 문장으로 사림士林의 영수였는데, 그 가업을 이을 사람이 바로 너로구나.]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아버지께서 훈계한 말들을 손수 기록하여 조그만 책자로 만들고 스스로 펼쳐 보면서, [내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훈계를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꽤 진취된 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질이 평범하여 여전히 거치니, 이 일을 생각하면 늘 스스로 송구스러워진다. 일찍이 듣건대 옛사람에게는 문견록聞見錄이 있었다 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때에 따라 기록하는 책을 두어 잊어버릴 것에 대비해야 한다.] 하였다. 이로부터 자신을 수양하는 위기爲己의 학문에만 전념하여 세속에서 익히는 과거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엔 마음을 두지 않았다. 갑진년(1544)에 중종中宗이 승하하자 공은 벼슬도 아직 없고 관례도 올리지 않은 몸으로 곡림哭臨하고 소식素食하였으며, 졸곡卒哭에 이르러서야 그만두었다. 인종仁宗의 초상 때도 이렇게 하였다.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사림의 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물리치고 문을 굳게 닫은 채 밖에 나오지 않았다. 기유년(1549)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 두 시험에 모두 입격해 약관의 나이에 벌써 이름이 사림에 드러났다. 문장文章이 과거장을 휩쓸었기에 윤원형尹元衡이 공을 꺼리던 중에 공의 시권試卷이 높은 등급에 들어갈 것을 알고 고의로 떨어뜨려 버렸다. 그러나 공 또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을묘년(1555)에 아버지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이 무렵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와 배우는 이가 매우 많았다. 무오년(1558)에 여묘살이 3년을 마치고 32세에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문과文科의 을과乙科 제1명第一名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마침 퇴계 선생이 소명을 받고 서울에 와 계시던 때라 선생에게 나아가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한 논변이 있었다. 뒷날 퇴계가 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오년에 서울에 들어간 것은 매우 낭패스러운 길이었지만, 오히려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은 우리 명언明彦(기대승)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신유년(1561) 여름, 천거로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고, 대교待敎를 거쳐 봉교奉敎에 올랐다. 이때 휴가를 얻어 남중南中에 내려와 있었는데, 빨리 서울로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교지가 있었다. 계해년(1563)에 승정원주서丞政院注書에 제수되었다. 잠시 후 병으로 그만두고 한림원翰林院으로 옮겨 호당湖堂(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문吏文에 대한 고과가 중中을 맞았다는 이유로 다시 그만두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이에 앞서 윤원형이 국정을 도맡아 하면서 정사를 어지럽히자 명종 말기에 그 세력을 꺾기 위해 이량李樑을 등용하여 견제하였다. 그러나 이량이 다시 인척姻戚 관계를 믿고 권력을 마구 휘둘렀다. 공은 당대의 명류名流인 윤두수尹斗壽 형제,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 등과 더불어 올바른 논의를 주장하는 인물들을 극력 끌어들였다. 그러자 이량이 자기와 뜻을 달리하여 선생이 한 번도 사적으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생을 미워한 나머지 붕당朋黨으로 지목하여 사헌부를 사주해서 [사론을 가탁하여 조정을 비난한다.(假托士論 謗訕朝政)]고 지목하여 선생을 논핵하게 하고 관직을 삭탈하여 밖으로 축출했다. 사림의 화가 막 일어나려 하매 온 나라가 크게 경악하였는데, 수일 후에 옥당玉堂의 4촌형 기대항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자 명종이 크게 깨달아 이량 등을 찬출竄黜하고 공을 다시 서용하여 사관으로 삼았다. 공은 이어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승진되어 선생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국가의 안위는 재상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책임은 경연에 있으니, 경연의 소중함이 재상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임금의 덕이 성취된 다음에야 훌륭한 재상의 그릇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서 임용할 수 있을 터이니, 그렇다면 경연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지금 전하의 성덕聖德이 일찍 성취되시어 성리학에 마음을 두고 계신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경연에 나오신다면 나날이 진보하고 성취하실 것이니, 어찌 크나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아뢰었다. 또 언로言路를 개방하고 충직한 간언을 잘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반복하여 진술하였다,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로부터 사림이 공을 존숭하였고 명종과 선조 연간에 조정이 다시 바르게 되었다. 갑자년(1564, 명종19)에 병 때문에 홍문관의 직책을 그만두었다. 성균관 전적과 병조좌랑에 제수되었고, 병조를 거쳐 이조정랑에 옮겨졌으나 휴가를 요청하여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예조 정랑에 옮겨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며 취임하지 않으니, 계속해서 교리校理와 헌납獻納을 제수하며 조정으로 불렀다. 선생은 본디 한가히 지내면서 학문에 모든 힘을 쏟으려 하였으나, 병인년(1566) 10월 한 달 동안 은혜로운 명이 여러차례 내렸기 때문에 애써 일어나 나아갔다. 올라가는 도중에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에 제수되고 이어 관례대로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다. 정묘년(1567)에 장령掌令으로 옮겨졌다가 곧 사예司藝로 그만두었으며, 다시 사인과 장령에 제수되었다. 명종明宗이 승하하고 선조宣祖가 즉위한 후 정묘년 5월에 명에서 조사詔使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선생은 홍문관 응교로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관서關西에 갔다. 이때 두 조사는 모두 지나의 이름있는 유학자로 가끔 어려운 질문을 하였는데, 원접사가 일체 선생에게 대답하도록 맡겨버리므로 선생은 답을 모두 타당하게 해냈다. 조정에 돌아오자 집의執義에 제수되었다. 조강朝講을 인하여 진계進啓하기를 천하의 일에는 반드시 시비가 있는 것이니, 시비가 밝지 못하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아 정사政事가 전도되는 것입니다. 과거 중종 초기에 조광조趙光祖가 끊어진 도학을 제창하여 밝혀서 임금과 백성을 요순堯舜 시대처럼 만드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었는데 불행하게 간악한 소인들의 모함을 입고 귀양가서 죽기까지 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사림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광조의 학문은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전해받았고, 굉필은 김종직(金宗直)에게서 전해받았으며, 종직은 정몽주(鄭夢周)를 사법(師法)으로 삼았으니, 그 연원(淵源)의 유래한 바가 바르고 순수하여 하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언적(李彦迪)은 한때의 명유(名儒)로 억울하게 죄를 입어 멀리 서쪽 변방에 귀양가서 죽었습니다. 이상의 두 선비는 이름이 죄적(罪籍)에 들어 있는 채 오래도록 신설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명(聖明)께서 즉위하시어 그 사정을 밝게 아셨을 터이니, 의당 먼저 그들을 표창하여 존숭하소서. 그렇게 하면 국시(國是)가 정해지고 인심이 복종할 것이니, 선조(先祖) 때 있었던 일이라 핑계대고 유난(留難)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여기에 대한 사실은 논사록(論思錄) 가운데 자세히 실려 있다. 이날 전한 겸 예문관응교에 제수되었다. 이때 대신이 대원군(大院君)의 사묘(私廟)에 치제(致祭)할 것을 헌의하였으므로, 선생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상께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으셨으니, 대통은 중하고 사친(私親)은 경하므로, 예에 있어 의당 압존(壓尊)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를 초월해서 치제하는 것은 극히 온당치 않으니, 의당 예관을 시켜 십분 예를 강구해서 반드시 예에 부합되어 조금의 부족함도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무진년에 직제학 겸 교서관판교(直提學兼校書館判校)에 제소되었고, 이윽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승정원에 들어가서 동부승지를 거쳐 우승지에 이르러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다시 대사성과 대사간을 각각 두 번씩 제수받았다. 경오년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남쪽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소명(召命)이 이른 것을 인하여 수백 언(數百言)의 상소를 올려, 고질 때문에 벼슬할 수 없다는 뜻을 진술하였다. 그리고는 청량봉(淸涼峯) 아래 나아가 조그마한 암자를 지어 ‘귀전(歸全)’이라 호칭하고 거기서 여생을 마치기로 계획하였다. 그래서 그 후 누차 부제학ㆍ이조 참의ㆍ대사성 등의 관직으로 불렀으나, 모두 병으로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 후 조정이 마침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천조(天朝)에 주청(奏請)하고자 선생을 발탁하여 주청의 일을 맡기려고 하므로, 선생은 마지못하여 병을 무릅쓰고 명에 응해, 공조 참의와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병 때문에 봉직하지 못하고 남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였다. 선생이 남으로 향해 출발하던 날, 한때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한강(漢江)까지 나와 전송하였는데, 이때 배[舟] 안에 앉았던 한 객이 선생에게 묻기를 "사대부가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며 처신하는 데 있어 끝까지 가져 지켜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자, 선생이 답하기를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에 충분히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소." 하였으니, 그 뜻은 대체로 군자가 출처하는 데 있어서는 의당 먼저 그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그러지지 않게 해야 하고, 다시 시세(時勢)를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애야 하며, 마침내는 선도(善道)를 죽기로써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었는데, 들은 자들은 탄복하였다. 선생은 중도에서 병을 얻어 우선 며느리의 친정 아버지가 되는 고부(古阜) 김점(金坫)의 집에 들어갔는데, 병이 더욱 위독해지자, 곁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명이 길고 짧은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다만 학문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여 뜻만 가진 채 그것을 이루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약을 드려도 먹지 않고 가사(家事)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은 채, 밤 4경(更)에 운명하니, 향년 46세였다. 상 께서는 선생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내의(內醫)를 보내 약을 가지고 가서 병을 보살피게 하였으나, 내의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태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상께서는 대단히 애도하고 별치부(別致賻)를 내렸다. 그리고 경중(京中)의 사서인(士庶人)들은 남산(南山) 밑 선생의 옛 우사(寓舍)에 모여 곡하고 모두 탄식하며 서로 위문하기를 "철인(哲人)이 죽었으니 국가가 누구를 의지할꼬." 하였다.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대사간 기대승(奇大升)은 젊어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식견이 고명하였으므로, 이황(李滉)과 더불어 의리(義理)를 논변(論辯)하는 데 있어 전인(前人)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많이 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악(經幄)에 입시하여 충정으로 진술해서 임금을 인도했던 것은 모두가 성명(聖明)한 제왕들의 도였으므로, 온 세상이 그를 추중하여 유종(儒宗)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죽었습니다. 그는 가세가 청빈하여 상(喪)을 치를 수가 없으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넉넉히 도와주도록 하여 국가에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만력(萬曆) 원년 2월 8일에 나주(羅州)의 소재지 북쪽 오산리(烏山里)에 있는 묘좌 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이는 선생이 평소에 직접 정해 놓은 자리였다. 이때 원근에서 장사를 지내기 위해 모인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선생은 천품이 뛰어나서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궁벽한 시골 구석에 있어 사사(師事)할 곳도 없었지만,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경적(經籍)에 마음을 깊이 쏟아 오묘한 뜻을 연구하여 찾되, 항상 거기에 급급하여 완전히 알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다. 고금의 일에 널리 통하였고 전고(典故)에도 매우 밝았다. 조정에 벼슬하여 임금을 섬길 때에는 매양 고인을 법으로 삼아 거취(去就)와 진퇴(進退)함에 있어 의리에 합당하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였다. 그리고 경악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실 적에는 정성스럽게 임금을 정도(正道)로 가게끔 인도하고 도덕정치를 만회시키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다. 그래서 매양 입시할 때면 한갓 문의(文義)를 해석하고 의리를 강구하여 밝힐 뿐만 아니라, 치란(治亂)과 현사(賢邪)에 대한 변설까지 하였는데, 그 언론이 매우 자상하고 주도하여 충분히 임금을 감동시키고 뭇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는 바가 있었다. 또 제반 시설을 계획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선왕의 법을 준수하려 하고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의 처사가 세도(世道)의 장부(臧否)에 관계되는데 논의가 정해지지 않을 경우에는 그때마다 옛일을 인용하고 의리에 의거하여 분석함으로써 뭇사람의 의심을 깨버렸다. 당시의 재상 이준경(李浚慶)이 인종(仁宗)을 바로 체천(遞遷)하자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자, 허엽(許曄) 등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의논에 쏠려 동조하였다. 그리하여 왕께 아뢰어 윤가를 얻기까지 하였는데, 선생은 당시 간장(諫長)으로서 매우 강력하게 논쟁하여 끝내 그 일이 바르게 처리되었다. 명종의 초상시에는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공의전(恭懿殿 공의는 인종비인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존호)이 대행왕(大行王 임금이 죽은 뒤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칭호)과 서로 수숙(嫂叔) 사이인데 옛날에는 수숙 사이에는 복(服)이 없었다." 고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형제간에 나라를 전하고 차서를 계승하는 데 있어 본디 군신과 부자의 의리가 있는 것인데, 어찌 복이 없을 리가 있단 말인가." 하고, 이에 형제가 서로 대통을 잇는 일과 복제례(服制禮)에 대한 의논을 만들어 밝혔다. 선생은 우리의 도를 존숭하여 믿는 것이 지성에서 나왔다. 그래서 이현(二賢 조광조와 이언적)의 억울함을 신설할 것을 청하여 사림(士林)의 뿌리를 부식하고 온 세상으로 하여금 삼가 본받을 바를 알게 하였다. 퇴계 선생(退溪先生)과 의리를 논변하는 데 있어서는 처음에는 서로 뜻이 잘 맞지 않았으나, 만년에는 퇴계가 선생의 말을 많이 따랐는데, 자세한 내용은 사칠왕복서(四七往復書) 가운데 있다. 어떤 이가 퇴계에게 묻기를 "고봉(高峯)은 행(行)이 지(知)에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자, 퇴계가 답하기를 "예로써 임금을 섬기고 의로써 진퇴하였는데, 어째서 지와 행이 차이가 있다고 이르는가." 하였다. 퇴계가 벼슬을 사퇴할 적에, 상이, 지금 학문을 한 사람이 몇이나 있느냐고 묻자, 퇴계가 답하기를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지금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도 기대승은 널리 알고 조예가 깊어 그와 같은 사람을 보기가 드무니, 이 사람은 통유(通儒)라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평소 임금께 주대(奏對)했던 말들을 상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국사(國史)에서 조사, 초록(抄錄)해서 2권으로 만들게 하고 논사록(論思錄)이라 명명하였다. 선생이 저술한 시문(詩文) 약간 권 및 퇴계와 더불어 왕복했던 서한(書翰)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경인년에, 선생이 일찍이 변무주문(辨誣奏文)을 지어 녹훈된 것 때문에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의금부성균관춘추관사 덕원군(德原君)에 추증하고, 부인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에게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하였는데, 부인은 충순위(忠順衛) 보공장군(保功將軍) 휘 임(任)의 딸이다.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효증(孝曾), 차남은 효민(孝閔)ㆍ효맹(孝孟)이며, 딸은 사인(士人) 김남중(金南重)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아들 한 명과 딸 둘은 모두 요절했다. 효증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 김점(金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정헌(廷獻)은 현감(縣監)이고 장녀는 승지 조찬한(趙纘韓)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한이겸(韓履謙)에게 시집갔다. 효민은 참봉 양홍도(梁弘度)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두었고, 효맹은 승지 정엄(鄭淹)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다. 정헌은 정즐(鄭騭)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고,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은 국주(國柱)이다. 정유왜란(丁酉倭亂) 때에 효민과 효맹은 중로에서 적을 만나 죽었고, 김씨에게서 낳은 딸과 양씨ㆍ정씨는 겁박을 당하자 굴하지 않고 모두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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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광국공신光國功臣 | 기회근 | 2026-09-07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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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8년(중종 13) 4월 21일 조선에서는 명에 다녀온 사신의 보고를 통하여 대명회전의 조선국朝鮮國 항목에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 지금 이름 단이라고 하는 사람이 1375년(홍무 8)부터 1392년(홍무 25) 전후에 무릇 고려의 왕씨 임금 4명을 시해하였는데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음을 알았다. 중종은 곧바로 태조 이성계의 종계를 바로잡기 위하여 사신을 보냈다. 명은 회답문을 통해서 요청한 대로 종계를 개정하겠다고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대명회전은 명 태조의 말씀이므로 함부로 고칠 수 없다는 명분이었다. 중종·인종·명종 3대에 걸친 60여 년간 조선과 명 사이에는 종계변무가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종계변무는 선조가 왕위에 오른 후 최대의 외교 현안으로 대두하였다. 선조는 1573년(선조 6)에 종계변무를 위한 주청사奏請使를 보냈다. 당시 주청사는 이후백과 윤근수였으며 서장관은 윤탁연이었다. 명은 조선에서 요청한 종계변무의 사연을 명 실록에 싣고, 새로 편찬하는 대명회전에도 개정한 내용을 싣겠다는 답을 보냈다. 마침내 1588년(선조 21) 5월 2일에 사은사 유홍, 서장관 윤섬이 대명회전 가운데 조선 부분을 가지고 왔는데 이성계의 종계가 완전하게 개정되어 있었다. 1589년 11월에 선조는 그 동안 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오거나 또는 주문奏文을 지은이로서 공로가 뚜렷한 사람들을 공신에 책봉하라 명령하였다. 1589년 11월 22일에 공이 있는 19명을 선정하고 이들을 다시 세 등급으로 구분하여 논공한 뒤 책봉이 확정되었다. 이어서 1590년 8월 1일에 녹권錄卷을 반사하고 고유제告由祭와 회맹會盟을 의례대로 한 뒤 물품을 등급별로 하사하고 나라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백관이 진하進賀하니 궐정闕庭에서 사연賜宴하였다. 일등은 3명으로, 1584년 종계변무 주청사奏請使로 명에 가서 개정, 간행된 대명회전을 확인하고 돌아온 황정욱黃廷彧에게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을, 1587년 주청사로 명에 가서 고쳐진 대명회전 가운데 조선에 관계된 한 본本을 받아온 유홍兪泓에게 기계부원군杞溪府院君을, 158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에 가서 개정된 대명회전 전질을 가지고 돌아온 윤근수尹根壽에게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을 봉하고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라 하였다. 2등은 7명으로, 1573년 주청사로 명에 다녀온 이후백李後白에게 연양군延陽君을 추봉하고, 1575년 사은사로 명에 가서 종계변무를 주청한 홍성민洪聖民에게 익성군益城君을, 1577년 사은사로 명에 다녀온 윤두수尹斗壽에게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을, 1584년 종계변무사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온 한응인韓應寅에게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을, 1584년 변무사의 역관譯官으로 명에 다녀온 홍순언洪純彦에게 당릉부원군唐陵府院君을, 158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다녀온 윤섬尹暹에게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을, 1589년 성절사로서 종계변무를 주청한 윤형尹泂에게 무릉부원군茂陵府院君을 봉하고 수충공성익모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光國功臣이라 하였다. 3등은 9명으로, 생전에 종계변무의 주문을 지은 기대승奇大升에게 덕원군德原君을, 1563년(명종 18)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가서 그곳 객사에서 죽은 김주金澍에게 화산군花山君을 각각 추봉하였고 이양원李陽元에게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을, 황림黃琳에게 의성군義城君을, 윤탁연尹卓然에게 칠계군漆溪君을, 정철鄭澈에게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을, 이산해李山海에게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을, 유성룡柳成龍에게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을, 최황崔滉에게 해성군海城君을 각각 봉하고,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謀光國功臣이라 하였다. 고봉 할아버지가 1572년 돌아가시고 17년뒤인 1590년에 광국공신으로 덕원군에 봉해지면서 아버지 기진奇進 할아버지는 덕성군에 봉해지고 할아버지 기찬奇襸 할아버지나 증조부 기축 할아버지는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가 한성판윤이 되면서 추증된 품계보다 더 높지 않아서 추가 추증은 없었다. 형제인 형 기대림 할아버지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되고 동생 기대절 할아버지, 아들 기효증, 기효민, 기효맹, 조카 기효분, 기효전 할아버지는 모두 광국공신으로 녹훈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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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기효근(奇孝謹) 개백군(皆伯君) | 기회근 | 2026-09-07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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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 선조 37년 갑진 > 6월 25일 선무 공신(宣武功臣) 1등은 이순신(李舜臣)ㆍ권율(權慄)ㆍ원균(元均) 세 대장인데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점(申點)ㆍ권응수(權應銖)ㆍ김시민(金時敏)ㆍ이정암(李廷馣)ㆍ이억기(李億祺)인데 효충장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기원(鄭期遠)ㆍ권협(權悏)ㆍ유사원(柳思瑗)ㆍ고언백(高彦伯)ㆍ이광악(李光岳)ㆍ조경(趙儆)ㆍ권준(權俊)ㆍ이순신(李純信)ㆍ기효근(奇孝謹)ㆍ이운룡(李雲龍)인데 효충장의선무 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는데 모두 18인이다. 其宣武一等, 李舜臣、權慄、元均三大將, 爲効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二等, 申點、權應銖、金時敏、李廷馣、李億祺, 爲効忠仗義協力宣武功臣; 三等, 鄭期遠、權悏、柳思瑗、高彦伯、李光岳、趙儆、權俊、李純信、奇孝謹、李雲龍, 爲効忠仗義宣武功臣, 各賜爵封君, 凡十八人。 공의 휘는 효근(孝謹)이요, 자는 숙흠(叔欽)이며, 성은 기씨(奇氏)이다.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 은나라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졌다. 그 후손에서 한씨(韓氏), 기씨(奇氏), 선우씨(鮮于氏)가 나왔으니, 행주 기씨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신라와 고려 이래로 대대로 이름난 인물이 있었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휘가 건(虔)인 분이 있었는데, 영조(英祖) 때 판중추부사를 지냈고 시호는 정무(貞武)였다. 바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축(軸)으로, 부사(副使)를 지냈고 승지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찬(禶)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를 추증받았으며, 홍문관제학과 예문관제학도 추증받았다. 생전에는 중직대부 홍문관 부응교 겸 경연시강관·춘추관 편수관을 지냈다. 조부의 휘는 원(遠)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추증받았으며, 생전에는 충순위 돈용교위를 지냈다. 아버지의 휘는 대유(大有)이다.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추증되고,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추증받았으며, 고흥군(高興君)에 봉해졌다. 생전에는 진용교위 용양위 부사과를 지냈다. 어머니는 함양 오씨(咸陽吳氏)로, 림(琳)의 딸이며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공의 공훈으로 두 대에 걸쳐 추증의 은전을 받았다. 공은 가정(嘉靖) 임인년(1542) 4월 7일에 태어났다. 기질이 뛰어나고 출중했으며, 일찍부터 문예를 익혔다. 특히 서법, 즉 글씨 쓰기에 매우 뛰어났다. 성품이 호방하고 자유분방하여 마침내 붓을 버리고 무예의 길로 나아갔다. 만력(萬曆) 기묘년(1579)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선발되어 임금의 숙위(宿衛)를 맡았다. 맡은 일을 잘 수행하였고, 겸하여 비변랑(備邊郞)을 맡았다. 일을 처리하는 데 더욱 부지런하고 민첩하여 명성과 평판이 크게 드러났다. 당시는 오랫동안 태평하여 무비가 매우 소홀해져 있었다. 선조 임금께서 문무 관원 가운데 강직하고 총명하며 일을 맡아 처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아 각 고을을 순찰하고 군정과 방비를 점검하게 하여, 썩고 무능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하였다. 대신들이 공을 선발 대상자로 추천하였다. 무신으로서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지방을 순찰하는 것은 실로 특별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공의 가문 내력이 분명하지 않다고 헐뜯었다. 선조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며 말씀하셨다. “정무공(貞武公)의 5대손이고 고봉(高峯)의 5촌 조카이다. 더 이상 번거롭게 호소하지 말라.”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다시 아뢰었다. “사람됨이 괴팍하고 도리에 어긋납니다.” 선조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본래 이 사람의 인품과 재주를 아낀다. 오랫동안 시위 선전관으로 근무하게 하라.” 그리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으셨다. 양사(兩司)와 홍문관에서도 다시 아뢰었다. “문필이 부족합니다.” 선조께서는 이 말을 듣고 결정을 보류하셨다. 그러고는 중사(中使), 즉 궁중의 내시를 선전관청으로 보내 실제로 글을 잘 쓰는지 살펴보게 하였다. 그곳에 서너 명의 선전관이 있었다. 중사가 임금의 뜻을 전하여 말했다. “기 아무개가 있는가?” 사람들이 대답하였다. “있습니다.” 그러자 중사는 각각에게 종이와 붓을 내려주었다. 어떤 사람은 옛 글을 쓰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지은 글을 쓰게 하였다. 이름을 적어 올리도록 하였다. 공은 곧 시를 지어 올렸다. “나라와 집안의 위태로움이 머리카락처럼 위태로운데, 임금과 어버이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실 것인가. 외로운 신하의 눈물이 가슴에 가로로 흐르고, 새로 뜬 달을 바라보며 그리움에 의지하노라.” 다음 날 조회에서 선조께서는 이 시를 내려 보이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기 아무개가 지은 것이다. 경들은 이 시에 차운(次韻)하라.” 좌우의 신하들은 모두 물러났다. 온 세상이 이를 영예롭게 여겼다. 공은 임금의 명을 받아 지방을 감독하고 살피면서 권세가 강한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직 임금과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데 힘썼으므로 당시의 여론과 평가가 매우 높았다. 광주판관(光州判官)으로 옮겨가서는 맡은 직무를 삼가고 부지런히 수행하였다. 그런데 공을 좋지 않게 여기는 대관이 있어 공을 술에 빠진 사람이라고 탄핵하였다. 선조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이 사람을 직접 보았는데,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평안도 병마우후(兵馬虞候)에 임명되었을 때에도 자격상 승진하여 바꾸어야 할 상황이었으나, 임금께서 특별히 품계를 올려주도록 명하였다. 공이 임금의 특별한 신임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은 임금께서 자신을 알아주신 은혜에 깊이 감격하여 변경에서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마침 병이 들어 결국 부임하지 못하였다. 공의 성품은 강직하여 권세 있는 사람에게 붙어 출세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관직에 제수될 때마다 번번이 방해를 받았으며, 결국 세상에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오랫동안 집에서 지내다가 경인년(1590) 가을에 남해현령(南海縣令)에 임명되었다. 공은 관청을 다스리기를 자기 집을 다스리는 것처럼 하였다. 임진년(1592)이 되자 왜적이 크게 침입하여 곧바로 세 도(三道)를 공격하였다. 또 바닷길을 통해 호남과 호서, 즉 양호(兩湖)를 삼키려 하였다. 공은 생각하기를, “국가의 명맥은 오로지 양호에 달려 있다. 만일 이 바닷길을 막지 못한다면 양호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전함을 정비하고 무기를 수리하여 수군대장 원균(元均)을 따라 선봉에 나섰다. 사천(泗川)에서 크게 싸웠는데, 공이 베고 사로잡은 적이 매우 많았다. 적은 이 전투에서 크게 꺾여 물러났으며, 감히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을 엿보지 못하였다. 군영에서 공의 전공을 조정에 보고하자 공에게 통정대부의 품계를 올려 포상하였다. 임기가 끝날 때가 되자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기를, “본현은 바다 방어의 중요한 요충지이므로 기 공이 아니면 지킬 수 없다.” 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공을 그대로 남해현령으로 유임시켰다. 공은 그 고을에 모두 7년 동안 있었다. 어염(魚鹽)을 관리하고 군량을 마련하여 비축량을 더욱 늘렸다. 여러 진영의 수군들이 모두 공에게서 군량을 공급받았다. 그가 군량을 운반하고 공급한 공로는 옛날 차달(車達)이 군량을 공급했던 일에 비견될 정도였다. 여러 해 동안 온 힘을 다해 일한 탓에 병이 들어 더 이상 현의 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 병신년(1596) 겨울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미처 봉작(封爵)을 받기도 전에 일이 일어났다. 정유년(1597) 가을, 왜적이 남쪽을 다시 침략하였다. 공은 어머니인 정경부인 오씨를 모시고 피란하던 중 바다에서 적을 만났다. 오씨 부인은 바다에 몸을 던져 돌아가셨다. 공은 북쪽을 바라보며 세 번 크게 부르짖고는 돌을 짊어진 채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때는 정유년 9월 21일이었다. 공의 나이는 56세였다. 을사년(1605)에 영광(靈光) 다경포진(多慶浦鎭) 뒤쪽 산의 해좌(亥坐) 언덕에 예장하였다. 공은 장성서씨(長城徐氏)와 혼인하였는데, 생원 서태수(徐台壽)의 딸이며 참봉 박수검(朴守儉)의 외손녀였다. 부인께서는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장례지는 달랐다.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종헌(宗獻)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수사(水使)에 이르렀다. 딸은 이문룡(李文龍)에게 출가하였다. 정유재란 때 이문룡의 부인은 바다에서 왜적을 만나 절개를 지키며 굴복하지 않았다. 적이 칼로 그녀를 죽였다. 시신은 물에 떠서 사흘 동안 물을 거슬러 올라간 뒤 이문룡의 배를 따라왔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종헌은 흥덕 장씨(興德張氏)와 혼인하였는데, 부정(副正) 장집(張緝)의 딸이었다.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다. 아들은 율(慄)로 생원이며, 둘째는 척(惕)이다. 딸은 임한(林瀚)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게서 세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장남은 침(忱)으로 훈련정(訓鍊正)이 되었고, 둘째는 순(恂), 셋째는 념(恬)이다. 딸은 서강(徐綱), 최지헌(崔智憲), 박동기(朴東記)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몇 년 뒤, 조정에서는 왜적을 토벌한 공을 기록하여 포상하려 하였다. 그런데 공적을 서로 다투던 사람들이 공이 이미 세상을 떠나 자리에 없다는 것을 이용하여 공보다 자신들의 공을 앞세우고 공의 공훈을 기록에서 빼버렸다. 공의 후손인 아들 종헌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공은 다시 공신으로 기록되는 은전을 입었다. 공에게 효충장의선무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의 칭호를 추증하고,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추증하였으며, 백작군(伯君)의 봉작을 내렸다. 공의 사업과 공적은 모두 교서(敎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교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여러 진영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였고, 모든 군사들은 힘을 다하였다. 여문(汝文)은 사천에서 패하여 항복하였고, 축주(筑州)의 수령은 당항(唐項)에서 불태워 죽였다. 여러 공로를 기록하면서 유독 우영(右營)의 가장 뛰어난 공만 빠뜨렸으니, 원훈(元勳)이 직접 조사한 공적의 등급은 증거로 삼을 만하다. 효자가 직접 올린 상소의 말도 거짓이 아니다.” 아아, 이처럼 빛나는 임금의 말씀이 있어 저승과 이승을 감동시키는구나. 공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여기에서 그 사실을 찾아보지 않겠는가. 명(銘)에 이르기를, “이 아버지에게 이러한 아들이 있었으니, 이로써 명예로운 아름다움이 있게 되었도다.” 公諱孝謹。字叔欽。姓奇氏。系出幸州。當周武王時。殷太師箕子受封朝鮮。其後爲韓氏,奇氏,鮮于氏。幸州奇氏。其一也。自羅及麗。世有聞人。入我朝。有諱虔。當英廟朝。爲判中樞。諡貞武。卽公之五代祖也。高祖諱軸。副使贈承旨。曾祖諱禶。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行中直大夫,弘文館副應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祖諱遠。贈嘉善大夫,吏曹參判行忠順衛敦勇校尉。考諱大有。贈 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高興君行進勇校尉。龍驤衛副司果。妣咸陽吳氏。琳之女也。贈貞夫人。用公勳追榮二世。公以嘉靖壬寅四月七日生。氣質卓犖。早習藝文。尤精於書法。任性豪放。遂自投筆。登萬曆己卯武科。選授宣傳官宿衛。稱職兼備邊郞。任事尤勤敏。譽望克著。時昇平久。武備疎闊。宣廟命簡文武中剛明有幹局者。巡飭州郡。無使朽鈍。大臣以公應選。武臣敬差。實異數也。有訐公以門地不明。宣廟不允曰。貞武公之五代孫。高峯之五寸姪。勿爲煩訴。兩司啓曰。人 物乖悖。宣廟不允曰。予素愛其人物。久任侍衛宣傳。又不問。兩司及玉堂又啓曰。文筆不足。宣廟因留不下。使中使往見宣傳官廳。則數三人在。中使因上旨曰。奇某在耶。對曰在。卽各賜紙筆。或書古文。或書自製。着名卽上。公卽製詩書之曰。家國危如髮。君親何所歸。孤臣淚橫臆。新月望依依。翌日朝會。宣廟下賜此詩曰。此乃奇某之所製也。卿等次韻。左右皆退。擧世榮之。公受命督察。不畏強禦。務要予善。時論甚多焉。遷光州判官。恪謹奉職。臺官有憾公者評公以酒荒。宣廟不允曰。予曾見此人。不 應有此。及除平安兵馬虞候。又以資格當改。上命特加。其受知於上者有如此。公感主知深。欲圖効邊上。適有疾不果赴。公性亢。不肯附權要進取。不悅者衆。每除職。輒阻難。竟不大用於世。久家居。庚寅秋。拜南海縣令。治官如治家。及壬辰歲。倭寇大至。直犯三道。又自海路擬呑兩湖。公以爲國家命脉。專在兩湖。若不遮遏此路。是無兩湖也。遂治戰艦修兵器。從水軍大將元均爲前鋒。大戰於泗川。公所斬獲甚多。賊由此挫卻。不敢窺湖南之路。幕府上功。褒陞公通政階。及瓜。衆議以本縣乃海防要衝。非公莫 能守。聞朝留署。在縣凡七年。通魚鹽辦糇粮。積儲益多。諸鎭舟師皆仰給於公。有比車達之餽餉者。積年殫勞。病不能任縣事。丙申冬。解官還鄕。未及受封。丁酉秋。倭寇南掠。公陪母貞夫人吳氏。遇賊于海。吳氏投海見背。公北望三號。負石投水而卒。寔九月二十一日也。得年五十六。乙巳。禮葬于靈光多慶浦鎭後山亥坐原。公娶長城徐氏。生員台壽女。參奉朴守儉外孫。先公卒。葬異。贈貞夫人。有一男一女。男宗獻。登武科官水使。女適李文龍。丁酉亂。遇賊于海。抗節不屈。賊刃殺之。浮屍泝流三日後。從文龍船。事 聞㫌門。宗獻娶興德張氏。副正緝女。生二男一女。男慄生員。次惕。女適林瀚。側室三男三女。長忱訓鍊正。次恂。次恬。女徐綱,崔智憲,朴東記。公沒後幾年。朝廷錄討倭功。爭功者以公之不在。圖居公上。沒公勳。公胤子訟公寃。竟蒙追錄。贈效忠仗義宣武功臣。資憲大夫。兵曹判書。知義禁府事皆伯君。公之事業。盡在敎書中。有曰列鎭讓能。羣旅竭力。野汝文敗降於泗川。筑州守燒殺於唐項。及紀諸庸。獨遺右營之尤。元勳親勘之秩可據。孝子自疏之辭不虛。噫。煌煌天語。感激幽明。如欲知公者。盍於此焉求諸。銘曰。是父有是子。是以有譽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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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도승지공 문중 | 기회근 | 2026-09-07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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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임진전쟁 전후의 기씨 역사를 청파 할아버지 후손 5형제의 문중별 역사이다. 기형奇逈 할아버지의 아들 기대복 할아버지와 이량의 딸 전주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기령 할아버지는 1568년 대과에 급제하여 선천군수와 승지를 지내고 1589년에는 사신으로 명에 다녀와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임진전쟁이 나던 1592년에는 형조참의로 있으면서 전시에 강원도의 군사를 맞은 강원도순찰사를 지내고 1594년 돌아가신다. 임진전쟁이 끝나고 큰 공을 세운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원균元均 1등공신 3명과 2등공신 5명, 3등공신 10명 등 모두 18명의 무신武臣에게 녹훈한 것이 선무공신宣武功臣이고, 이에 들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에 9,060명을 1. 2. 3등으로 나뉘어 녹훈한 것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며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錄勳되었으며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그러면서 아버지 기대복 할아버지는 이조참판으로 할아버지이신 기형奇逈 할아버지는 도승지로 추증이 되시어 도승지공 문중을 이룬다. 증조부 기찬奇襸 할아버지는 앞서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가 한성판윤이 되면서 추증받은 종2품 이조참판보다 더 높지 못해 추가 추증은 없었다. 아들 기홍헌 할아버지의 큰아들 기혼 할아버지 집에 장성문중에서 복제공 문중으로 양자로 간 분의 후손이신 기성휘 할아버지가 또 도승지공 문중으로 양자가서 춘천에 정착한다. 둘째 기심의 후손집으로는 별좌공 문중에서 양자오고 또한 직계손과도 함께 김포로 이주한다. 기령 할아버지의 다른 아들인 기수 할아버지는 나주에 정착한다. 기령 할아버지의 동생 기훈 할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하여 부평부사富平府使, 삼수, 안성, 서산군수를 지내고, 훈련원정, 인산첨사를 거쳐 충청수사를 지냈고 후손은 수원에 정착한다. 기대복 할아버지의 막내아들 기란 할아버지의 아들 기만헌 할아버지는 1628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 사간을 거쳐 벼슬은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함경남도 단천에 공덕비가 있다. 족보엔 이 공덕비문을 인용한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비의 겉면에 정녀 관비 일선은 곧 공의 아들 진사 인의 사랑하는 여인이다.(碑傍有旌女官婢日仙卽公之子進士寅所眄也. 所眄;좋아지내는 여인)라는 기록으로보아 뭔가 전설이 있는 듯하지만 자세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그 후손은 부단으로 나와 절손 된 것으로 보인다. 기대복 할아버지의 큰아들 의 혹은 억으로 읽는 기의 할아버지의 후손은 아들 기성헌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신 기협 할아버지가 문과 급제하고 선천부사로 있을 때 청나라가 처들어온 병자호란이 일어나 능한산성에서 전사하면서 덕풍군에 봉해지고 아버지 기성헌 할아버지는 호조참판으로 추증되고 할아버지 기의 할아버지는 좌승지로 추증되지만 증조부 기대복 할아버지는 둘째 아들이신 기영 할아버지가 선무원종공신이 되면서 이조참판으로 추증 되었기 때문에 더 추증은 없었다. 기협 할아버지의 아들인 기진흥은 1644년에 문과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651년(孝宗2년) 경기도 교동수사에 이르렀으나 이해에 김자점의 숙청 사건이 일어나 같이 죽었다. 김자점은 능양군이 광해를 몰아내는 구테타에 가담하여 권신이 된 후에 병자년 청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엔 임경업 장군을 죽게하는 등 친청파가 되었으나 1649년 효종이 즉위하고 친청파를 숙청하면서 홍천에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 청나라에 새 왕이 옛 신하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내어 청나라가 조사단을 파견하게 하였으나 여러 신하가 간신히 무마시키고 그 죄로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1년에 손자 며느리 효명옹주의 저주 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김익金釴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해 원두표, 김집, 송시열, 송준길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가 발각되어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교동수사로 있던 기진흥도 김자점과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로 가까운 사이라 역모 가담자가 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이후 도승지공의 후손은 과거 볼 자격이 박탈되어 신분사회인 조선에서 더 이상 양반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 청파 할아버지의 장손집으로 청파 할아버지의 불천위 혹은 부조명 제사도 끈기게 되는데 기대복 할아버지의 큰아들과 나머지 아들들은 어머니가 다르고 나이차이도 많이 나서 헌자 돌림에서 거의 막내인 기만헌 할아버지와 큰집에서 종손인 기진흥은 할아버지와 손자 항렬이지만 나이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은 듯하다. 앞서 소개한 고봉 할아버지가 퇴계선생에게 질문한 것 가운데 4대 기제사가 마지막 남은 현손자가 죽으면 그만하고 신주는 매안 하는데 현손자는 죽었지만 현손자의 부인이 살아있으면 매인해야 하느냐를 묻는 대목이 있다. 그 당시는 청파 할아버지가 불천위는 아니고 기제사만 지냈는데 정자공 기침 할아버지가 지은 아버지 기은 기의헌 할아버지의 행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무자戊子(1648)년에 서울에 사는 대종大宗에서 정무공 제사를 폐하지 않는 사판(不祧祀板)을 함부로 묻어버렸다. 어버지께서는 종손宗孫 진흥震興과 8촌동생三從弟 전에 정언正言을 지낸 만헌晩獻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속히 다시 복구하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정언晩獻은 병으로 죽고, 진흥震興은 죄로 죽었다. 끝내 일을 이루지 못하여 종사宗祀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아버님은 항상 이를 통한痛恨으로 여겼다.(戊子年間, 京居大宗擅埋貞武公不祧祀板, 府君貽書宗孫震興及三從弟前正言晩獻, 令速改造, 未幾正言病卒, 震興罪死, 竟不就而宗祀遂絶, 府君尋常痛恨焉).] 이것을 보면 도승지공 후손들은 양반신분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고 불천위이던 청파 할아버지의 신주는 묻어버리고 도선산도 판 다음에 서울을 떠났다. 10여년전에 보면 지금 도승지공 기형奇逈 할아버지의 묘를 몰라서 대충 이 묘일 것이다 하고 있는 상태로 추정해 알고 있는 묘가 정확히 도승지공 묘인지 기대복 할아버지 묘에서 나온 묘지명처럼 혹시 묘지명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파보자고 하는 논의를 보았는데 그처럼 기형奇逈 할아버지 묘도 잊을 정도로 원당 도선산을 잊고 다 떠났다. 그 후에 실재로 파보았는지는 모르겠다. 더 이상 역사책에 보이는 도승지공 인물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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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참판공(장성) 문중 | 기회근 | 2026-09-07 | 2 |
| 둘째 기원奇遠 할아버지에 대한 자세한 사실은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내가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1480년에 태어나시어 1521년 막내동생 기준奇遵 할아버지가 기묘사화 후에 유배지에서 돌아가시자 넷째 기진奇進 할아버지와 함께 장성 아치실로 내려오시어 1522년 42세로 돌아가시고 부인이신 안동김씨 할머니는 그 다음해인 1523년 돌아가신 것으로 족보에 나온다. 아드님이 3형제가 있으셨고 생년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둘째 아들이신 기대유 할아버지의 부인 함양오씨 할머니가 1507년생인 것으로 추정은 할수 있다. 할아버지들이 대략 3세정도 어리긴 하지만 단정할 순 없어 기대유 할아버지도 할머니와 대략 동갑으로 가정하면 어머니이신 안동김씨 할머니가 돌아가신 1523년엔 16살 정도 되셨고 형인 기대익 할아버지는 2~3세 많은 18살이나 19살 동생이신 기대이 할아버지는 13살이나 14살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기준으론 모두 미성년으로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아마도 작은 아버지 기진奇進 할아버지의 돌봄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나이에 경제적으로 어떻게 사셨을까 걱정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웹페이지가 없어졌지만 고봉선생의 문헌공종중 홈페이지에 올라온 기진奇進 할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나누어준 유산분배 문서인 분배기에 보니까 재벌만 아니었지 엄청 부유했다. 고봉선생이 쓰신 아버지 기진奇進 할아버지 행장에 흉년이 들어 끼니가 없었다거나 고봉선생이 돌아가시자 가난하여 장례치르기 힘드니까 조정에서 보조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하여 허락 받은 건들은 그냥 청빈을 강조한 것일 뿐이고 꽃과 나무를 가꾸며 유유자적했다는 표현대로 먹고사시는 데는 아무 지장 없으셨던 분들이다. 물론 부인이신 강씨 할어니가 가져온 재산일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서울에서 내려가실 때 빈손으로 오셨을 리는 없어 보이고 기원奇遠 할아버지도 역시나 재산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물론 후대로 내려가면서 후손은 늘어나고 분배되면서 거의 없어졌겠지만 끼니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고 본다. 참판공 기원奇遠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 기대유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 기효근 할아버지가 임진전쟁에서 원균의 부하로 전공을 세운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기효근을 찾아보면 이렇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당시 왕의 명을 받아 주와 군의 군비를 두루 점검하였다. 1590년 남해현령南海縣令으로 부임하여 전선[戰艦]과 병기를 수리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元均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해전에 참가하였다. 그때마다 선봉이 되어 큰 공을 세웠으므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병으로 현령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적병을 만나 어머니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이 되어 개백군皆伯君에 추봉되고 정2품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때 아버지 기대유 할아버지는 같은 품계의 호조판서 고흥군으로 봉해지고 할아버지 기원奇遠 할아버지는 한등급아래 종2품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시어 참판공 문중으로 불리운다. 증조부 기찬奇襸 할아버지는 한등급아래 정3품으로 추증이 되어야겠지만 이미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 때 종2품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어 더 이상 추증은 없었다. 아들이신 기종헌 할아버지도 아버지를 따라 종군한 공으로 행원군에 봉해지고 충청도수군절도사까지 지낸다. 참판공 문중은 기효근 할아버지의 큰형이신 기효간 할아버지 후손이 금강공문중을 이루며 인원수로 보나 배출된 후손들을 보나 큰 줄기를 이룬다. 기효간奇孝諫(1530~1593) 할아버지는 문묘에 종사된 김인후金麟厚에게 배웠으며, 기정익奇挺翼(1627~1690) 할아버지는 송시열에게 배웠다. 참판공문중에서도 송암 기정익 할 아버지의 후손이 가장 번성한데 손자대에서 가까운 형제들에게 양자들을 가셔서 지안의 대를 이었고 후손가운데 4형제 기태온, 기태량, 기태공, 기태검의 후손들 가운데 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 이이李珥, 임성주任聖周,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꼽히는 노사 기정진 선생이 가장 유명하다. 기정진 선생은 소과를 장원했지만 대과는 응시하지 않았고, 높은 명성 때문에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지만 아주 잠깐을 빼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1910년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 4형제의 후손들이 한말의 유명한 의병자이자 문장가인 기우만 선생은 손자이고 의병장 기삼연. 기재, 기산도 등등의 여러 분들이 배출되었다. | ||||
| 5 | 별좌공 문중 | 기회근 | 2026-09-07 | 1 |
| 셋째 별좌공 기괄奇适 할아버지에 대하여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별좌를 지내고 남기신 시가 막내동생 기준奇遵 할아버지의 문집인 덕양집에 전한다 한다. 묘가 포천에 있다고 족보는 기록하는데 잊어버렸는지 원당 도선산에 가묘를 마련했다. 첫째 아들 기대관 할아버지도 별좌를 지내고 묘가 포천에 있다고 했다. 부인이 전주이씨로 증조부가 세종대왕의 아들 임영대군이고 할아버지가 익주군이고 아버지가 윤산군으로 왕족이다. 그래서 아들 기경중 할아버지는 음직으로 하양현감을 재냈고 이때 아들 기웅헌 할아버지가 경주에 정착한다. 별좌공의 둘째 아들 기대정 할아버지는 1573년(선조6년)에 종9품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다가 산야山野의 행실이 있는 사람이나 이미 벼슬을 제수한 자 중에 더욱 특이한 자는 차서에 구애없이 발탁하여 쓰라는 선조의 명령에 따라서 다른 6사람과 함께 6품으로 승직하고 1579년에 지평이 되었으며 1583년에 장령에 임명되었다. 태조太祖의 계비繼妃 강씨康氏가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에 태조의 사당에 배향配享되지 못하였는데 (정동에 있던 능을 정릉으로 이장하고 능은 잊혀졌으면 능 주위의 석물을 수표교 만드는데 쓰였다)선조宣祖 때에 와서, 신덕왕후는 태조의 정비正妃이니 태묘太廟에 배향해야 한다는 논의가 몇 년 동안 제기되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화고, 제사만 지내고 있었다. 이 때 기대정 할아버지가 양사는 부묘祔廟를 청해야 하는데도 각閣만 세우고 제사 지내기만을 청한 것은 잘못이라고 하여 이를 지지하는 홍문관弘文館과 양사 모두 사직시켰고 함께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후에 같이 서울사는 도승지공 문중과 양자를 교환하며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이량의 숙청과 김자점을 숙청하면서 기진흥이 역모로 죽자 더 이상 도성에 살수 없어 기대관 할아버지 후손은 충북 제천으로 기대정 할아버지 후손은 평택 현덕면 권관리로 낙향한다. 백범일지 등을 보면 백범의 직계와 김자점은 14촌관계로 얻을 게 있으면 친척이고 잃을 게 있으면 남이라고 할 정도의 촌수인데도 김구의 조상도 서울에서 황해도로 낙향하여 사는 것처럼 별좌공 문중도 서울을 떠났다. 그 후에 역사책에 나오는 분들은 없다. 기대정 할아버지 후손이 낙향한 평택의 현덕면 권관리는 권세를 부렸던 이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권세 권權, 벼슬 관官자를 써서 권관리權官里로 불리었다는 전설이 있다. 경주에 정착해 살던 기웅헌 할아버지 후손 일부가 가창과 충북 금산을 거쳐 경북 영동, 상주에 기준헌 할아버지 후손이 경북 상주에 산다. 경북 예천에 광주 고봉 할아버지 후손이신 기학신 할아버지 후손이 산다고 하는데 절대 아니다. 그래서 옛날 족보를 구해서 비교해 보니 광주에 사셨던 기학신 할아버지는 아들이 기상건이고 기상건은 아들이 기항국恒國이 있었으나 일찍 죽고 딸만 한명 있다가 아들을 보기 위해 첩을 들여 아들 기순국順國을 보았지만 이마저도 자식이 없다(无后)고 한다. 그러나 1982년판을 보면 기상건 대신해 기상형을 넣고 둘을 합치면서 기상건 자리를 차지하고는 초명은 상건이라 하고 부인도 기상건의 부인은 상산김씨인데 기상형에서는 두 번째 부인으로 경주손씨를 추가 하였다. 언젠가 별좌공 문중의 제천문중분이 별좌공 문중에서 고봉선생의 문헌공문중으로 많이 옮겨갔다고 해서 설마 했었는데 이것은 사실이며 예천문중은 광주문중 소속이 아니고 인근의 상주와 같은 별좌공문중이다. | ||||
| 4 | 덕성군(광주) 문중 | 기회근 | 2026-09-07 | 1 |
| 넷째 기진奇進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신 고봉 기대승奇大升 할아버지의 큰아들 기효증 할아버지는 1570년(선조 3)에 식년시 진사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람들이 장성長城에서 모여 의곡장義穀將으로 추대하자 나주羅州에 의곡도청義穀都廳을 설치하고 격문을 돌려 의곡義穀 3,000석을 모았다. 이후 윤승훈尹承勳이 선조의 전지傳旨를 가지고 오고 김덕령金德齡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도유사都有司로 격문을 짓고 의병들을 모으자 사람들이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영광靈光과 법성포法聖浦에서 모은 의곡 3,200석과 의병 460명을 이끌고 배를 타고 의주 용만龍灣으로 임금을 찾아갔다. 이끌고 간 의병으로 행조行朝를 호위하였고, 싣고 간 의곡은 명국 군사의 식량으로 사용하였으며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제수하였다. 또한 1593년(선조 26) 천리 길을 근왕勤王했다는 공로로 형조정랑刑曹正郞과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등을 제수받았으나 사헌부에서 적을 토벌한 공은 없고 군사와 군량을 수송하면서 각 고을에 횡포만 부린다는 내용으로 탄핵하자 상소하여 사퇴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며 근왕록 1권이 전하고 있이며 1616년(광해 3) 돌아가신다. 임진전쟁에서 육지에서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진주성을 지킨 김시민 장군과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막았기 때문에 전라도가 무사하였지만 정유년에 다시 일어난 전쟁에서는 진주성도 무너지고 이순신 장군도 백의종군하던 시기에 일본군이 장성에도 침입한다. 이때 기효증 할아버지의 동생들인 기효민 할아버지와 부인 남원양씨 할머니, 기효맹 할아버지와 부인 광산정씨 할머니, 그리고 하서 김인후의 손자 김남중의 처 행주기씨 대고모는 피난 중에 맥동에서 일본군을 만나 겁탈하려하자 몸에 지니고 다니던 은장도로 일본군에 잡혀있던 팔을 자르고 일행과 함께 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의병에 참여 했다가 돌아온 김남중이 돌아와 보관 되어있던 팔뚝만으로 장사지내니 이를 일비장 묘라고 한다. 기효증 할아버지의 아들 기정헌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고 현풍현감을 지냈다. 고봉선생의 형인 기대림 할아버지는 광국훈으로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되어 승지공으로 불리우고 큰아들 기효분 할아버지는 광국훈으로 공조참의로 추증이 되시지만 일찍 돌아가시고 아들 3형제 기방헌, 기창헌, 기의헌 할아버지 3분은 작은 아버지이시고 곡성현감을 지내셔서 공성공으로 불리우는 기효전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았다. 당고모 김남중의 처가 팔을 자르고 강에 투신 자결하던 정유전란 중에는 누이이신 당고모 이제남의 처가 시댁이 흑산도로 피난간다고 하자 부탁하여 따라서 흑산도로 가서 전란을 피한다. 기은 기의헌 할아버지는 후금이 처들어 오자 의병을 일으켜 여산에 이르렀을 때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큰형인 기방헌 할아버지와 기창헌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어 큰 조카 기수백 할아버지 이하 여러 조카들을 돌본다. 기창헌 할아버지의 막내 아들 기원 할아버지가 고봉 할아버지의 큰손자 기정헌 할아버지의 양자로 가면서 고봉 선생집안인 문헌공종중의 종손이 된다. 우리 기씨 집안의 최초의 양자사례이고 이후의 양자제도의 기본이 된다. 기의헌 할아버지는 만년에 광주 덕성군 문중의 가장 연장자로 서울의 청파 할아버지의 불천위 제사도 챙기고 기의헌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 기침 할아버지가 문과에 급제하고 정자벼슬을 하여 정자공으로 불리운다. 정자공 후손은 샛말에 주로살며 장성 기효간 할아버지의 아치실, 고봉 할아버지의 너부실 문중과 함께 호남의 크게 번성한 행주기씨 3대 소문중이다. 정자공의 후손으로 조선말에 기관현 할아버지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정헌을 역임한다. 문헌공 문중에서는 기원 할아버지가 양자는 갔어도 법적으로만 간듯한다. 묘소는 친증조부인 승지공 기대림 할아버지 묘소 아래에 모셨고 기원 할아버지의 큰아들이신 기진열 할아버지에 가서야 양할머니이신 기정헌 할아버지의 부인 서령정씨 할머니묘소가 있다는 소고룡에 묘소가 있다. 기원 할아버지의 증손자 기언관 할아버지는 39세가 되는 1744년(영조 20) 춘당대시春塘臺試에서 병과 7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춘당대시는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시행된 과거로, 영조가 직접 창경궁昌慶宮의 춘당대春塘臺에 나와 진행된 시험이었다. 그런데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문과에 급제한 1744년에 예문관의 검열을 채용하기 위해 임금 앞에서 시행되는 소시召試에 영조는 기언관 할아버지가 고봉 할아버지의 후손임을 알고는 어필로 특별하게 한권翰圈 2점을 더해 주었는 데도 기언관이 소시에 응시하지 않은 것에 분노하였기 때문에 종성鍾城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46년(영조 22)에 풀려나고 22년 뒤인 1768년에 헌납獻納에 임명됩니다. 1780년(정조 4)에는 인재 수습의 뜻에서 품계를 올려 호조참의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였다. 광주읍지나 호남인물지에는 기언관 할아버지가 일찍이 고봉 할아버지의 묘소 부근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산림에서 즐거움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언정 할아버지는 기언관 할아버지의 동생으로 1763년(영조39) 10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771년(영조47)에는 정언이 되었다. 고봉선생의 후손으로 후광을 입어 1782년(정조6)에는 당상관으로 특별히 초자超資되어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성격이 청렴하고 강직해서 1786년 대사간에 발탁된 뒤, 세 번이나 연달아 이를 역임하다가 1792년에는 대사헌에 취임하여 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진력하였다. 1795년에는 다시 공조 판서가 되었으며 이때 아버지 기정후 할아버지는 덕창군으로 봉해졌고 할아버지 기진열 할아버지는 호조참판으로 추증되고 증조부 기원 할아버지는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되신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기언관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 기학경 할아버지는 1783년(정조 7) 식년시에서 진사에 입격하였고, 8년 뒤인 1801년(순조 1)에 증광시에서 병과 4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나이 61세였다. 1802년(순조 2) 순조에게 지켜야 할 7개의 조항을 정리하여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칠조소七條疏로, 그 내용은 첫째 성학聖學을 부지런히 할 것, 둘째 기강을 진작시킬 것, 셋째 인재를 얻을 것, 넷째 폐단을 바로잡을 것, 다섯째 작은 현縣을 혁파할 것, 여섯째 구임久任을 책임 지울 것, 일곱째 군정軍政을 정비할 것 등이다. 이를 받은 순조는 기뻐하며 답서를 내리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후 무장현감茂長縣監,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지냈으며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안과 밖을 드나들며 다양한 관직 생활을 경험하고 1809년(순조 9) 돌아가셨다. 기학경 할아버지의 증손자 기우현 할아버지는 37세가 되던 1850년(철종 1)에 증광시에서 병과 19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시험은 철종이 즉위한 것을 기념하여 창경궁昌慶宮 춘당대春塘臺에서 치러졌는데, 방목에는 유학幼學 기경현奇慶鉉이라 되어 있고 오른쪽에 아주 작은 글씨로 개명改名 우현禹鉉이라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철종 1년의 증광시에는 기경현이라는 이름으로 응시하였고, 이후에 기우현으로 개명하였다. 1861년(철종 12) 동지삼사冬至三使에 임명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사은사謝恩使 업무를 수행한 사실도 있다. 1864년(고종 1)에 부교리副校理에 발탁되어 홍문관弘文館에서 활동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 각종 자료에 의하면 홍문관에서 줄곧 관직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이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는 부교리와 집의執義로 활동한 기록이 확인되며, 이후에도 홍문관집의弘文館執義, 부수찬副修撰 등을 지냈다. 기문현 할아버지는 장성 금강공 문중에서 정간공 기언정 할아버지의 현손자로 양자오고 노사 기정진奇正鎭 할아버지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844년(헌종 10) 문과에 급제하였다. 1844년 12월 가주서假注書에 임명되었고, 1853년(철종 4) 12월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1854년에 충청도사忠淸都事, 웅천현감熊川縣監을 역임하였다. 이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역임하였고, 1857년에 은산현감殷山縣監, 이후 1859년 장령掌令, 1860년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 ||||
| 3 | 문민공 문중 | 기회근 | 2026-09-07 | 1 |
| 다섯째 기준 할아버지는 아들이 한 분 있다. 한성판윤 기대항 할아버지다. 기대항 할아버지는 아들이 2분인데 적자는 기응세 할아버지이고 서자로 기직남이 있다. 기응세 할아버지는 효행으로 삼강록 속편에 기록이 있다하여 삼강공이라 불린다. 만전당 기자헌 할아버지는 기응세 할아버지의 큰아들로 문과급제하였고 영의정까지 올라 행주기씨 가운데 최고위 관직을 역임한다. 부인은 선조의 형 하원군의 딸 전주이씨다. 영의정이 되면서 덕평부원군에 봉해지고 아버지 기응세 할아버지는 같은 품계의 영의정 덕창부원군으로 추증되고 할아버지 기대항 할아버지는 종1품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증조부 기준 할아버지는 정2품 판서로 추증되어야 하지만 아들 기대항 할아버지가 정2품 한성판윤이 되면서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기 때문에 더 추증은 없었다. 영의정까지 올랐기 때문에 당색도 알아야 돌아가는 사항을 참고 할 수 있다. 만전상공의 처음 당색은 동인이고 정철의 처벌을 놓고 당이 나뉠 때는 강경론을 지지하여 북인(北人)이 되었고, 북인이 다시 홍여순의 대사헌 천거를 지지하는 대북과 반대하는 소북으로 나뉠 때는 대북(大北)에 가담했다. 대북은 폐모론이 불거지는 과정에서 또 다시 영창대군만 죽여야 한다는 계통의 골북(骨北), 인목왕후도 죽여야 한다는 이이첨, 허균 계통의 육북(肉北),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사형을 모두 반대하는 소수의 중북(中北, 기자헌, 유몽인)으로 나뉘었다. 1605년 죄의정(左議政) 일 때 선조가 광해군을 왕세자(王世子)에서 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세자(王世子)로 삼으려 하자 이를 끝까지 반대하여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1614년 영의정이 되었고 1617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않된다고 끝까지 알리다가 문외출송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홍원(洪原)에 유배되었다가 함경북도 길주(吉州)로 옮겨 유배되었다. 이때 아들 기준격은 글 잘하기로 소문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에게서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기준격은 허균의 언행을 보았기 때문에 허균의 위험한 사상과 행보를 알게 되었다. 기준격이 이 아버지를 유배보낸 것을 허균의 짓으로 보고 그를 공격하여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허균이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보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서 허균이 체포되었다. 허균은 1589년 같이 생원시에 합격한 이이첨과 합류해서 대북에서 인목대비를 폐모하는 주장의 선봉장이 되었다. 대북의 영수 이이첨은 허균을 신뢰했고 허균이 인목왕후를 몇 차례에 걸쳐 암살을 기도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암살을 기도하는 과정에서 하인준 등 사람을 시켜 도성 내외에 유구국인들이 쳐들어온다는 내용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당시 소외되어 있던 불교계를 끌어들여 봉기 계획을 진행하면서 이이첨과 관계가 틀어졌다. 이후 허균의 일당 하나가 불심 검문으로 붙잡혀 계획이 탄로났다. 이후 능지처참 되었다. 1623년 능양군과 서인이 구테타를 모의할 때 김유와 이귀 등이 의사를 타진해 오자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하여 거절하였다. 구테타 성공 후에 남인 이원익 등의 추천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광해군을 모셨던 사람으로서 옛 주인을 배신할 수 없다며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는 만전 상공이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고 의심하고 혐의를 입증할 만한 물증도 없이 의금부 감옥에 가두었다. 1624년 1월 25일 이괄의 난이 일어나 한성이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집권 서인에 의해 다른 반대파들과 죽었다. 당시 좌찬성 이귀(李貴)는 죄가 있다면 국문해서 죄를 밝히고 유배 보내거나 사형시키자고 했으나, 판의금 김류(金瑬)는 내통의 우려가 있으니 죽이자고 청하였다. 그밖에 김자점 등도 이들의 처형을 상주하였다. 사형된 이들 중에는 그 외에도 아들 기준격과 기순격(奇順格)이 있다. 이때 일족들 역시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그 뒤 동생 기윤헌 등도 투옥되었고, 기윤헌은 혐의를 승복하지 않다가 형장을 맞다가 죽었고 기윤헌의 아들 기수발도 죽었다. 이후에 이원익, 이귀 등의 상소로 신원, 복구되었다. 이렇게까지 내통을 걱정한 이유는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의 서자 기직남의 아들 기익헌이 반란군 이괄의 부하로 있었기 때문이다. 기익헌은 얼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고위직으로 진급할 수 없었으나 무과에 급제하고 왕족이었던 이문빈(李文賓)의 사위가 되었다. 이후 궁궐 재건과 조선(造船) 등에 공을 세워, 광해군의 특명으로 고원군수(현 함경남도 고원군)에까지 오른다. 아마 광해군의 총신이었던 점이 이괄에게 동조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괄이 패주하여 도망가는 도중에 이수백(李守白)과 함께 이괄을 배신하여 이괄과 한명련(韓明璉)의 목을 베어 바쳤고, 반란의 주동자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사형당해야 하지만 인조와 이귀의 두둔으로 진도로 유배를 갔다가 7년 후 풀려났다. 정작 반란에 가담한 자신은 멀쩡히 살아남고 무고한 친척들만 죽게 된 경우다. 기익헌은 출신이나 관직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붕당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배경이 없어서 오히려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이수백은 유배를 갔다가 풀려난 지 몇 해 안 있어, 관군출신으로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이중로(李重老), 박영신(朴榮臣)의 아들들인 이문웅(李文雄), 이문위(李文偉), 박지병(朴之屛), 박지원(朴之垣), 박지번(朴之藩)에게 대낮에 살해당한다. 그러나 기익헌은 도성에서 살아갔다. 기준격의 후손은 무주 풍동면에 옭겨 숨어살다가 전남 순천과 경남 함양군 안의면 상비리에 옮겨산다. 기순격 후손은 전남 무안 함평에 산다. 기신격은 옛족보엔 자식없다고 했는데 요즘 족보엔 후손이 잠시 귀양갔던 길주와 명천지역에 산다고 한다. 민격의 후손은 충남 서산, 태안에 산다고 한다. 기윤헌의 아들 기수발은 이괄의 난 때 죽고 양자가 장성 참판공 문중에서 왔는데 전남 무안 지역에 산다. 여기에서 기성휘 할아버지가 도승지공문중으로 양자가서 춘천문중이 된다. 기수실의 후손이 나주 무안 영광에 산다. | ||||
| 2 | 미수 허목의 기상국(기자헌)전 | 기회근 | 2026-09-07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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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에 실린 미수 허목의 글과 해석 미수기언 제26권 원집 하편 奇相國事 相國姓奇氏。本德陽人。初名自靖。後改自獻。字士靖。己卯名臣應敎遵之曾孫也。少以才藝發聞。二十一。陞太學。二十九。擢大科。選入翰苑。 기자헌은 성이 기씨이며, 본관은 덕양이다. 처음 이름은 자정自靖이었으나 나중에 자헌自獻으로 고쳤고, 자는 사정士靖이다. 그는 응교應敎 기준遵의 증손으로, 어려서부터 재능과 문예로 이름을 알렸다. 스물한 살에 성균관에 입학했고, 스물아홉 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뽑혔다. 旣光顯於朝。沈毅有力量。無細故數數態色。宣祖信任賢之。常侍帷幄。爲大司憲。論徵士崔永慶冤死事。當時鍛鍊成獄者。皆抵罪。而其已死者。皆追奪官爵。 조정에서 명성을 떨치며, 침착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힘이 있었고, 사소한 일에는 얼굴빛을 바꾸지 않았다. 선조는 그를 신뢰하고 중용하여 항상 곁에 두었다. 그는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억울하게 죽은 정사徵士 최영경崔永慶의 사건을 논하여, 당시 옥사를 조작한 자들을 모두 처벌하게 하였고,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해서도 관직을 박탈하게 했다. 及爲右相。王子㼁生。上素不快於世子。欲易世子。私問公。公對曰。建立已久。人心已固。不可動也。 그가 우의정이 되었을 때, 왕자 영창대군이 태어났고, 선조는 원래 세자에게 불만이 있어 세자를 바꾸려 했다. 이에 은밀히 기자헌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그는 세자를 세운 지 오래되어 민심이 이미 굳어졌으니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縱不果易。然上心已定矣。有大臣居公右者。執國命。上亦專任之。公遂謝病。 비록 바꾸지 못했지만, 선조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기자헌보다 높은 위치에 있던 대신이 국정을 장악하자, 선조도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였다. 이에 기자헌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光海時復入相。時事已大變矣。用事者屢起大獄。日以論死制人。公每議獄。務寬平。傅生議者不數。而亦不使之覺也。常言曰。匹夫之死生。不足爲國家存亡之大數也。 광해군 때 다시 정승으로 기용되었으나, 그때는 이미 시대가 크게 변해 있었다. 권세를 잡은 자들이 자주 큰 옥사를 일으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많았는데, 기자헌은 매번 옥사를 논할 때마다 관대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려 했다. 옥사에 휘말린 자들을 자주 변호하지는 않았지만,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그는 늘 말하기를 한 사람의 생사는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큰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光海殺王子㼁。鄭蘊上疏力諫。光海怒。欲殺之。公執不可。光海不得殺。囚之耽乇羅十年。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려 했을 때, 정온이 상소를 올려 강력히 반대하자 광해군은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했지만, 기자헌이 끝까지 반대하여 결국 죽이지 못하고 10년간 유배에 처하게 했다. 太妃閉時。諸阿縱者。爭言當廢上書者。至累數百人。下政府議。公雖極言往古成敗之事。以冀改悟。然獨爭力尠。不足以動上意。 인목대비 폐위 사건 때, 여러 아전들이 상소를 올려 폐위를 주장하였고,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정부에 논의를 맡기자, 기자헌은 옛날의 성패 사례를 들어 극력 반대하며 군주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홀로 힘이 부족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請廣收群臣議。坐政府。會宗室文武百官雜議。於是三司論以黨逆。欲沮其議也。公不爲動。故久坐不起。議畢上。皆畏懼。終無一人敢言不可者。 그는 대신 널리 신하들의 의견을 모으자고 청하여, 정부에 앉아 종친과 문무백관들이 함께 논의하게 했다. 그러나 삼사에서는 이를 반역으로 몰아 논의를 막으려 했고, 기자헌은 이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논의가 끝나자 모두 두려워하여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지 못했다. 公嘆之曰。有宗室貴臣。休慼共之者。亦不顧大義。負國家至此耶。因出國門。繼而有故相李恒福以下諸言不可者。皆重於時而盡斥去。公竄吉州。人心擾亂。 기자헌은 탄식하며 종친과 고위 대신들 중에도 나라의 대의를 돌아보지 않고 이 지경까지 나라를 저버리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곧 국문을 나와 국문 밖으로 나갔고, 이어서 이항복 등 여러 인물들이 폐위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자 모두 탄핵되어 물러났다.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되었고,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 鄭仁弘。初旣主張此事者。而當上議。爲兩端說曰。君臣母子。名義出天而不可易。爭論者。皆惜此名義云。 처음 이 일을 주장했던 정인홍은 정부의 논의가 시작되자 군신과 모자의 명분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며 바꿀 수 없다고 말하며, 논쟁하는 자들은 모두 이 명분을 아끼는 것이라고 했다. 至此。光海亦心畏難。閉之西宮而已。亦莫之敢顯言廢之也。公實有力焉。 이때 광해군도 일이 어려워질 것을 두려워하여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기만 하고, 공개적으로 폐위하지는 않았다. 이는 기자헌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李爾瞻旣用事日久。能禍福人。惟所欲。自公卿以下。仄目畏事之。 이이첨은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사람을 화禍와 복福을 주길 잘했으며, 대신 이하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公獨自重無所憚。瞻忌嫉之殊甚。顧無詞以斥之也。至是乃竄。 그러나 기자헌만은 스스로를 중히 여기며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이첨은 그를 심히 시기하고 질투했지만, 마땅한 죄목이 없어 탄핵하지 못했다. 결국 기자헌은 유배되었다. 初。光海幾不得立。賴公旣得立。心德之。尊寵賜賚之。雖一朝放流之。示譴而已。特召之。待之如舊。而見國勢已去。知不可有爲也。東遊海上。不復預國家事矣。 처음에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지 못할 뻔했으나, 기자헌 덕분에 즉위할 수 있었기에 그를 마음으로 존경하고 총애하였다. 비록 하루아침에 유배를 보냈지만, 이는 단지 경고에 불과했고, 특별히 불러들여 예전처럼 대우하였다. 그러나 기자헌은 이미 국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더 이상 국정에 참여하지 않고 동해로 유람을 떠났다. 仁祖反正時。功臣等私遣韓嶠。試公意。欲問計。公心知之。佯聾。再問而再不答。嶠去而功臣等相謂曰。彼大臣持重多智。彼旣得志。行其所爲。吾等不得禁。遂不召。 인조반정 때, 공신들이 한교를 보내 기자헌의 뜻을 시험하고자 했으나, 그는 속으로 이를 알아차리고 귀먹은 척하며 두 번이나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공신들은 그는 신중하고 지혜로운 대인이다. 뜻을 얻으면 반드시 실행할 것이니 우리가 막을 수 없다고 말하며 부르지 않았다. 其人多執法時論法抵罪者之親屬諸客。積怒於公者。反爲必報之計。陰求其過日密。 그들은 법을 집행할 때 죄를 물은 자들의 친족과 손님들이 많았고, 기자헌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이 복수를 계획하며 그의 과거를 몰래 조사하였다. 仁祖旣反正。收召先王舊臣。而公不拜相。識者。皆知其必死也。 인조가 반정을 이루고 선왕의 신하들을 불러들였으나, 기자헌은 벼슬을 받지 않았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 예측하였다. 功臣等旣成功。陰設機。所忌者皆殺之。次及公。惟元功李貴。獨言公無罪。不當死。 공신들은 반정에 성공한 뒤, 은밀히 계책을 세워 자신들이 꺼리는 자들을 모두 제거하였고, 다음 차례가 기자헌이었다. 오직 원공신 이귀李貴만이 기자헌은 죄가 없으니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尋陷大獄。付處瑞山。陰使人告有變。詔王府召問之。公對獄自言無罪。且曰。熒惑入南斗。可移於相。必殺臣以弭災。 그러나 기자헌은 결국 큰 옥사에 휘말려 서산으로 유배되었고, 몰래 사람이 변고가 있다고 고발하였다. 왕부에서 그를 불러 심문하자, 기자헌은 스스로 무죄임을 주장하며 형혹성이 남두에 들어갔으니 재앙을 대신할 자가 필요하다. 반드시 나를 죽여야 재앙이 그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時李适叛書聞。功臣等大懼。陰謀曰。囚不殺。必內應爲亂。密白上。盡出公及士大夫失志者三十七人。皆斬之。 이때 이괄의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공신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그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내응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음모를 꾸며 왕에게 보고하였다. 결국 기자헌과 뜻을 잃은 선비 37명을 모두 참수하였다. 公以大臣。不加誅。令之自處。於是公之昆弟諸子皆僇死。奇氏族矣。 기자헌은 대신이었기에 참수하지 않고 스스로 죽게 하였다. 그의 형제와 자손들도 모두 죽임을 당해 기씨 가문은 멸족되었다. 後李相國元翼白上曰。奇自獻。當宥及苗裔者。而其身不免。親戚皆死。甚可哀也。李贊成貴。亦爲上言之。上始感悟。命復其官。 이후 이원익이 왕에게 상소하여 기자헌은 후손이라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인데, 그 자신은 죽고 친족까지 모두 죽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귀도 왕에게 같은 말을 하자, 왕이 비로소 감동하여 그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公布衣時。從先生長者。習聞古人餘敎。嘗爲東省。執弟子禮。見朴洲先生。後薦士二人。趙穆,朴洲。洲不出。樂山澤之遊。多所博觀外家遐遠奇偉之術。而門無迂怪客言神仙者。 기자헌은 젊은 시절, 선생들과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옛사람들의 가르침을 익혔다. 동부승지로 있을 때에는 제자처럼 예를 갖추어 박주 선생을 찾아뵈었고, 후에 조목과 박주 두 사람을 추천하였다. 박주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산과 물을 즐기며, 외가의 기이하고 웅대한 학문을 널리 탐구하였지만, 그의 문하에는 괴이한 말로 신선을 논하는 자는 없었다. 記言卷之二十六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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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기자 후손설 | 기회근 | 2026-09-13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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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箕子)와 그 후손설에 대하여 숭인전비 국문·한문 원문, 월사집 기자묘비명, 선조실록·광해군일기 등에 등장하는 기자 관련 서술들을 시대 순으로 하나로 통합하고, 각 시기 인식의 근거와 그 이면의 정치·사회적 맥락까지 함께 정리한다. ## 1. 삼국시대 — 수용의 시작 기자에 대한 숭배·제사의 흔적은 삼국시대부터 확인된다. 고구려가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라의 최치원 역시 기자동래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시기의 인식은 아직 국가적 제도로 정착되기 전 단계로, 중국 문명의 권위 있는 인물이 동방에 문명을 전했다는 서사가 지식인층 사이에서 받아들여지는 수준이었다. ## 2. 고려시대 — 유교 이념화와 숭배의 제도화 고려시대에는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점차 굳어지면서, 기자가 한국 유교문화의 시원적 존재로 자리매김하며 그에 대한 숭배가 본격적으로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평양에 기자를 모시는 사당이 세워지고 국가 제사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 사당의 최초 건립 시점에 대해 서로 다른 세 가지 전승이 병존한다. - 현종설: 숭인전비(차천로 지음)와 월사집 기자묘비명(이정구 지음)에는 공통적으로 고려 현종(顯宗)이 비로소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高麗顯宗始立廟以祀)고 명기되어 있다. - 숙종설: 다른 서술에서는 고려 숙종 때 축조한 기자릉에 대한 제사를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하였다고 하며, 또 고려 숙종조 때에 정당문학 정문(鄭文)의 건의로 기자의 무덤을 찾아 사당을 세워 중간 제사를 지냈다고도 전한다. 이 계통의 서술에서는 이후 충숙왕(忠肅王)이 평양부에 명하여 기자사(箕子祠)를 별도로 세우고 제사를 본격화한 것으로 이어진다. 1102년(숙종 7년경)에 평양에 기자사당이 세워져 국가 제사를 받았고 기자의 묘까지 조성되었다는 서술도 이와 같은 계통이다. - 충숙왕대 창건설: 후대의 숭인전비명 해제(규장각 소장)에는 숭인전은 기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으로서 고려 때인 1325년(충숙왕 12)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명기되어, 아예 창건 시점 자체를 충숙왕대로 못박고 있다. 세 전승을 종합하면, 대체로 고려 초·중기(현종 또는 숙종대)에 무덤을 찾고 소규모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으며, 고려 후기 충숙왕대(1325년 전후)에 이르러 정식 사당(기자사)이 건립되고 제사가 본격화되었다는 2단계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문헌마다 주어(현종/숙종/충숙왕)와 사건(무덤 발견/사당 건립)이 뒤섞여 전해지고 있어, 정확한 창건 경위는 확정하기 어렵다. 이 시기 인식의 정점은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국조(國祖) 체계의 정립이다. 조선 초기에는 단군과 기자가 나란히 국조로 숭상되었으며, 동국사략(東國史略)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삼조선(三朝鮮) 체계를 정립함으로써 기자조선이라는 왕조상이 역사적 사실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 3. 조선 초기(태조~세종) — 사대명분론 속의 국가 제사화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아 건국한 조선은 왕도정치의 구현과 사대관계 유지를 이상적 정치·외교로 인식하였다. 이 때문에 기자와 같은 현인이 고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했다는 서사는 조선의 정통성과 문명적 자부심을 동시에 뒷받침하는 명예로운 이야기로 적극 수용되었다. 세종대에는 판한성부사 권홍(權弘)이 기자의 어짊은 온 천하 만대가 함께 경모하는 바이며, 우리나라의 예악·문물이 중화(中華)에 견줄 수 있는 것은 기자가 조선에 봉해져 팔조(八條)의 교화를 편 덕분이라며, 묘에 사적을 새긴 비석이 없음을 아쉬워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세종은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고 묘 아래에 세우게 하였다. 이 시기의 핵심 논리는 기자의 교화가 공자보다 시간상 앞섰기에, 조선이 오랑캐 신세를 면하고 문명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공자의 도가 아니라 기자의 가르침 덕분이라는 것으로, 훗날 광해군대 상소와 월사집 비문에서도 동일한 논리가 그대로 반복된다. ## 4. 조선 중기(성종~선조) — 왕실 차원의 후손 찾기와 회의론의 공존 성종대에는 왕명으로 기자의 실제 후손을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명종대에는 원나라 시인 선우추(鮮于樞)가 지은 시의 선우씨는 수염이 많으니 기자의 후손이 분명하다(箕子之後髥翁多)는 구절을 근거로 선우씨에게 조용조(租庸調) 면제와 특별 채용 등 국가적 특혜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으로 공식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선조대에는 기자 연구가 크게 활성화되어 율곡 이이의 기자실기(箕子實記), 윤두수의 기자지(箕子志), 한백겸의 기자유제설 등 종합 연구서가 잇달아 편찬되었다. 그런데 이 연구들 어디에도 기자의 후손이 기(奇)·한(韓)·선우(鮮于) 삼성(三姓)이라는 언급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기 왕실 내에서는 기자 서사 자체에 대한 상당한 회의론이 확인된다. 1603년(선조 36년) 8월 13일 실록 기사에 따르면, 선조는 직접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기자의 자손은 후세에 아는 자가 없으니 매우 서운하다. 기자가 주(周)나라에 조회하였다는 것은 기자가 아니라 미자(微子)일 것이다. 기자는 무왕(武王)만이 함께 도(道)를 말할 수 있다고 여겨 홍범(洪範)으로 그 도를 전했을 뿐이며, 주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아 은나라 유민을 거느리고 동으로 왔으니, 실로 무왕이 봉(封)한 것도 아니고 주나라에 조회했을 리도 없다. 잘못이 그대로 전해져 후세에까지 이어졌으니, 역사를 쓸 때는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조선의 왕 스스로가 무왕의 책봉이라는 기자의 핵심 골격 자체를 훗날의 와전(訛傳)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윤근수는 공가·인가·선우가가 모두 기자의 후손이라 답하고, 류영경은 삼한(마한·진한·변한)의 국호를 근거로 한씨를 기자 후손으로 설명하는 등, 이미 여러 성씨가 기자 후손을 자처하는 세간의 통념이 존재했다. 다만 이 시점에는 이러한 통념이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은 아니었고, 왕은 오히려 그 근거의 부실함(중국 사신의 역장遊葬 일화 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 5. 광해군대(1611~1612) — 삼성(三姓) 후손설의 등장과 선우씨의 공식 인정 1611년(만력 39, 광해군 3) 가을, 평안도의 진사 정민(鄭旻)·조삼성(曺三省)·양덕록(楊德祿) 등이 잇달아 상소를 올려, 역사에서 이르기를 기자의 후손이 41세를 전하여 준왕(準王)에 이르렀고, 위만에게 축출된 뒤 마한 말엽 잔손(孱孫) 3인 — 친(親)은 한씨, 평(平)은 기씨가 되고, 량(諒)은 용강 오석산에 들어가 선우씨 세계에 전한다고 주장하며, 마침 기자전 곁에서 10년째 살고 있던 선우식(鮮于寔)을 후손으로 삼아 제사를 맡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 상소는 예조판서 신흠의 심의, 평안 감사 최관의 장계, 영의정 이원익 등의 논의를 거쳐 채택되었고, 이듬해(1612) 기자사(箕子祠)는 숭인전(崇仁殿)으로 개칭되었으며 선우식이 정6품 전감(殿監)에 임명되어 그 직을 세습하게 되었다. 이때 예조판서 이정구는 선우씨를 이미 기자의 후예로 정하였으니 평양 및 다른 고을에 거주하는 선우씨를 군적에 편입시키지 말고 사당 아래 모여 살며 제사를 받들게 하라고 아뢰어 윤허받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가적으로 공식 인정된 것은 삼성 가운데 선우씨뿐이었다는 점이다. 상소문 자체에는 친(한씨)·평(기씨)·량(선우씨) 세 성씨가 함께 언급되었지만, 실제로 채택되어 군역 면제 등 특혜가 주어진 것은 선우씨뿐이었다. 이 결정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비판이 있었다. 김시양(金時讓)은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서, 선우씨를 기자 후손으로 삼은 근거(소식蘇軾이 선우신鮮于侁에게 준 시, 조맹부가 선우추에게 써 준 서문 등)가 매우 박약하며, 기자전을 숭인전이라 하고 선우씨를 전감으로 삼은 것은 모두 광해조의 혼란한 정치가 만들어낸 거짓된 일이니, 인조반정 초에 즉각 폐지했어야 마땅한데 지금까지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탄식할 일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선우씨의 기자 후손 지위는 광해조 이후 조선 후기까지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한편, 위 상소와 숭인전 비문에 등장하는 친(親)이라는 인물명은 실은 문헌 전승 과정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원문(위략 인용)은 본래 그 아들과 친척으로서 나라에 남아 있던 자들이 한씨 성을 사칭했다(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는 뜻이었는데, 후대 번각본(飜刻本) 과정에서 其子友親留在國者로 잘못 새겨지면서 우친(友親)이라는 존재하지 않던 인물이 만들어졌고, 이것이 그대로 숭인전 비문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 6. 인조~숙종~영조대 — 국가 제전(祭典)의 지속과 세계(世系)의 정교화 숭인전에 대한 국가적 예우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인조 계해년에는 관원을 보내 치제하고 정축년에 묘정비(廟庭碑)를 세웠으며, 숙종대에도 기미년과 기축년 두 차례에 걸쳐 승지를 보내 치제하였다. 다만 정묘호란 때 숭인감 선우흡(鮮于洽)이 청나라 군대에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관직이 삭탈되고, 이후 감사 김시양이 다시 선우씨 중 선우경(鮮于慶)을 천거하는 등, 세습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있었다(김시양 본인이 앞서 이 제도의 부당함을 비판했던 인물). 이 시기 주목할 만한 흐름은 기자의 세계(世系) 대수가 시대에 따라 점차 늘어나고 정교해졌다는 점이다. 성종대에는 기자의 세계가 40대(代)였으나, 선조 무렵에는 41대, 영조대에는 42대로 변화하였다. 이이와 윤두수가 공통적으로 기자 41대, 928년을 논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이는 당대의 학설 변화를 반영한 것이지만, 정작 기자의 성씨(당시 자씨子氏로 알려졌으나 후대 자료와 목간을 통해 실제로는 희씨姬氏였음이 밝혀짐)조차 당대에는 잘못 고증되어 있었을 만큼, 이러한 정교화가 실증적 근거의 축적이라기보다 시대에 따른 담론의 재구성에 가까웠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숙종대에 이르러 기씨의 고세계(古世系)가 새롭게 발견되었다는 사실도,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지적된다. 또한 영조 19년(1743) 8월 9일 승정원일기에는 기씨 가문에 대한 조정의 논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18세기 중반까지도 기자 후손 관련 논의가 조정 차원에서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 7. 청주한씨·행주기씨의 후손 지위 획득과 그 실리적 배경 한씨와 기씨는 선우씨와 같은 국가적 공인 시점(1612년)에는 함께 인정받지 못했으나, 이후 각자의 경로로 기자 후손으로서의 지위와 그에 따른 실리(군역 면제)를 확보해 나갔다. - 청주한씨: 최초의 청주한씨 족보(석탄 한효중, 1559~1628, 1617년 편찬)에서 위지를 인용하여 우평은 선우씨, 우량은 한씨, 우성은 기씨가 되었다는 계보를 처음으로 문서화하였다. 이후 만력 45년(1617, 광해군 9)에 평안도 지역 청주한씨들도 기자의 후예이니 선우씨의 예에 따라 군역을 면제해 달라고 청하여 허락받았다. - 행주기씨: 강희 3년(1664, 현종 5)에 이르러서 행주기씨들이 역시 기자의 후예임을 내세워 군역 면제를 청하여 허락받았다(규장각 소장 숭인전비명 해제에 기록됨). 즉 기씨의 기자 후손으로서의 국가적 처우는 선우씨(1612)보다 52년, 청주한씨(1617)보다도 47년 늦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황은, 기·한·선우 삼성의 기자 후손 지위 획득이 학술적 고증의 결과라기보다는 각 문중이 시차를 두고 군역 면제라는 실질적 이익을 위해 국가에 청원하고 승인받은 과정이었음을 시사한다. ## 8. 개항기 이후 — 자주성 강조를 위한 서사의 재해석 개항기 이후에도 기자에 대한 존숭 의식 자체는 계속되었으나, 민족적 자주성을 강조하려는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서사의 방향이 수정되었다. 그 핵심은 책봉의 순서를 뒤바꾸는 것이었다. 즉 기존에는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군주로 책봉했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개항기 이후에는 기자가 (스스로) 조선의 군주가 되고 난 후에 무왕이 그를 책봉하였다는 해석이 지배적이 되었다. 이는 조선의 국조(國祖) 서사에서 주나라에 대한 수동적 종속성을 최소화하고 자주적 성격을 강조하려는 근대적 재해석이라 할 수 있다. ## 9. 현대 한국사학계의 평가 오늘날 한국사학계에서 기자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기자가 삼국시대 이래 한국사 서술과 정체성 형성에서 차지해 온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에, 그 역사적 영향과 의미에 대해서는 여전히 평가가 존재한다. 기자가 상서(尙書)·주역(周易)·논어(論語) 등 유교 경전에서 현인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기자가 조선에서 왕이 되었다는 서사는 유학에서 이상세계로 간주하는 상(商)·주(周) 시대의 문명이 조선에 그대로 이식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고, 기자가 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라는 전설적 통치법을 전수한 인물이라는 설정은 그가 상·주 시대의 아름다운 정치를 대변하는 존재였음을 뜻했다. 즉 이러한 위대한 성현이 문명을 가져왔다는 서사는, 한국 문명의 유구함이 상·주 교체기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자부심의 근거로 오랫동안 활용되어 온 것이다. 숭인전비(崇仁殿碑) 만력(萬曆) 39년(1611, 광해군3) 가을에 평안도(平安道)에 사는 진사(進士) 정민(鄭旻) 등이 상소하기를, 우리 동방이 해외 한편에 있어 중국의 교화가 있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천행으로 우리 기자(箕子)가 5000명의 은(殷)나라 백성과 시서(詩書)ㆍ예악(禮樂)ㆍ음양(陰陽)ㆍ복서(卜筮)에 관한 책을 가지고 와서 여덟 조목을 번역하여 가르쳐 오랑캐의 풍속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에 기자에 힘입어 군신(君臣)ㆍ부자(父子) 등 오륜(五倫)이 펼쳐졌으니, 인현(仁賢)의 교화가 그 소종래가 있는 것입니다. 고려(高麗) 현종(顯宗)이 비로소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고 우리 조선 공정대왕(恭定大王)이 명하여 새로 단장하였고 장헌대왕(莊憲大王)이 또 명하여 글을 지어 비를 세웠는데, 이는 모두 그분의 성덕(盛德)을 숭배한 것입니다. 대체로 기자의 교화는 공자(孔子)보다 훨씬 더 앞섰기 때문에 공자가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은 뜻을 두신 것이 어찌 그 효과가 아니겠습니까. 기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동방이 오랑캐의 복장을 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뒤에 비록 공자의 도가 있어도 그 교화가 들어올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동방의 백성이 공자만 숭배할 줄 알고 기자를 숭배할 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기자를 숭배할 때 반드시 공자를 숭배할 때처럼 예가 갖추어져야만 결여된 바가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사가(史家)의 기록을 상고해 보니, 기자의 후손이 41세를 전해 오다가 준(準)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에게 축출되어 삼한(三韓)에다 나라를 세웠습니다만 위아래가 1000여 년이 넘어 문헌(文獻)을 상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우씨(鮮于氏)가 기자의 후손이라는 것이 운부군옥(韻府群玉) 우자부(于字部)에 기록되어 있고 강목(綱目) 선우보(鮮于輔) 주(註)에 쓰여 있으며 씨족대전(氏族大全), 후한서(後漢書), 위략(魏略), 한묵전서(翰墨全書) 등에 뒤섞여 나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원(元)나라 때 선우추(鮮于樞)란 사람이 조맹부(趙孟頫)에게 진금(震琴)을 주자 조맹부가 그 사례로 지어 준 시에 기자의 후손들은 수염이 아름다운 이가 많으니 재주가 뛰어나 몽매를 놀래었네.〔箕子之後多髥翁 才猷邁俗驚愚蒙〕라고 했으니,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임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마한(馬韓) 말엽에 기자의 후손 3명 중에 우친(友親)이라는 사람의 후손은 한씨(韓氏)가 되고 우평(友平)이라는 사람의 후손은 기씨(奇氏)가 되고 우량(友諒)이라는 사람은 용강(龍岡) 오석산(烏石山)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 자손들이 중국에 있는 선우씨를 적(籍)으로 삼아 이미 기자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니, 동방에 있는 사람들만 기자의 후손이 아니란 말입니까? 기자의 후손이 만약 자씨(子氏)의 성을 그대로 썼다면 후세에도 반드시 그 성씨를 계승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도 자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고 나라의 성씨는 본도의 선우씨밖에 없으니, 이른바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이 아니고 누구란 말입니까. 고려 왕씨는 삼한(三韓)을 통일한 공로로 인하여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하여 녹을 받아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자는 다만 단군(檀君), 혁거(赫居), 동명(東明), 온조(溫祚)와 더불어 시조의 제사만 흠향할 뿐이고 지금까지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나라의 전장(典章)에 결여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점을 신들이 매우 한스러워하는 바입니다. 지난날 본도의 사람들이 이 일을 조정에 요청하였으나 일이 취소되어 실행되지 않았고 지금 선우식(鮮于寔)이란 사람이 태천(泰川)을 떠나 기자전(箕子殿)의 곁에 와서 산 지 이미 10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기자의 후손으로 똑같이 호적에 편입되었으나 도리어 왕씨의 자손보다 못하게 되었으므로 신들이 민망하고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연성공(衍聖公)과 숭의감(崇義監)의 고사처럼 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니, 그 사안을 예조에 하달하였다. 예조 판서 신흠(申欽) 등이 심의하여 아뢰기를, 우리 동방 문명의 교화는 털끝만 한 것도 모두 기자의 덕택입니다. 높이 받드는 전례가 결여되어서는 안 되니, 다시 의논하고 참작하여 시행하기 바랍니다. 라고 하니, 대신(大臣)이 의논한 다음 평안도에 공문을 하달하였다. 관찰사 최관(崔瓘)이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지금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이라는 설은 일도의 백성들이 입을 모아 일컬을 뿐만 아니라, 옛날의 서적에도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선우씨가 또 기성(箕城;평양)에 살고 있는 데다가 본도의 유민(遺民)들이 제사의 주인으로 세울 것을 요청하고 있으니, 그들의 말을 폐기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니, 그 사안을 예조에 하달하였다. 예조 판서 신흠이 또다시 심의하여 아뢰기를, 본도의 백성들이 모두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기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전례에 있어서는 나라에서 이미 사당을 지어 제사를 거행하고 있으나 다만 왕씨의 후손처럼 그의 자손을 감(監)으로 삼아 제사를 주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왕조에서 미처 거행하지 못한 일을 하루아침에 창설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니,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해 보게 하소서. 라고 하니, 주상이 그대로 명하였다.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 등이 의논하기를, 지난날 기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동방이 오랑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 중엽에 이르러서야 기자의 사당을 건립하였으니, 우리 조정 이상으로 결여된 전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머뭇거리며 시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과거와 똑같은 꼴이 됩니다. 게다가 정민 등의 상소와 감사의 장계가 근거와 고증이 있으니, 마땅히 숭의전(崇義殿)의 관례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윤허한다고 하였다. 신흠 등이 또 아뢰기를, 기자전을 한결같이 숭의전의 고사에 따라 전각의 이름은 대제학(大提學)이 지어서 올리고 그 자손의 벼슬도 왕씨 자손을 감으로 삼은 예와 같이 하되 이조에서 그 일을 관장하도록 하소서. 라고 하니, 이에 전각의 이름을 숭인(崇仁)으로 걸고 선우식에게 감의 벼슬을 주되, 대대로 이어받도록 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아 은나라 태사 기자는 / 粤殷太師 명이의 때를 만나 자신을 깨끗이 했도다 / 明夷自靖 천지와 함께 분신하여 죽으니 / 天智之焚 주 성왕(聖王)께 홍범을 주었네 / 錫範周聖 의리상 주나라 신하 될 수 없어 / 義罔臣僕 경륜의 뜻 거두고 동쪽으로 왔도다 / 卷懷而東 여덟 조목으로 백성을 가르치니 / 八條軌民 어진 현인의 기풍이었도다 / 仁賢之風 오랑캐를 문명의 나라로 바꾸니 / 革夷而夏 하늘이 주신 것이었도다 / 繄天其賜 대수(代數)는 사십 세를 전해졌고 / 歷世四十 나라는 천 년간 지속되었도다 / 國以千禩 그 성대한 덕이야말로 / 惟厥盛德 백세토록 제사 지내야 하리 / 百世祀之 당나라에 이르러 사당을 세우니 / 洎廟于唐 유종원(柳宗元)이 비문을 지었도다 / 宗元有碑 더구나 우리 해동은 / 矧我鰈域 주나라에서 봉해 준 구지(舊地)임에랴 / 周封之舊 평양의 유민들이 / 箕壤遺民 처음의 터를 지켰도다 / 肇基是守 금화가 번갈아 뒤바뀌어도 / 金火遞遷 능침은 옛날과 다름없도다 / 陵寢猶昔 하늘이 도와주니 / 天其祐之 성인의 자취 인멸되지 않았도다 / 不沫聖迹 기자의 교화는 / 父師之化 만고토록 하루 같도다 / 萬古一日 찬란한 태평시대에 / 於赫昭代 분향을 거르지 않았도다 / 肹蠁罔缺 제단을 쌓지 않고 사당을 세우니 / 不壇而屋 고려보다도 더 빛났도다 / 有光麗氏 비문에 사실을 기재하니 / 克載于碑 예와 물이 겸비되었도다 / 禮物兼備 정성스러운 우리 임금께서 / 亹亹我王 더욱더 제사의 예를 높였도다 / 益隆祀典 숭인으로 게시하니 / 揭以崇仁 전각의 이름이었도다 / 乃顔其殿 후손에게 벼슬을 주니 / 官其苗裔 사당을 지키게 되었도다 / 守祧是修 삼각을 본받으니 / 式是三恪 나라와 더불어 모두 빛났도다 / 與國咸休 제때에 제사를 지내니 / 祼薦孔時 명덕이 향기롭도다 / 明德惟馨 이에 바위를 깎은 다음 / 爰斵樂石 명을 새기어 후세에 보이도다 / 垂後于銘 고사를 상고하여 덕을 숭배하니 / 稽古崇德 더욱더 찬란하도다 / 不顯其光 숭인사(崇仁祠)에 성인의 은택이 / 仁祠聖澤 패수처럼 양양하도다 / 浿水洋洋 五山集卷之五 延城車天輅復元著 / 碑銘 崇仁殿碑 萬曆三十九年秋。平安道居進士臣鄭旻等上䟽曰。惟東方海外一域。未嘗知有中國風敎。幸天惠我箕子。率五千殷民詩書禮樂陰陽卜筮而從。譯敎八條。變夷化俗。君臣父子五倫之敍。繄父師是賴。仁賢之化。所從來矣。高麗顯宗始立廟以祀。我恭定大王命新之。莊憲大王又命文而碑之。是皆崇奉其盛德也。盖箕子之敎。久在孔子之先。故孔子有欲居九夷之意。豈非其效耶。微箕子。吾東方其被髮左袵矣。後雖有孔子之道。其化無由入矣。吾東民知尊孔子。而不知尊箕子。可乎。若然。崇奉箕子。必若孔子之備禮。然後爲無闕也。臣等嘗竊考史家。箕子之世傳四十一。而至準爲燕人衛滿所逐。爲國於韓。上下餘千載。文不足徵。然以鮮于氏爲箕子後者。載於韻府羣玉于字部。書於綱目鮮于輔註。雜出於氏族大全後漢魏略翰墨全書。胡元時有鮮于樞者。遺趙孟頫震琴。其謝詩曰。箕子之後多髯翁。才猷邁俗驚愚蒙。則鮮于氏之爲箕子後章章明矣。馬韓末有孱孫三人。曰友親。其後爲韓氏。曰友平。其後爲奇氏。曰友諒。入于龍岡烏石山家焉。其子孫以籍。鮮于氏之在中國者。旣爲箕子後。則在東方者獨非其苗裔耶。箕子之子孫。若蒙其子姓。則後世亦必有承其氏者。某地未嘗聞有曰子姓者。以國氏者只有本道之鮮于。則所謂鮮于氏者。庸詎非箕子後而誰也。高麗王氏統三爲功。子孫世官而享之。箕子則但與檀君,赫居,東明,溫祚。竝受其始祖之祀。至今主祀無其人。豈非有國者缺典乎。臣等之所痛恨者此也。往者本道人。有以此事上請。事寢不行。乃今者有鮮于寔者。去泰川來居箕子殿側已十年矣。夫以箕子之苗孫。乃同編戶。反不如王氏之子孫。臣等竊愍惜之。伏願如衍聖公崇義監故事。事下禮曹。判書臣申欽等啓復曰。吾東文明之敎。秋毫皆箕子賜也。崇奉之典。固不可闕。更議酌行。大臣議之。遂下牒于平安道觀察使臣崔瓘狀列曰。今玆鮮于氏。爲箕子之後之說。不惟一道士民所共稱。古子史班班可見。而况鮮于氏者又在箕城。本道遺民。請立其祀主。其言不可廢也。事下禮曹。判書臣申欽等又上復曰。本道士民。皆以鮮于氏爲箕子後。其祀典則國家已廟而禮之。惟立後倣王監獨未耳。然祖宗朝所未遑。而刱設一朝。玆事軆大。請令大臣議之。命下。相臣李元翼等以爲鄕微箕子。我東其夷矣。至高麗中葉。乃始建廟。則我朝以上闕典多矣。今若依違。猶夫昔也。且旻等之䟽。藩臣之狀。有據有徵。合依崇義殿爲宜。敎曰可。申欽等又啓曰。箕子殿一如崇義殿故事。殿號則大提學上之。其子孫之爵亦王監是視。令吏曹事之。於是。命揭殿曰崇仁。官鮮于寔爲監。世授之。銘曰。 粤殷太師。明夷自靖。天智之焚。錫範周聖。義罔臣僕。卷懷而東。八條軌民。仁賢之風。革夷而夏。繄天其賜。歷世四十。國以千禩。惟厥盛德。百世祀之。洎廟于唐。宗元有碑。矧我鰈域。周封之舊。箕壤遺民。肇基是守。金火遆遷。陵寢猶昔。天其祐之。不沫聖迹。父師之化。萬古一日。於赫昭代。肸蠁罔缺。不壇而屋。有光麗氏。克載于碑。禮物兼備。亹亹我王。益隆祀典。揭以崇仁。乃顔其殿。官其苗裔。守祧是修。式是三恪。與國咸休。祼薦孔時。明德惟馨。爰斵樂石。垂後于銘。稽古崇德。不顯其光。仁祠聖澤。浿水洋洋。 월사집 제45권 / 비(碑) 기자묘비명(箕子廟碑銘) 병서(幷序) ○ 응제(應製) 은(殷)나라가 망했을 때 세 사람의 행실이 같지 않았으나 공자는 병칭(竝稱)하여 삼인(三仁)이라 하였고, 주자(朱子)는 이 세 사람이 처지가 서로 바뀌었다면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기자(箕子)가 주(紂)에게 충간(忠諫)한 것은 비간(比干)보다 먼저였는데 주가 수금(囚禁)하고 죽이지 않은 것은 하늘이 한 것이고, 무왕(武王)이 다른 나라에 봉(封)하지 않고 조선에 봉한 것도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하늘이 하도(河圖)를 복희씨(伏羲氏)에게 주었으나 팔괘(八卦)의 변화가 그래도 드러나지 않았고 문왕(文王)이 수감되어 비로소 역(易)을 연역하였으며, 하늘이 낙서(洛書)를 우(禹) 임금에게 주었으나 구주(九疇)의 수(數)가 그래도 밝혀지지 않았고 기자(箕子)가 곤액(困厄)을 당하여 비로소 홍범(洪範)을 서술하였습니다. 천인(天人)의 묘리(妙理)가 이에 크게 밝혀지고 제왕의 정치의 대경(大經)ㆍ대법(大法)이 천하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령 문왕이 역(易)을 연역하지 않고 기자가 홍범을 서술하지 않았다면 하도와 낙서는 단지 일개 구멍이 뚫리지 않은 혼돈(混沌)일 뿐이었을 것이니, 하늘이 복희씨와 우 임금에게 이를 준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게다가 하늘이 증민(蒸民)을 냄에 반드시 성현을 탄생시켜 임금과 스승을 만들어 삶을 이루어 주고 교화를 세워 주었으니, 복희씨, 헌원씨(軒轅氏), 요(堯), 순(舜)이 중국을 교화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동방은 비록 외진 곳이지만 사람들은 역시 천민(天民)입니다. 그러나 단군(檀君)으로부터 인문(人文)이 계명하지 못하여 무지몽매한 상태였으니, 혹여 기자의 팔조(八條)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끝내 오랑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기자가 동방을 교화한 것은 복희씨, 헌원씨, 요, 순이 중국을 교화한 것과 같은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늘이 기자를 죽이지 않은 것은 세상에 도(道)를 전하기 위해서였고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서였으니, 가령 기자가 죽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지 않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그렇고 보면 기자가 사도(斯道)에 끼친 공로는 실로 천하만국(天下萬國)이 다 함께 도움을 받는 것인데 직접 그 가르침을 받은 은덕은 우리 동방이 가장 많았습니다. 삼한만세(三韓萬世)에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게 한 그 공덕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공자(孔子)의 도가 비록 더없이 크지만 만맥(蠻貊)의 나라에는 교화가 미치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기자가 동방을 교화한 것은 공자가 탄생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공자가 심지어 승부(乘桴)ㆍ욕거(欲居)의 뜻이 있었던 것이니, 예의와 문명의 교화의 소종래(所從來)가 오래입니다. 가령 기자의 교화가 있지 않았다면 후대에 비록 공자의 도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 교화가 어찌 쉽게 먹혀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고 보면 우리나라가 기자를 숭배하고 그 은덕에 보답하는 예(禮)는 응당 공자와 같은 수준으로 높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향사(享祀)하는 곳이 많지 않고 그 후손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 어찌 때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 되는 해인 만력(萬曆) 신해년(1611, 광해군3)에 본도(本道)의 선비 정민(鄭旻) 등이 항소(抗疏)하여 말하기를, 사서(史書)에 의하면 기자 이후 41대(代) 만인 준(準)에 이르러 위만(衛滿)에게 축출되었으며, 마한(馬韓) 말엽에 잔손(孱孫) 세 사람이 있었는데 친(親)은 후대에 한씨(韓氏)가 되었고 평(平)은 기씨(奇氏)가 되었고 량(諒)은 용강(龍岡) 오석산(烏石山)에 들어가 선우(鮮于)에게 계통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 세계(世系)는, 운서(韻書)에서는 ‘선우는 성찬자성(姓簒子姓)에 의하면, 주(周)나라가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封)하였고 그 지자(支子)인 중(仲)이 우(于) 땅을 식읍으로 받았기에 선우를 씨(氏)로 삼게 되었다.’ 하였고, 강목(綱目)에서는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고 그 아들이 우 땅을 식읍으로 받았기에 선우를 성(姓)으로 삼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맹부(趙孟頫)가 선우추(鮮于樞)에게 준 시에 ‘기자의 후손에 구레나룻 좋은 노인 많아라.〔箕子之後髥翁多〕’ 하였으니, 선우가 기자의 후손임은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지 않겠습니까? 홍무(洪武) 연간에 선우경(鮮于景)이란 사람이 중령별장(中領別將)이 되었고 그 7대손(代孫) 식(寔)이 태천(泰川)에서 와서 기자묘(箕子廟) 곁에 산 지가 어언 10년이 되었습니다. 청컨대 식(寔)에게 기자의 제사를 맡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그 일을 중히 여겨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자문하게 하는 한편 본도(本道)로 하여금 식(寔)을 탐방하고 복계(覆啓)하게 한 결과 모든 사실이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정 의론이 모두 찬성하여 드디어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임자년(1612) 봄에 어명으로 사당에 ‘숭인(崇仁)’이란 전호(殿號)를 걸었고, 선우씨에게 벼슬을 내려 식(寔)을 전감(殿監)으로 삼고 자손들이 이 벼슬을 이어받게 하였습니다. 옛날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황제(黃帝)와 요(堯)ㆍ순(舜)의 후손을 찾아 세워서 삼각(三恪)으로 삼아 그 선조의 제사를 모시게 하였으니, 성인의 숭덕계절(崇德繼絶)의 뜻은 천고에 걸쳐 다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부윤(府尹)에게 명하여 묘소를 증축하고 사우(祠宇)를 수리하였으며 제전(祭田)과 수호(守戶)를 증설하여 제수를 공급하고 청소를 하게 하였습니다. 또 무릇 성(姓)이 선우인 사람은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고 군적(軍籍)에 넣지도 않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기자의 사당 아래 모여 살게 하는 한편 근신(近臣)을 보내 향을 가지고 가서 사당에 축제(祝祭)하여 고유(告由)하게 하였으니, 기자를 존숭하는 예전(禮典)이 이에 이르러 더할 나위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이륜(彝倫)을 부식(扶植)하고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일대(一大) 기회인 것입니다. 아아, 성대합니다. 당초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9)에 본도의 선비들이 성사(聖師)의 유택(遺澤)을 존모하여 부(府)의 서남쪽 창광산(蒼光山) 아래 서원을 세우고 강당을 설치하여 이름을 홍범서원(洪範書院)이라 하여 유생들이 성사를 흠숭(欽崇)하고 도학을 강명(講明)하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무신년(1608, 선조41) 겨울에 인현서원(仁賢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았습니다. 이에 이르러 관찰사 정사호(鄭賜湖)가 조정에 보고하기를, 지금 기전(箕殿)에 명호를 걸고 후손을 세워 치제(致祭)하게 한 것은 수천 년 이래 없었던 성대한 일입니다. 이 지역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부사(父師)의 문명의 교화를 다시 입은 것처럼 기뻐 용동(聳動)하며 모두 이 사실을 비석에 새겨 크나큰 경사를 기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유신(儒臣)을 시켜 전후의 사적을 기술하여 사람들이 눈으로 우러러보고 무궁한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이에 전하께서 좋다고 하시고 신에게 명하여 사적을 서술하게 하셨습니다. 신은 마침 예관(禮官)이라 이 일을 의논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세상에 드문 예전(禮典)을 목도했던 터이므로 명을 받고 황공하여 감히 문사(文辭)가 천루(淺陋)하여 이러한 큰 글을 지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삼가 머리 조아려 절하고 명(銘)을 바칩니다. 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이 큰 법을 내려 주시니 / 天錫大範 우 임금께서 그것을 본받으셔서 / 神禹則之 은사이신 기자에게 전해졌어라 / 以傳殷師 은사께서 뒤이어 출현하시니 / 殷師嗣興 그 감춰진 뜻이 드러나서 / 蒙難乃闡 인문이 비로소 밝아지게 됐네 / 人文始顯 이에 이륜의 이치를 펼쳐서 / 爰敍彝倫 성인의 물음에 대답하셨으니 / 以承聖問 이는 바로 상제의 가르침이어라 / 寔維帝訓 이미 무왕의 스승이 되시어 / 旣師武王 백성들의 표준을 내려 주시고 / 錫民之極 의리상 신하로 섬기지 않으셨지 / 義罔臣僕 하늘과 땅의 변화에서 / 天地變化 그 바른 이치를 얻어서 / 我得其正 명이로 자정하였어라 / 明夷自靖 이에 동토를 돌아보시고 / 乃睠東土 이에 사도를 미루어 폈으니 / 乃推斯道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 / 實天所造 먼 곳도 없고 누추한 곳도 없어 / 無遠無陋 팔조의 법으로 교화를 펴시어 / 八條以化 오랑캐를 중화로 변화시키셨네 / 變夷爲夏 그 어진 덕이 피부에 스며들어 / 仁涵于膚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으니 / 道不拾遺 예의가 잘 구현된 치세였었지 / 禮義之治 위대하여라 그 성대한 덕이여 / 巍乎盛德 백세토록 길이 흠앙하나니 / 百世以欽 그 은덕이 지금까지 이어지도다 / 受賜到今 패수의 서쪽 기슭에는 / 浿水西涯 정전의 옛터가 남아 있으니 / 不沫井洫 신성한 자취가 엊그제 일 같아라 / 神迹如昨 고려 때 사당을 처음 지었으나 / 肇祠于麗 예식이 잘 갖추어지지 못했고 / 禮式不備 세월이 갈수록 해이해졌어라 / 寢遠以弛 저 아득한 성인의 계통은 / 遙遙聖緖 후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나 / 不絶來雲 지파가 흩어지고 나뉘었었지 / 派散支分 밝으신 우리 임금께서는 / 惟明我后 홍범을 따라 큰 법도를 세우고 / 遵範建極 멀리 전승이 끊어진 학문을 이으셨네 / 遠紹絶學 이에 사당에는 아름다운 명호가 있고 / 殿有美號 서원에는 빛나는 사액이 걸렸으니 / 院有華額 더욱 빛나고 또 성대해졌도다 / 益光且碩 후손을 세워 끊어진 계통을 잇고 / 立後繼絶 대대로 작록을 세습게 하셨으니 / 永襲世爵 이것이 바로 삼각이라네 / 式是三恪 사당에 특별한 향사를 모시니 / 特祀于廟 희생은 살지고 술은 향긋해 / 牲肥酒香 예의가 가득 넘쳐 흐르도다 / 禮意洋洋 훌륭하여라 우리 왕이시여 / 猗歟我王 성인의 가르침을 이으셔서 / 聖謨其承 이 나라의 중흥을 이룩하시고 / 賁我中興 실추된 예전(禮典)을 모두 정비하니 / 墜典畢擧 그 의식의 법도가 찬란하여 / 縟儀彬彬 천고에 면모를 일신하였어라 / 千古一新 아아 빛나게 드러나지 않으랴 / 於乎不顯 문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 文在於玆 영원토록 사람들 사모하리라 / 沒世之思 月沙先生集卷之四十五 / 碑 箕子廟碑銘 幷序應製。 殷之亡也。三人之行不同。而孔子竝稱三仁。朱子以爲易地則皆然。臣竊嘗以謂箕子之諫紂。在於比干之先。而紂之囚而不殺。天爲之也。武王之不封於他方。而封於朝鮮。亦天也。何者。天以河圖授伏羲。而八卦之變猶未著。文王囚而始演易彖。天以洛書授神禹。而九疇之數猶未明。箕子厄而始敍洪範。天人之妙。於是大明。而帝王爲治之大經大法。得傳於天下後世。使文王不演易。箕子不敍疇。則河之圖洛之書。特一未竅之混沌耳。天之授羲,禹。豈端使然哉。茲非天意而誰歟。且天生蒸民。必降聖賢。作之君作之師。以遂其生。以立其敎。羲軒堯舜之敎中土是已。我東雖僻。亦天民也。而曰自檀君。人文未彰。泯泯棼棼。倘微箕子八條之敎。則終未免爲左袵之歸。箕子之敎東方。是猶羲軒堯舜之敎中土。蓋有不可得而已者。此又非天意而誰歟。天之不死箕子。爲傳道也。爲化民也。箕子雖欲死。得乎。武王雖欲不封于朝鮮。得乎。然則箕子之有功於斯道。實天下萬國之所共賴。而其親炙之恩。則吾東國最偏受。三韓萬世。人得以爲人。之功之德。爲如何哉。孔子之道。雖大而無外。蠻貊之邦。猶有所不化。箕子之敎東方。在孔子未生之前。故孔子至有乘桴欲居之志。禮義文明之化。其所從來久矣。倘使箕子之敎。不有以先之。則後雖有孔子之道。其化豈易以入哉。然則我國崇報之禮。當與孔子竝隆。然而享祀之制不廣。立後之典尙闕。誠欠事也。豈亦有待歟。我殿下嗣服之三年萬曆辛亥。本道士人鄭旻等抗疏言。史稱箕子之後傳四十一。而至準爲衛滿所逐。馬韓末有孱孫三人。曰親。其後爲韓氏。曰平。爲奇氏。曰諒。入龍岡烏石山。以傳鮮于。世系韻書曰。鮮于子姓。周封箕子于朝鮮。支子仲食采於于。因氏鮮于。綱目稱箕子封於朝鮮。其子食采於于。因姓鮮于。趙孟頫贈鮮于樞詩曰。箕子之後多髥翁。鮮于之爲箕子後。不旣章明較著乎。洪武間。有鮮于景者爲中領別將。其七代孫寔。自泰川來居殿側今十年。請以寔守箕子祀。殿下重其事。命禮官詢于大臣。且令本道採訪覆啓。事皆有據。廷議咸以爲可。遂以鮮于氏。定爲箕子後。至明年壬子春。命揭殿號曰崇仁。官鮮于。寔爲殿監。子孫世授焉。昔周武王求黃帝堯舜之後。立爲三恪。以奉其祀。聖人崇德繼絶之意。可謂千載一揆也。且命府尹封墓道修祠宇。增置祭田及守戶。使之供粢盛備洒掃。凡姓鮮于者復其家。毋籍于軍。俾聚居祠下。仍遣近臣。齎香祝祭于廟。以告厥由。尊崇之典。至是而無復遺憾。此實扶植彝倫。挽回世道之一大機會。嗚呼盛矣。始萬曆丙子。本道士子慕聖師之遺澤。立書院於府西南蒼光山下。設講堂。名曰洪範。以爲多士欽崇講明之所。歲戊申冬。命扁額曰仁賢。至是觀察使鄭賜湖上聞曰。今茲箕殿揭號。立後致祭。是數千年來所未有之盛擧。一域臣民。擧歡欣聳動。有若重被父師文明之化。咸願勒之貞珉。以揚閎休。乞命儒臣備述前後事迹。庶幾表著觀瞻。傳示無極。殿下曰可。遂命臣敍之。臣適忝禮官。與聞末議。而獲覩曠世之典。承命秪慄。不敢以文辭淺陋。不足以自效爲解。謹拜手稽首而獻銘。銘曰。 天錫大範。神禹則之。以傳殷師。殷師嗣興。蒙難乃闡。人文始顯。爰敍彝倫。以承聖問。寔維帝訓。旣師武王。錫民之極。義罔臣僕。天地變化。我得其正。明夷自靖。乃眷東土。乃推斯道。實天所造。無遠無陋。八條以化。變夷爲夏。仁涵于膚。道不拾遺。禮義之治。巍乎盛德。百世以欽。受賜到今。浿水西涯。不沫井洫。神迹如昨。肇祠于麗。禮式不備。寢遠以弛。遙遙聖緖。不絶來雲。派散支分。惟明我后。遵範建極。遠紹絶學。殿有美號。院有華額。益光且碩。立後繼絶。永襲世爵。式是三恪。特祀于廟。牲肥酒香。禮意洋洋。猗歟我王。聖謨其承。賁我中興。墜典畢擧。縟儀彬彬。千古一新。於乎不顯。文在於茲。沒世之思。 청주한씨 세보[淸州韓氏 世譜] 정의 조선시대 문신 한효중과 한혁 등이 1617년에 간행한 청주한씨의 족보. 내용 분량은 불분권 1책이며, 표제와 판심제 모두 [청주한씨세보]이다. 황명 만력 사십오년 정사 초봄에 서원의 보살사에서 개간했다(黃明萬曆四十五年丁巳孟春西原菩薩寺開刊)는 간기에 따르면, 1617년 청주의 보살사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크기는 반곽이 가로 23.5cmx 세로 26cm이며, 서발문, 범례, 부록은 항자수부정(行字數不定), 유계(有界), 주쌍행(註雙行), 선장(線裝), 저지(楮紙)이다. 체제는 표지(表紙), 청주한씨전대사적(淸州韓氏前代事蹟), 반시당기(返始堂記), 청주한씨시조유기서사비(淸州韓氏始祖遺基叙事碑), 발문(跋文), 왕후세계(王后世系), 본문에 해당하는 보도(譜圖), 간기(刊記)로 구성되어 있다. 청주한씨전대사적은 시조 한란(韓蘭) 이하 한강(韓康), 한사(韓謝), 한악(韓渥), 한방신(韓方信), 한수(韓脩), 한상질(韓尙質), 한명회(韓明澮), 한충(韓忠) 등 현조(顯祖)들의 사적으로 위지(魏志), 고려사(高麗史), 목은집(牧隱集), 사가집(四佳集) 등에서 자료를 발췌 · 수록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청주한씨는 선우씨(鮮于氏), 기씨(奇氏)와 함께 기자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데, 시조 한란의 사적 역시 기자(箕子)의 후손임을 강조하는데 주안점이 있다. 여기에 대해 청주한씨 족보의 지은이는 위지의 [기자의 후손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축출되어 마한을 건국하면서 자손들이 한(韓) 성(姓)을 가지게 되었다는 기록과 기자의 자손 중 우평(友平)의 후손은 선우씨, 우량(友諒)의 자손은 한씨, 우성(友誠)의 자손은 기씨가 되었다]는 기록을 인용하여 한씨가 기자에서 출자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행주기씨 까페에 다음과 같은 토론이 있었다. 기우범 ; (기자의) 41세손 기준(箕準)이 연인(燕人) 위만(衛滿)의 침입으로 남천(南遷), 전북 금마군(金馬郡, 현 익산군)으로 옮기고, 다시 그의 8세손(마한 원왕) 기훈(箕勳)에 이르러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우성(友誠)은 덕양(德陽 : 행주)기씨, 우량(友諒)은 상당(上黨 : 청주)한씨, 우평(友平)은 북원(北原 : 평양)선우씨의 시조가 됐다. 한씨와 선우씨가 우리와 같은 시조라는 것을 알겠는데 그 형제 중 첫째가 누군가요? 기회근; 누가 큰아들인지 명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위지의 기록은 魏誌曰 箕子 子姓 其後 有曰 友平 友諒 友成 友平 因 襲 鮮于氏 歸 北原, 友諒 襲 馬韓 仍爲 上黨 韓氏, 友誠 歸 德陽 爲 奇氏, 즉 위지(魏志 : 위나라 기록)에 이르기를 기자(箕子)의 후손 중에 우평(友平)과 우량(友諒)과 우성(友誠)이 있었는데 우평(友平)은 북원(北原)에 들어가서 선우씨(鮮于氏)라 칭(稱)하고 우량(友諒)은 그대로 마한 구제(馬韓 舊制)에 따른 상당 한씨(上黨 韓氏)라 칭(稱)하고 우성(友誠)은 평강(平江)으로 들어가 덕양 기씨(德陽 奇氏)라 칭(稱)하였다고 전(傳)한다 라고해서 선우,한,기의 순서로 나옵니다. 청주한씨의 홈에 가보아도 그렇게 나오고요. 이것이 형제간의 순서라면 선우씨가 큰형, 한씨가 중간, 기씨가 막네라 할 수 있습니다. 기옥도; 내가 보유한 자료에는 元王有子三人曰長子友平,次子友誠,三子友諒,馬韓滅友平奔高句麗琉璃王朝爲北原鮮于氏,友誠降于百濟溫祚王朝爲德陽奇氏,友諒亡歸新羅上黨韓氏........ 로 되어 있는바 장자는 우평(선우씨), 둘째는 우성(기씨), 셋째는 우량(한씨)가 맞는 것 아닌가요? 기호철; 길게 이야기 하지는 않겠습니다. 누가 형이고 아우고도 없습니다. 기록마다 모두 틀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들도 신빙성을 검증하기에는 어렵구요 기자의 후손으로 기한선우 삼성을 전하는 기록은 놀랍게도 거의 없습니다. 기자의 후손에 대한 가장 믿을 수 있는 기록은 중국 진(晋)나라의 진수(陳壽:232~265)가 사찬(私撰)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 조에 보이는 것인데 (朝鮮)侯 準이 僭濫되이 王이라 일컫다가 燕나라에서 亡命한 衛滿의 攻擊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 (準王은) 그의 近臣과 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韓의 땅에 거주하며 스스로 韓王이라 稱하였다. 魏略에 일컫기를 準의 아들과 親戚으로서 그대로 나라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그로 인하여 韓氏라는 姓을 詐稱하였다. 準이 海外의 나라에서 王이 되었으나 朝鮮과는 서로 往來하지 않았다. 그 뒤 (準의) 후손은 절멸하였으나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祭祀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朝鮮)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는 것이 그것입니다. 거기에서 삼국지를 지은 진수는 어권이라는 사람이 지었던 위략이라는 책을 인용하였는데 여기에 기자 후손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기자 후손에 대한 기록은 동서양을 모두 합하여 위략의 이 기사가 유일한 것입니다만 불행하게도 위략은 삼국지가 지어진 이후 전하지 않아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책을 간행할 때 번각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활자로 하지 않고 인쇄된 책을 나무에 붙이고 그대로 조각하여 간행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삼국지의 번각본에는 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가 魏略曰 其子友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로 잘못되어 있었고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소개된 삼국지에는 모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자의 후손 기준의 아들은 우친이라는 없던 이름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잘못은 기자를 모시는 숭인전(평양에 있음) 비문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숭인전 비문에 의하면 [만력 신해(1611, 광해군 3)년에 본도(平安道)의 사인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이 서로 잇달아 상소하여 말하기를 역사에서 일컫기를 기자의 후손으로 41세를 전하여 준에 이르러 위만에게 축출 당하여 마한말 후손 3인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친인데 그 후에 한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평인데 기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량인데 용강 오석산(오늘날 남포직할시 용강군)에 들어갔는데 선우씨의 세계에 전합니다 (崇仁殿碑文 萬曆辛亥 本道士人 曺三省 楊德祿 鄭旻等 相繼抗疏言 史稱箕子之後 傳四十一而至準 爲衛滿所逐 馬韓末 有孱孫三人 曰親其後爲韓氏 曰平爲奇氏 曰諒入龍岡烏石山 以傳鮮于世系) ] 사실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마저도 조선으로 하였던 조선왕조는 개국초부터 기자와 기자 후손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왔습니다. 변계량에 의해 기자비문을 쓰게 했다거나 성종조 왕명으로 기자 후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명종 때에 이르러 중국 원나라 시인 선우추가 쓴 시에서 선우씨는 털이 많으니 기자의 후손이 분명하다는 기록을 통해 국가적으로 선우씨에 대해 기자의 후손에 준하는 특혜를 부여하였는데 각종 조용조의 면제와 아울러 선우씨에 대한 특별 채용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선조 연간에는 기자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활성화되어 율곡 이이나 윤두수 등에 의해 기자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가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연구에서 기자의 후손은 언급되지 아니하였고 선우씨에 대한 기자 후손으로의 국가적 공인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선조는 여러 신하들을 인견한 자리에서 기자의 후손이 조선에 있는가를 물었고 이에 윤두수는 선우씨 한씨 기씨가 그 후손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있으나 선우씨는 중국에서 기자의 후손이 선우씨라는 전설이 있고 원나라때 시인 선우추가 쓴 시에 그런 내용이 있으나 조선의 선우씨가 그것이라고 확증할 수 없으며 한씨는 준왕이 한왕이 되었다는 이유에서 함부로 칭한 것이며 기씨는 箕와 奇가 음이 같기 때문에 나온 주장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조삼성 등의 상소 이후 기자 후손이 조선에 실재하며 그것은 기 한 선우 삼성이라는 주장은 더욱 전파되고 광해군 연간에는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공인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후 청주한씨는 최초로 만들어진 그들의 족보(석탄(石灘) 한효중(韓孝仲 : 1559 명종14-1628 인조6에 의해 편찬)에서 다음의 기사를 통해 더욱 공고화 하였습니다. 箕子의 子姓은 其後에 有曰友平이요 曰友諒이요 曰友誠이니 友平은 仍襲鮮于氏하여 歸北原하고 友諒은 襲馬韓하여 仍爲上黨韓氏하고 友誠은 歸平江하여 仍襲德陽奇氏하니라.(魏誌); 箕準의 七世인 元王 箕勳에 至하여 有子三人이 各其姓을 得하니 友誠은 德陽奇氏가되고 友諒은 上黨韓氏가 되고 友平은 北原鮮于氏가 되었었다.(魏誌); 淸州韓氏의 由來는 後朝鮮인 箕子朝鮮에서 起源한다. 馬韓 元王(필자주:箕準의 7世 箕勳)의 아들 3인이 있어 友平, 友諒, 友誠이니, 나라가 衰하자 우평은 高句麗에 入仕하여 北元鮮于氏가 되고, 우량은 新羅에 입사하여 上黨韓氏 즉 청주한씨가 되었고, 우성은 百濟에 입사하여 德陽奇氏가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한씨는 모두 箕子의 後裔가 되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야기하여 한씨 족보에서 인용한 위지는 역사서가 아닙니다. 魏志라면 삼국지의 위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위의 인용대로 한다면 단순히 위나라 기록에 의하면이라는 막연한 이야기에 불과하여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해군 연간에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당시 영의정이던 만전 기자헌의 영향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통해 자세한 사항들은 추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후 숙종대에 이르러 기문의 고세계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추론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단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의 기자에 대한 기록만 검색해보아도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지영; 이덕일이라는 우리 나라 역사학자가 쓴 책에는 행주 기가, 청주 한가, 선우가가 중국인이 되고 싶어 기자라는 인물을 만들어 냈고, 우리 가문상의 시조도 기자라고 하더군요. 우리 가문의 시조는 행주 기가 우자 성자 되시는 분 아닙니까? 역사학자 조차 저런 얘기를... 또 행주 기가와 기자의 기가와는 무슨 관계인지... 단일본의 확실하고 정확한 정의를 알고 싶습니다. 우리 가문이 어떠 어떠한 상황에 부합되기에 단일본이다 하는 것을 알고 싶습니다. 기호철; 질문하신 내용은 가문의 연원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영님게서는 크게 세가지를 물으셨다고 파악합니다. 첫째 우리 기문은 중시조 기순우 할아버지를 1세로 하는데 기자와는 어떤 관련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둘째는 기자의 기(箕)씨와 우리 기(奇)씨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기자의 후손을 칭하는 기, 한, 선우씨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입니다. 첫째에 족보 체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첩되는 세계는 노사 기정진선생님께서 이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족보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구요. 둘째와 셋째에 대한 대답은 기,한,선우 가운데 누가 형이냐는 질문에 제가 답변한 내용에 있습니다. 노사 기정진 선생께서 득성조부터 65세까지를 고세계로 하고 다시 중시조 기순우 할아버지를 1세로 계보를 정리하신 뜻은 두가지 입니다. 첫째 기자의 후손이라는 설은 전해졌으나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는데 불현듯 고세계가 나타났으나 사실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는 부분과 믿기 어려운 부분을 구분한 것이 그 까닭이었습니다. 둘째는 고세계도 가문의 전승이므로 이를 후대에 전하여야 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기자의 후손인가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기자의 후손을 국가적으로 찾아 왔지만 그러지 못하다 중국 원나라 선우추의 시 구절에 기자의 후손은 털이 많으니 선우추 그대는 기자의 후손이로다라는 추상적인 표현을 통해 국가적인 은전을 베풀었고 실제적으로 국가로 부터 공인된 기자의 후손은 선우씨 였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한씨, 기씨, 공(孔)씨, 인(印)씨 등이 서로 기자 후손을 자처하였지만 근거는 없는 것이었으나 광해군대에 청주한씨가 족보를 처음으로 만들면서 석탄 한효중이라는 사람에 의해 기자의 후손은 기 한 선우라는 위지의 기록이 위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자의 후손이라는 전승 자체가 위조된 기록에 의존한다고 해서 모조리 무시할 것은 없습니다. 그 자체가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세계와 중시조 이하의 실제 계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은 이미 노사선생께서 확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한 사실보다는 기자의 후손이 역사인데 우리나라 역사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단히 상식을 벗어난 일입니다. 기자의 후손이라하며 기, 한, 선우씨가 종씨라는 전승이 있으나 상세한 것은 알기 어렵습니다. 상세하고 믿을 수 있는 세계는 고려 인종대 문하평장사를 지내신 기순우 할아버지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회근: 위조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석탄 한효중이 청주한씨 족보를 최초로 편찬한 것은 1617년입니다. 한효중의 발문을 읽어보면 족보를 편찬하면서 청주한씨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모아서 정리한 것으로 나옵니다. 청주한씨 발문을 인용하면 [을사년(1605년)에 내가 성환 독우로 있을때 마침 한백겸이 청주목사로 와서 먼저 시조 태위공의 유기를 찾아 단을 쌓고 비를 세워 후손들의 의모할 장소를 마련하는 일에 나도 참여하여 조력한바 있었다. 10년후에 다시 내가 청주읍의 성주로 금의환향하게 되어 다시 단을 개수하고 상구를 장만하여 전인이 미처 못한 것을 구비하여 놓았다. 하루는 참봉 한혁과 함께 담화하던 중 "우리 한씨가 대성으로서 세세로 명성을 떨친 것은 태위공의 덕을 쌓은 음덕인데 자손된 우리들이 지금까지 이런 생각조차도 없이 집안의 계통에 어둡고 조상의 근본까지 잊어 버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종중에 규율이 없고 가문에 족보가 없는 까닭인지라 오늘날 할 일이 이보다 더 절박한 것이 없다, 그런데 제단이나 꾸미고 선조 유업이나 추모하는 정도로 지나고 말 것인가? 여러 종인들과 더불어 광범위하게 자료를 찾아 모으고 계대의 상하 종지를 분명히 밝혀서 우리가 한 핏줄에서 태어난 한 할아버지의 자손임을 알도록 하자고 생각합니다. 여러 일가 어른들은 이 일을 같이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제안 하였더니 한혁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나 역시 여기에 뜻한 바가 있어 자료를 수집한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같이 손잡고 일할 사람이 없어서 한이었습니다. 이제 성주의 말씀이 이렇게 간곡 하시니 진실로 우리 문중의 큰 행운인지라 막중한 이 일이 우연히 되는 것도 아니고 시기도 또한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하고 즉시 서울에 가서 각 종문을 순방하면서 가첩을 수집하였다. 정승 한효순은 소장하였던 초고를 내주고 또 수록한 참고자료 한권까지도 제공하여 주었으며 나는 또 호서의 일가집 가보를 수집하여서 그 다른점 같은 점을 대조하여 바르고 틀린 점을 여러 차례 수정하였다. 자손들만 기록하고 외손까지 넣지 못한 것은 편찬이 평이하고 보기가 간명하도록 하고자 함이요, 본손만을 중히 여기고 외손을 경시한 것은 아니다. 간명하게 일부를 편찬하여 영구히 전하려고 인쇄하게 되었는데 충청도 종인 중에 가세에 따라 비용을 마련해서 조력한 분이 많았다. 창졸간에 수집한 것이라 필연코 소루하고 미비한 것이 많을 것이다. 후인들이 잘 고증하여 증보하고 삭제하기 바란다. 만력(명나라 신종의 연호)정사(서기1617년 광해군9년)이른 봄, 후손 통훈대부 행 서원현감 한효중 삼가씀] 또한 월사 이정구가 시조의 이름만 틀리고 선우한기가 기자의 후손이라는 같은 내용의 숭인전 비문을 지은 것은 1613년으로 한효중이 최초의 청주한씨 족보를 편찬하면서 위조했다는 1617년보다 4년이 빠릅니다. 한효중이 족보를 만들기 4년전에 위조한 내용을 이정구에게 주어 비문위조에 공범이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말이 않됩니다. 결론적으로 한효중은 한씨집안에 전해오는 여러 자료에 있는 이 내용을 정리하여 족보에서 공식화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정구도 시조이름이 다른 것으로 보아 한효중과는 다른 여러 전하는 자료를 참고했을 것으로 봅니다. 기호철; 한효중에 의해 위조되었다는 부분은 대단히 민감한 내용입니다. 또한 월사 이정구의 비문과의 상이성과 연대의 착오 또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먼저 구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월사 이정구가 비문에서 말한 것은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비문에는 [만력 신해(1611, 광해군 3)년에 본도(平安道)의 사인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이 서로 잇달아 상소하여 말하기를 역사에서 일컫기를 기자의 후손으로 41세를 전하여 준에 이르러 위만에게 축출 당하여 마한말 후손 3인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친인데 그 후에 한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평인데 기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량인데 용강 오석산(오늘날 남포직할시 용강군)에 들어갔는데 선우씨의 세계에 전합니다 (崇仁殿碑文 萬曆辛亥 本道士人 曺三省 楊德祿 鄭旻等 相繼抗疏言 史稱箕子之後 傳四十一而至準 爲衛滿所逐 馬韓末 有孱孫三人 曰親其後爲韓氏 曰平爲奇氏 曰諒入龍岡烏石山 以傳鮮于世系) ]라는 부분이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은 대학자 이정구가 쓴 것이니 믿을 만 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정구가 비문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로 평안도의 사인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이 계속 상소한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왕조실록에서도 이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평안도 유생 정건(鄭虔)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개는 기자(箕子)의 후예를 습봉(襲封)하도록 청하는 내용이었다.(광해군일기)43, 3년 7월 3일] ]가 그것입니다. 실록의 정건은 정민의 착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숭인전 비문에 이정구가 인용한 상소가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의 상소 가운데 어떤 것인지는 명확치 않습니다만 그들의 상소 내용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조삼성은 윤두수가 기자지(箕子志)와 평양지를 편찬하는데 이미 참여한 경력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조선시대 기자에 대한 종합적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은 선조대였는데 윤두수의 기자지(箕子志), 이이(李珥)의 기자실기(箕子實記), 한백겸의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연구에서 기자의 후손이 기, 한, 선우라고 언급되지는 않았으며 또한 한씨족보에 인용된 위지의 기록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한효중 역시 언급한 바와 같이 족보를 편찬하며 이미 한백겸을 만난 적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명확히 해둘 것은 최소한 광해군이 즉위하기까지 기자의 후손이 기, 한, 선우 삼성이라는 설은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대학자 고봉 기대승 선생의 손서는 청주한씨 한이겸입니다. 한이겸의 아버지는 한효중이 언급한 한효순이니 함재 기효증공의 사돈입니다. 이 한효순은 만전공 기자헌과 대립하여 이이첨과 함께 만전공을 축출하는데 중심에 섰던 인물입니다. 그럼 경연에서 선조 임금께 기자에 대한 기록의 진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던 고봉선생의 아드님께서 청주한씨 혼인을 했다는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물론 제가 한효중이라고 했던 것은 그 편찬에 직접 책임이 있는 사람을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문의 무술보(2차보)가 죽림헌(기닙) 등이 실제로 작업했다고 죽림헌의 족보라고 하지 않고 송암공(기정익)의 족보라고 지칭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흘렀습니다만 숭인전 비문의 기, 한, 선우씨의 기자 후손설은 이정구의 학설이 아니라 이정구가 숭인전 비문을 건립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며 그런 상소까지도 있었다는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정구는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삼가 사전(祀典)에 대한 일로 아룁니다. 평양(平壤)의 기자사(箕子祠)를 숭인전(崇仁殿)으로 고치고 그의 후손을 세워 제사를 주관하게 하라고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 즉위하신 뒤로 덕을 높이고 어진이를 숭상하는 데 관계되는 법전을 수행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후손을 세우는 한 가지 일은 이제 비로소 명을 내리셨으니, 실로 2백년 동안 있지 않았던 성대한 거조입니다. …… 옛날에는 기자전(箕子殿)에 참봉이 있었는데 이제 전감(殿監)을 두었으니, 참봉은 혁파해야 될 것 같습니다. 선우씨(鮮于氏)를 이미 기자의 후예로 정하였으니,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 고을에 있는 사람들을 군적(軍籍)에 편입시키지 말고 사당 아래 모여 살면서 제사를 받들게 하소서.하니, 따랐다. (광해군일기) 52, 4년 4월 27일] ]고 하여 기, 한, 선우 삼성 가운데 선우씨의 기자 후손설만이 받아들여진 당시의 상황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선우식, 선우협 등이 대대로 기자의 후손으로 국가의 은전을 받아왔습니다. 그럼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의 상소에 있는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조삼성은 이미 윤두수의 기자지 편찬에 참여한 인물이었음을 지적한바 있었습니다. 윤두수의 기자지에는 기자 후손이 기한선우 삼성이며 위지에 그런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거나 알았다하더라도 애써 무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위의 상소에서 그 내용이 선우씨의 세계에 의존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만 저는 아직 이것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종때에는 기자의 세계가 40대였고, 선조 무렵에는 41대로 영조대에는 42대로 변화하며 그 내용도 차츰 달라지고 더욱 정확해졌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와 윤두수 역시 기자 41대 928년을 공통적으로 논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는 이것이 주된 학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부정확한 당시의 연구에 불과합니다. 기자의 성을 자(子)씨로 고증한 것이 그것입니다. 당시 조선에 소개되지 않았던 중국측의 자료와 목간 등을 통해 기자의 성이 희(姬)씨라는 사실이 추후 밝혀졌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확증하기는 어려우나 조삼성은 광해군 7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만전정승의 과거 영향력 행사로 부정의 논란이 있었다는 점도 주지해 볼 사실입니다. 또한 양덕록 역시 음직을 얻었던 것도 전혀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까운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봉 선생의 후손과 만전정승 일가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음은 선후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외적으로 선후 관계는 그렇습니다만 한효중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청주한씨족보는 1605년(을사:선조3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한효순의 초고는 최소한 1615년 이전에 편찬되었습니다. 그것은 한효순이 이때 죽었기 때문입니다. 편찬이 완료된 시점이 1617년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서적의 편찬은 수십년을 두고 여러 사람이 서로 살피며 출판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위조의 진위 여부는 평가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모두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적하신 바와같이 그런 기록이 있었고 이것이 취합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십년만에 느닷없이 풍성한 기록이 홍수처럼 쏟아졌던 것은 당시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기회근 한효중의 조작이라기 보다는 정리라고 해야 옳타고 봅니다. 기호철 출처를 제대로 밝혔다면 정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위지라고 한 것은 그것을 믿도록 호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조작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미처 기입하지 못하였지만 조작의 증거는 더 있습니다. 이는 선조께도 누가 되므로 여기서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기회근 글의 뜻은 기자헌과 한효중 혹은 한효순이 정치적으로 정적관계지만 합심하여 시조를 조작했다는 것이군요. 기호철 기자의 후손에 대한 설은 이미 있었습니다만 신빙성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없는 기록인 위지 등을 통해 사실처럼 호도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라는 이야기 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다름 아닌 군역의 문제입니다. 이를 논하다 보면 집안의 숨겨진 것을 모두 밝혀야 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군역은 양반이면 당연히 부담하지 않아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언급하면 족보에 숨겨진 것까지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전 정승께서는 김시양에게 가계 기록의 문제점을 스스로 고백한 일이 있었고 이는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기회근; 숭인전비명에 대하여는 다음 기록으로 알 수 있습니다. 숭인전비명崇仁殿碑銘 고古 4657-28, 편자미상(編者未詳), 18세기 이후. 1책(17장), 필사본(筆寫本), 36 x 23.5 cm. 청주한씨淸州韓氏 집안에서 자신들의 계보系譜에 타인이 끼어든 것을 증빙하기 위하여 편찬한 책. 숭인전崇仁殿은 기자箕子의 위패位牌를 모신 전각으로서 고려 때인 1325년(충숙왕 12)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평양平壤에 있다. 숭인전비崇仁殿碑는 1613년(광해군 5)에 세운 것으로서 비문은 이정구李廷龜(1564-1635)가 지었다. 그러나 정작 비가 세워진 것은 24년 뒤인 1637년(인조 15)의 일이다. 본서는 서두에 숭인전비崇仁殿碑를 전재하고, 이어서 2 건의 문서를 수록하였다. 하나는 만력萬曆 45년(1617:광해군 9)에 평안도 지역의 청주한씨들이 자신들 역시 기자의 후예이므로 선우씨鮮于氏의 예에 의거하여 군역軍役을 면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희康熙 3년(1664:현종 5)에 행주기씨幸州奇氏들이 역시 기자의 후예임을 내세워 군역의 면제를 청하여 허락 받은 것이다. 이어서 수록된 청주한씨전대사적淸州韓氏前代事蹟은 한덕룡韓德龍이 지은 것으로서 청주한씨를 기자의 계보와 연결시킨 것이다. 먼저 중국의 황제黃帝에서 은왕殷王 성탕成湯을 거쳐 조선朝鮮, 마한馬韓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정리하였다. 여기서 마한馬韓의 원왕元王의 아들인 우량友諒이 신라新羅로 망명하였고 탈해왕脫解王이 그를 청주淸州에 분봉分封하여 이로부터 청주한씨가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현재 자신의 집안까지 이어져 왔음을 서술하였다. 이어서 한덕룡이 쓴 서문을 수록하였는데, 그 내용은 족보를 간행할 때 우삼友三.중삼仲三이라는 자가 6대조인 진璡의 아래에 자기들의 조부祖父를 삽입하였으므로 이를 수소문하였으나 찾지 못하였고, 이에 지난 신사년辛巳年(연기미상)에 법法에 진고陳告하여 영제營題(감사의 확인서)를 받아 두었으며, 이번에 비명碑銘을 중수重修할 때 전책前冊에 의거하여 답인踏印해 둠으로써 다음번 족보族譜를 중수重修할 때 증빙으로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청주 한씨의 시조인 한란韓蘭으로부터 이어지는 계보를 정리하였다. 서문을 제외한 내용은 원래 수교受敎하여 전의全義에 거주하는 한덕일韓德一집안에 있던 것을 전서傳書해 온 것으로 되어 있으며, 계보의 말미에는 목사牧使의 확인내용이 적혀 있다. 결국 이 책은 한덕룡이 가계家系에 혼입混入이 생긴 것을 계기로 자신의 계보를 증빙받기 위하여 작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문을 작성하여 목사의 확인을 받은 것은 계미년癸未年으로 되어 있어서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족보의 혼입混入이 숭정崇禎 재갑신년再甲申年(1704:숙종 30)의 족보族譜 중간重刊 후 다시 중간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므로 18세기 이후인 것은 분명하다. 한편 현재 규장각에는 숭인전비崇仁殿碑의 탁본이 2종 있다. 숭인전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숭인전비명崇仁殿碑銘≫<규奎 10284> 및 ≪숭인전비崇仁殿碑≫<규奎 12605>의 해제 참조〔≪규장각한국본도서해제奎章閣韓國本圖書解題≫ 史部 4 pp.573∼574〕. (윤경진) 기호철; 이 해제만이 아니라 청주한씨족보 해제와 함께 보아야 합니다. 여기 소개한 비문은 여러 곳에 게재된 비문 가운데 청주 한씨들이 그들의 목적을 위해 등사한 판본 가운데 하나입니다. 비문의 내용은 달라질 것이 없고 그들의 목적을 위해 추가로 다른 것들을 실은 것입니다. 기자실기가 이이의 기자실기, 윤두수의 기자지를 게재하고 자신들이 목적하는 다른 기록을 넣어 광해군 초에 평안도에서 간행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기자실기는 기한선우 삼성 기자 후손설을 게재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믿을 수 있도록 번안한 것이지요. 기회근 나도 위지라고 해서 진수의 삼국지위지동위전을 다 찾아도 없더군요. 다른 위지라면 위략밖에는 없는데, 이 어환의 위략에 전하는 내용을 누군가 필사했고 이것이 한효중이 모아서 족보편찬에 참고한 청주한씨들의 가첩에 인용되어 전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호철 그 것 때문에 위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삼국지가 편찬된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를 모두 뒤져 위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배송지의 주에 게재된 위략의 기사를 따로 취합해 책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위략집본입니다. 필사본이 전해질 가능성도 거의 전무하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삼국지에서 기자의 후손은 절멸하였고 한지의 사람들이 기자의 제사를 모신다는 것이 위략의 기사를 인용한 것입니다. 위략에 동일한 사실을 한쪽에서는 후손이 절멸하였다고 쓰고 다른 부분에는 후손에 기한선우씨가 있다고 기록했을까요? 기회근 準後絶滅을 많은 책들은 준의 후손은 끈어졌다고 하는데 저는 다르게 봅니다. 저는 준왕의 후왕은 끈어졌다. 즉 후손은 있는데 마한이 온조왕에게 망하면서 준왕의 후손으로는 더 이상 마한 왕이 없다라고 봅니다. 제사를 받든 사람들은 당연히 우리 조상님들입니다. 기호철 準後絶滅만으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 뒷부분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를 보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요, 해석하면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祭祀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猶자를 기재하여 아직 또는 오히려의 뜻으로 후손이 절멸하였다가 옳은 해석임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猶는 한자의 어휘에서 역접어입니다. 즉 반대의 경우라는 뜻입니다. 제사를 받들지 않아야할 사람이 오히려 지금까지 제사를 지낸다는 뜻입니다. 논어 학이편의 [學如不及 猶恐失之]가 대표적인데 이를 해석하면 학문이란 미침(끝)이 없는 것 같다. (할수록)오히려 이것(공부한 것)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 두렵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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