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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1664년 최초 갑진보 서문 甲辰海西族譜序 | 기회근 | 2026-06-28 |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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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州奇氏世譜者,奇君命赫所編也。一日,袖其譜視余曰:「吾先本自殷太師。太師東封後,至四十代孫否,始以箕爲姓。子準移都金馬郡,號馬韓王。馬韓末,有孱孫三人,曰親爲鮮于氏,曰誠爲幸州奇氏,曰諒爲上黨韓氏。此吾奇氏所源,而其後代有聞人,或以勳業著,或以孝廉擧,或以道德文章名,偉績懿行相望,載簡冊,爲世大姓。 顧舊有世譜,失而不傳。而年代浸遠,子孫浸繁,使祖先遺烈、雲仍後派,將無所考信,此罔非余不肖孫責。遂慨然謀諸同宗,蒐輯放失,重修其系牒。自鼻祖平章事諱純祐以後,二十二世子孫,無內外悉錄之。仍幷以先代誌狀諸文,編爲二卷。旣成,又各出力鋟梓,以壽其傳。子盍識之?」 余受而卒業曰:諾。子之譜,自近而及遠,由親而至疏,博考廣詢,窮探遍索,積以歲月之久,費以工役之鉅,而能卒有成焉。其用意亦已勤矣!噫!觀是譜者,豈不有孝悌之心油然而生者乎?吾見世之人,雖名爲士大夫者,往往忘其先,自數世而上,或不詳其名字,況於族屬,其有能厚而不薄者耶?聞吾子之風,亦可以少愧矣。 昔程夫子云:管攝天下人心,收宗族,厚風俗,須是明譜系。嗚呼!若吾子者,可謂能是道矣。其亦可敬也已!余於奇氏,亦外裔也。旣嘉子之志,樂其譜之成也,於是乎書。 [崇禎紀元後再甲辰(1664년)] 顯宗五年 李漢命 修撰 행주기씨세보(幸州奇氏世譜)는 기명혁(奇命赫, 1627~1718) 군이 엮은 것이다. 하루는 그가 소매에 넣어가지고 온 그 보첩(譜牒)을 내게 보여주며 말하였다., 우리 집 선대는 본디 은태사(殷太師 : 기자箕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태사께서 동방(조선)에 봉해진 후 40대손 비(否)에 이르러 비로소 기(箕)를 성으로 삼았습니다. 그 아들 준(準)이 금마군(익산)으로 도읍을 옮겨 마한왕(馬韓王)이라 불렀습니다. 마한의 말기에 잔약한 세 명의 후손이 있었는데, 친(親)은 선우씨가 되었고, 성(誠)은 행주 기씨가 되었으며, 량(諒)은 상당 한씨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씨의 기원입니다. 그 후대로 이름난 분들이 계셔서 공훈과 업적으로 이름을 드러냈고, 어떤 분은 효성스럽고 청렴결백한 사람으로 추천되었으며, 어떤 분은 도덕과 문장으로 이름나 위대한 업적과 아름다운 행실이 이어지니, 역사책에 실려 세상의 큰 성씨가 되었습니다. 생각건대 옛날에 세보가 있었으나 실전되어 전하지 않습니다. 연대는 점점 멀어지고 자손은 번성하는데, 조상께서 후세에 남기신 공적을 후손들이 장차 계파를 상고하여 확인하여 믿게 만들 곳이 없게 되었으니, 이는 저 같은 불초한 자손의 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마침내 개탄스럽게 느껴 여러 일가사람들과 의논하여, 흩어지고 잃어버린 옛 족보를 수집하고 그 계첩(系牒)을 다시 엮어 내었습니다. 비조(鼻祖)이신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이름이 순우(純祐)이신 할아버지 이후 22세 자손까지 내손과 외손을 가리지 않고 모두 수록하였습니다. 아울러 선대의 지장(誌狀 : 행장과 묘지명) 등 여러 글을 합쳐 이미 두 권으로 엮어 완성하였습니다. 또한 각자 재물을 내어 모은 자금으로 나무판에 내용을 새겨 인쇄하여 그 전함이 영구히 가도록 하였으니, 그대가 어찌 발문을 써주지 않겠습니까? 내가 받아 다 읽고 나서 말하였다. 좋습니다. 그대가 엮은 족보는 가까운 곳에서 먼 곳에 미치고, 친밀한 곳에서 소원한 곳에 이르기까지 널리 상고하고 두루 물으며 깊이 끝까지 탐구하고 구석구석 찾아내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걸렸고 막대한 공력을 들여 마침내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니, 그 마음 씀이 참으로 정성스러웠습니다! 아! 이 족보를 보는 자가 어찌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불길처럼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내가 세상 사람들을 보니, 비록 사대부라 이름하는 사람들도 왕왕 자기 선조를 잊어버려, 몇 대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름(名)과 자(字)같은 조상의 이름조차 잘 모르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하물며 일가친척에 대해서야 어찌 당연히 후하게 대하고 박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즘 사대부들조차 자기 조상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가문과 혈족에 무심한데, 친척들을 두텁게 돌보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는 뜻) 더군다나 종족(宗族)이 당연히 할 수 있고 후손이 많아서 그 수가 적지 않은 자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대의 풍모를 들으니 (그렇지 못한 자들은) 조금은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옛적에 정자(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하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고 종족을 화합하며 풍속을 두텁게 하려면 반드시 보계를 밝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대와 같은 이는 이 도를 참으로 잘 실행한다 할 수 있으니, 참으로 존경할 만합니다. 나 또한 기씨 집안의 외손으로서 이미 그대의 뜻을 가상히 여기고 족보가 완성됨을 즐거워하며 이 글을 씁니다. 1664년(현종 5년) 이한명(李漢命)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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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1688년 2차 戊辰族譜序 | 기회근 | 2026-06-28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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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奇氏豈無譜也? 蓋古有而今亡矣. 吾奇譜豈久不述也? 前後諸族, 咸致力而未及完. 今南中族人輩, 修潤其前後之所未完者十二三, 而譜乃成. 諸族之於譜, 可謂勤且勞矣. 雖然, 吾族人亦知吾譜之有裨於世敎也耶? 盖吾奇實本於殷太師箕子. 玄胄杳茫, 今雖難稽, 而箕子爲奇, 史不可誣. 幸州之後, 自始祖迄今, 系牒不差. 其在麗朝, 世有令德, 功施于世. 而及至數世, 氏大數盛, 名位太過, 顧有盛滿之戒. 不幸轍 輪持國命, 而爲蘖芽矣, 極而圯, 理亦固然. 噫! 痛矣! 當此時, 雖以吾祖先之積善餘慶, 亦無以救焉. 賴有我貞武公出, 而奇氏實再造矣. 何者? 昔韓之張氏, 五世而有子房者出, 然後人始知有張氏. 晉之陶氏, 數公而有淵明者出, 然後世始知有陶氏. 夫張與陶之先, 豈無達官大爵? 而必待二公而顯者, 豈不以二公之偉節淸風, 本於天命民坛之不泯, 有以撑柱綱常, 扶植世敎而然也? 人苟知貞武之於張陶二公, 異世而相符, 殊道而同歸, 則非徒信吾奇之再造, 而亦知吾譜之有裨於世敎也, 審矣. 嗚呼! 吾祖之偉節淸風, 而其可泯耶? 若言其槪, 則公之學行, 本於《庸》、《學》, 旣純且正, 而得際遇於我世廟(세종), 位躋一品, 而歷文至魯矣. 嗚呼! 《易》曰: "知微知彰, 萬夫之望." 獨見幾於急流, 未五十而致仕, 非知微而能然乎? 目不逃於刃刺, 竟全節於溝壑, 非知彰而能然乎? 志無負於六臣, 而事尤難於先退. 實有萬夫之望, 而幾乎無得而稱. 宜乎世徒知六臣之忠之烈, 而不深知吾祖之節之高爲難及也. 悲夫! 抑又聞鄭松江 稱金河西 曰: "東方無出處, 獨有湛齋翁." 夫賢如松江, 而東方出處之正, 稱獨於河西, 其非考未詳而泛稱之耶? 愚竊以爲, 前貞武而後河西, 庸何傷於並美? 所謂其揆一也. 且公有賢孫德陽·高峰 二公, 皆以道學文章, 爲我東宗儒. 是亦豈非醴泉之流, 而興吾宗者耶? 夫如是, 則觀吾譜者, 又庶幾不以今之陵替無人, 輕吾譜, 而顧吾瑣瑣零丁之孫, 盍亦知勉? 嗚呼! 國朝之名儒列卿, 今古何限? 而空言不若著之行事. 故吾之陳世德, 必舉張陶二公, 以及夫數先生者, 豈無意乎? 言之匪誇, 謹待篤論之君子. 譜將印, 族人咸屬余爲序. 我 肅宗十四年(1688) 後孫 挺翼 參奉 松巖 우리 기씨(奇氏)에게 어찌 족보가 없었겠는가? 대개 옛날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진 것이다. 우리 기씨 족보를 어찌 오랫동안 기술하지 않았겠는가? 전후의 여러 일가들이 모두 힘을 기울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이제 영남과 호남(남중)의 문중 사람들이 그 전후에 완성하지 못했던 10분의 2~3을 보완하고 다듬어서 마침내 족보가 이루어졌다. 여러 문중이 족보에 쏟은 정성이 참으로 부지런하고 수고롭다 할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우리 문중 사람들이 또한 우리 족보가 세상의 가르침(世敎)에 도움이 됨이 있음을 아는가? 대개 우리 기씨는 실로 은나라 태사 기자(箕子)에 근본을 두고 있다. 먼 후손들의 계보가 아득하여 지금 비록 고증하기는 어려우나, 기자가 기씨가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행주 기씨로 갈라져 나온 뒤에는 시조로부터 지금까지 계보가 틀림이 없다. 고려 시대에 대대로 아름다운 덕이 있었고 공로를 세상에 베풀었다. 그러나 몇 대에 이르러 가문이 커지고 운수가 성하며 명예와 지위가 너무 지나치게 되니, 도리어 가득 차면 넘친다는 경계가 있게 되었다. 불행히도 기철(奇轍) 등이 나라의 운명을 쥐고 흔들며 (역적의) 싹이 되었고, 극에 달해 무너졌으니 이치상 당연한 일이었다. 슬프고 통탄스럽다! 이때를 당하여 비록 우리 조상들이 쌓아온 선행과 그 남은 경사(積善餘慶)가 있었을지라도 가문을 구제할 길이 없었다. 다행히 우리 정무공(貞武公, 기건)께서 나오시어 기씨 가문을 실로 다시 세우셨다(再造). 어째서인가? 옛날 한나라의 장씨는 5대 만에 장자방(장량) 같은 이가 나온 뒤에야 사람들이 비로소 장씨가 있음을 알았다. 진나라의 도씨는 몇 분의 공을 지나 도연명 같은 이가 나온 뒤에야 세상이 비로소 도씨가 있음을 알았다. 저 장씨와 도씨의 선조에 어찌 높은 관직과 큰 벼슬을 한 자가 없었겠는가? 그런데도 반드시 두 공을 기다려 가문이 드러난 것은, 어찌 두 공의 위대한 절개와 맑은 풍모가 천명과 인륜의 없어지지 않는 본질에 근거하여 강상(綱常)을 지탱하고 세교를 붙들어 세웠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만약 정무공이 저 장자방이나 도연명 두 공과 시대는 다르나 부합하고, 길은 다르나 귀결점은 같음을 안다면, 비단 우리 기씨 가문이 다시 세워졌음을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 족보가 세상의 가르침에 도움이 됨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아! 우리 조상의 위대한 절개와 맑은 풍모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대략을 말하자면, 공의 학문과 행실은 《중용》과 《대학》에 근본을 두어 순수하고도 발랐으며, 세종대왕을 만나 지위가 1품에 올랐고 문학적 명성은 노나라(공자의 고향)에 이를 정도였다. 아! 《주역》에 이르기를 [기미를 알고 드러남을 아는 것이 만백성의 우러름이 된다]고 하였다. 홀로 급류 속에서 기미를 보고 50세도 되지 않아 벼슬에서 물러나셨으니, 기미를 아는(知微) 분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러셨겠는가? 칼날의 위협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끝내 구렁텅이에서 절개를 지키셨으니, 드러난 도리를 아는(知彰) 분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러셨겠는가? 뜻은 사육신에게 부끄러움이 없었으나, 일은 (남들보다) 먼저 물러나는 것이 더욱 어려운 법이다. 실로 만백성의 우러름을 받으셨으나 거의 드러내어 칭송하지 않으셨다. 세상 사람들이 단지 사육신의 충절만 알고 우리 조상의 절개 높음이 미치기 어려움을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이 마땅하니, 참으로 슬프도다! 또 듣기로 송강 정철이 하서 김인후를 칭송하며 이르기를 [동방(조선)에 나아감과 물러남(出處)이 바른 이는 오직 잠재옹(김인후)뿐이다]라고 하였다. 송강처럼 현명한 이가 조선에서 나아가고 물러남의 올바름을 유독 하서에게만 일컬었으니, 그것은 자세히 고찰하지 못하고 막연히 일컬은 것이 아니겠는가? 내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앞선 정무공과 뒤의 하서공이 어찌 함께 아름다움을 나란히 하는 데 방해가 되겠는가? 이른바 그 법도(揆)는 하나인 것이다. 또한 공에게는 어진 손자인 덕양(기준)과 고봉(기대승) 두 공이 계시니, 모두 도학과 문장으로 우리 동방의 으뜸가는 유학자(宗儒)가 되셨다. 이 또한 어찌 단 샘물(醴泉)의 흐름이 아니며 우리 문중을 일으킨 분들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으니, 우리 족보를 보는 자들이 또한 지금 가문이 쇠퇴하여 인물이 없다고 해서 우리 족보를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며, 나같이 보잘것없고 외로운 후손들도 어찌 힘쓸 줄을 모르겠는가? 아! 우리 조정의 이름난 유학자와 높은 경상(卿相)들이 고금에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마는, 빈말은 실제로 행한 일을 기록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내가 조상의 덕을 진술하면서 반드시 장자방과 도연명 두 공, 그리고 여러 선생을 거론한 것이 어찌 뜻이 없겠는가? 하는 말이 자랑이 아니니, 삼가 식견 높은 군자의 정당한 논평을 기다린다. 족보를 인쇄하려 함에 일가들이 모두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우리 숙종 14년(1688년) 후손 정익(참봉, 호 송암)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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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1774년 3차 甲午舊譜序 | 기회근 | 2026-06-28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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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氏之先, 出自箕子. 按《史記》: 箕子與微子, 皆姓子氏. 微子旣歿, 而其子孫散處中國, 爲商氏、殷氏、宋氏、皇父氏、華氏、向氏、載氏、樂氏、孔氏, 凡九姓, 而孔氏特著. 箕子東封朝鮮, 傳國四十有一世, 遷于金馬. 又歷八世, 至元王, 始國除, 而其子得姓者三: 曰鮮于氏, 曰韓氏, 曰奇氏. 而獨奇氏之系, 旣詳且遠, 與中國之孔氏無以異焉. 然中國之人, 自三代時皆有世譜. 攷於《周官》之奠繫世, 而其制可見也. 而東人之爲譜也, 昉于高麗之式目焉. 則奇氏之能獨詳其先系, 泝之累千歲而無缺者, 豈不誠異乎哉! 今奇氏之宗, 有能繼修其譜者, 司諫院右正言彦鼎甫, 實主其事. 譜旣成, 問序於㻐. 㻐覽而歎曰: 盛哉譜也! 得聖人爲之祖, 而又有服齋高峰 二先生, 以道學名世. 爲奇氏者, 其孰不夙夜警勵, 上繼二先生不怠, 以及於聖人哉! 而譜者, 一家之文獻耳. 譜修則代明, 代明則德著, 德著而先祖之心可跡, 先祖之心可跡, 而子孫之則在是矣. 譜豈徒然哉! 《詩》曰: 無念爾祖. 其勉之哉! 噫! 昔夫子之宋得《乾坤》焉. 奇氏之於箕子, 猶殷之有宋也. 苟使夫世其文獻而不墜, 則異日中國有聖人者作, 而求觀乎箕子之遺禮, 吾知其必徵諸奇氏. 遂書以爲《奇氏族譜》序. 我 英宗五十年 趙璥 初名 俊 荷捿 기씨(奇氏)의 선조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오셨다. 사기(史記)를 살펴보면, 기자와 미자(微子)는 모두 성이 자씨(子氏)였다. 미자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자손들이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살며 상씨(商氏), 은씨(殷氏), 송씨(宋氏), 황보씨(皇父氏), 화씨(華氏), 향씨(向氏), 재씨(載氏), 악씨(樂氏), 공씨(孔氏) 등 무릇 아홉 성씨가 되었는데, 그중 공씨가 특히 두드러졌다. 기자께서 동쪽 조선에 봉해진 뒤 나라를 전수하기를 41세(世) 동안 하셨고, (그 뒤 준왕이) 금마(金馬, 지금의 익산)로 옮겨갔다. 다시 8세를 거쳐 원왕(元王)에 이르러 비로소 나라가 없어졌는데, 그 아들들이 성을 얻은 것이 셋이니 곧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 기씨(奇氏)이다. 그런데 유독 기씨의 계보만이 이미 상세하고도 멀리까지 이어져 내려와, 중국의 공씨(孔氏)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하·은·주 삼대(三代) 시절부터 모두 가문의 계보인 세보(世譜)가 있었다. 《주관(周官)》의 전계세(奠繫世, 계통을 정하는 관직)를 상고해 보면 그 제도를 볼 수 있다. 반면 우리 동방(우리나라) 사람들이 족보를 만든 것은 고려 시대의 식목(式目)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니 기씨 가문이 유독 그 선조의 계통을 상세히 하여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도 빠짐이 없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기씨 문중에 그 족보를 이어 닦는 이가 있으니, 사간원 우정언 기언정(奇彦鼎) 군이 실로 그 일을 주관하였다. 족보가 완성되자 나(조경)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족보를 살펴보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성대하도다, 이 족보여! 성인(기자)을 조상으로 모셨고, 또한 복재(기준)와 고봉(기대승) 두 선생께서 도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셨다. 기씨 된 자로서 그 누가 밤낮으로 경계하고 힘써서, 위로는 두 선생의 뜻을 게을리하지 않고 이어받아 성인의 경지에까지 미치려 하지 않겠는가!] 모든 족보라는 것은 한 가문의 문헌일 뿐이다. 족보가 닦여지면 대수(代數)가 밝아지고, 대수가 밝아지면 조상의 덕이 드러나며, 덕이 드러나면 선조의 마음을 발자취 따라 찾을 수 있고, 선조의 마음을 찾을 수 있으면 자손이 본받을 법칙이 바로 여기에 있게 된다. 족보가 어찌 헛된 것이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어찌 그대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으리오] 하였으니, 부디 힘쓸지어다! 아! 옛날 공자께서 (은나라의 후예인) 송나라에 가셔서 《건(乾)》과 《곤(坤)》의 도를 얻으셨다. 기씨에게 기자가 있음은 은나라 후손에게 송나라가 있음과 같다. 진실로 그 문헌을 대대로 전하여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훗날 중국에 성인이 나타나 기자가 남긴 예법(遺禮)을 보고자 구할 때, 나는 반드시 우리 기씨 가문에서 그것을 증명해낼 것임을 안다. 이에 글을 써서 《기씨족보》의 서문으로 삼는다.. 我 英宗五十年 조경趙璥 처음이름初名 준俊 荷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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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1774년 3차 甲午舊譜序 다른 서문 | 기회근 | 2026-06-28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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姓有譜, 尙矣. 譜之作, 其見聖人之意乎! 古者包犧正氏, 以重人倫之本; 夏后錫姓, 因其所生之土. 人之有姓氏, 將以崇恩愛, 厚親親, 遠禽獸, 別婚姻, 生相慶, 死相哀也. 不有紀世別類, 統係而聯屬之, 何以尋流知源, 由根達葉, 尊其祖, 敬其宗, 以生其孝悌敦睦之心乎? 歷代因之, 甄定門胄, 品藻人物. 有司選擧, 必於是稽. 官以世閥, 譜有世官. 或分職而管攝之, 或置局而修錄之, 于以勸孝悌敦睦. 故鄕黨之行修, 人物之道長, 冠冕之緖榮, 敎化之風美, 庸非有國所重乎? 叔季政弛, 先王之法雖不可復, 私相蒐輯, 各勉忠善, 式穀以似, 無忝所生, 則亦有裨於世敎也大矣. 余喜觀人家譜系, 仍以溯求古聖人遺意, 竊有感焉. 一日, 奇正言彦鼎氏, 襆被訪余于西坡之鳳棲山下, 齎其新刊《幸州譜》而屬爲序. 余受而閱, 作而曰: 盛矣哉, 譜也! 箕聖東來, 爲萬世父母師保, 而奇實祖之. 自元王傳至八十餘世, 名諱官爵無逸焉, 何其顯而遠也! 顯則有德, 遠則有本. 宜其行義、文章、道學、忠節, 相望於卷中, 至于今代不乏書也. 國家修明古制, 齊其政, 一其門, 使下知禁, 如管子之言, 將族望次第是求, 舍是譜奚先? 嗚呼! 譜不可不刊, 而其有待於聖朝一治之政也歟! 其非奇氏巾衍私藏之物也歟! 雖然, 不能觀感刻勵, 以善族宜家, 亦何所藉手於斯譜也? 在《易》之〈同人〉曰: 文明以健, 中正而應. 其〈大象〉曰: "君子以類族辨物. 蓋天德中正, 火體文明, 審異致同, 處不失方. 以至於四海爲一家, 中國爲一人, 情無不孚, 恩無不洽, 而類族辨物之時義備矣. 此世之世其族者, 所宜先講也. 源遠而流長, 根深而葉茂, 如奇氏者, 吾知其必益崇恩愛, 益厚親親, 以永詩禮之傳, 子子孫孫, 勿替而無斁也. 請以是揭諸卷首, 爲有譜家之倡. 尹蓍東 左相 성씨에 족보가 있음은 숭고한 일이다. 족보를 만드는 일에서 성인(聖人)의 뜻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옛날 복희씨는 씨(氏)를 바로잡아 인륜의 근본을 중히 여겼고, 하나라 우왕은 그가 태어난 땅에 따라 성(姓)을 내려주었다. 사람이 성씨를 가지는 것은 장차 은애(恩愛)를 숭상하고 친족을 두텁게 사랑하며, 짐승과 멀어지고 혼인을 구별하며, 태어나면 서로 축하하고 죽으면 서로 슬퍼하기 위함이다. 대대로 기록하여 부류를 나누고 계통을 세워 서로 연결하지 않는다면, 어찌 흐름을 찾아 근원을 알고 뿌리로부터 잎사귀에 도달하여, 조상을 존중하고 문중을 공경하며 효도와 우애, 화목한 마음을 내겠는가? 역대 왕조가 이를 이어받아 가문을 감정하고 인물을 평가했다. 관리의 선발은 반드시 여기서 상고하였으니, 관직은 가문의 내력에 근거했고 족보에는 대대로 지낸 관직이 기록되었다. 혹은 직무를 나누어 관리하거나 혹은 국(局)을 설치하여 수록함으로써 효제(孝悌)와 돈목(敦睦)을 권장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의 행실이 닦이고 인물의 도리가 자라나며, 벼슬아치의 계통이 영광스럽고 교화의 바람이 아름다워졌으니, 어찌 나라를 가진 자가 중히 여기는 바가 아니겠는가? 말세가 되어 정치가 해이해지니 선왕의 법을 비록 회복할 수는 없으나, 사사로이 서로 수집하여 각자 충성심과 선량함에 힘쓰고, 선조의 선을 이어받아 태어난 바를 욕되게 함이 없다면(無忝所生), 이 또한 세상의 가르침에 보탬이 됨이 매우 클 것이다. 나는 남의 가문의 보계(譜系) 보기를 즐겨하며 그를 통해 옛 성인의 남겨진 뜻을 거슬러 찾아보곤 하는데 남다른 느낌이 있었다. 하루는 정언 기언정(奇彦鼎) 씨가 봇짐을 싸서 서파(西坡) 봉서산 아래에 있는 나를 방문하여, 새로 간행한 《행주기씨 족보》를 가져와 서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받아 읽어보고 일어나서 말하였다. 성대하도다, 이 족보여! 기성(箕聖, 기자)께서 동쪽으로 오시어 만세의 부모이자 스승이 되셨는데, 기씨가 실로 그분을 시조로 모셨구나. 원왕(元王)으로부터 80여 세를 전해 내려오며 이름과 벼슬이 하나도 빠짐이 없으니, 어찌 그리 현달하고도 유구한가! 현달함은 덕이 있기 때문이요, 유구함은 근본이 있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 의로운 행실과 문장, 도학과 충절이 책 속에 줄지어 있어 지금 세대에 이르도록 기록이 끊이지 않는다. 국가가 옛 제도를 밝게 닦아 정치를 고르게 하고 가문을 통일하여 아랫사람들이 금도를 알게 함에 있어, 관자(管子)의 말처럼 장차 가문의 서열을 구하고자 한다면 이 족보를 버려두고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아! 족보는 간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는 성스러운 조정의 다스려지는 정치를 기다리는 것이요, 어찌 기씨 문중에서 상자에 넣어 사사로이 감춰둘 물건이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족보를 보고) 느끼어 깨닫고 스스로 힘써서 일가족을 선하게 하고 집안을 화목하게 하지 못한다면, 또한 이 족보에서 무엇을 얻겠는가? 《주역》의 〈동인(同人)〉 괘에 이르기를 "문명하면서도 굳건하고, 중정(中正)함으로 응한다" 하였고, 그 〈대상(大象)〉에는 "군자는 이로써 유를 같이하고 사물을 변별한다" 하였다. 대개 하늘의 덕은 중정하고 불의 형체는 문명하니, 다름을 살펴 같음에 이르고 처신함에 방도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해(온 세상)가 한 가족이 되고 나아가 천하가 한 사람이 된 것처럼, 정이 미덥지 않음이 없고 은혜가 흡족하지 않음이 없어야만 '종족을 유별하고 사물을 변별하는' 때의 의미가 갖춰지는 것이다. 이것은 대대로 가문을 잇는 자들이 마땅히 먼저 강론해야 할 바이다. 근원이 멀어 흐름이 길고 뿌리가 깊어 잎이 무성한 것이 기씨 가문과 같으니, 내가 알기에 그들은 반드시 더욱 은애를 숭상하고 친족을 두텁게 사랑하여 시례(詩禮, 학문과 예법)의 전통을 영원히 전하고, 자손 대대로 바뀌거나 끊임이 없을 것이다. 청컨대 이 글을 책머리에 실어 족보를 가진 가문의 제창으로 삼노라. 윤시동 좌상(左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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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1774년 3차 甲午譜跋 갑오보 발문 | 기회근 | 2026-06-28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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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奇氏有譜尚矣。粵在甲辰印海西,繼而戊辰印於湖南,而皆不免本系疎漏、外裔淆雜之失,宗人病之。 壬辰春,始定修潤改正之議,來會京師,付諸剞劂。氏族姪錫后手實主其事,工力緜、辛勤拮据,越三年始乃告訖。 旣成,余盥手開卷,竊有所感焉。非徒感之,又有所敬焉。 盖吾奇氏遠自羅麗,世有達官,功施于民,而年代旣邈,文獻無徵。逮于本朝,有若眩菴貞武公,擢自布衣,位躋一品,高風峻節,壁立千仞,炳幾先退,生爲六臣,以啓我後人。 而德陽、高峰二先生出焉,鵠立明庭,治遵三古。雖時運艱顚,不能展布其一二,而若其闡明斯道、扶植世敎之功,光垂于簡策,南指於後學。 至若三綱公之至行,無愧乎王祥之躍鯉;德豐君之殉節,有光於遼伯之取熊。而又有錦江、松巖、鳴灘、樂菴諸公,隱德林泉,專心墳典,清高之操、堅介之行,爲鄕里之敬服,作一道之矜式。吾門之稱以名族,顧不在兹歟? 鳴呼!世代推遷,家運凌遲。顧今殘孫冷裔,飢餓困窮,衣食於奔走,弁髦於名檢,百年故家遺風蕩然,不知派系之所自分,敦睦之爲何義,況敢望追念先訓、克趾前美乎?此余之所深憂永歎,必汲汲於修明譜牒,而以三數公文字弁之于卷首者也。 凡我同譜之人,尚念于兹。在家則追錦江、松巖、鳴灘、樂菴諸君子之飾身修行;立朝則慕眩菴、德陽、高峰三先生之匡時範俗;事親則法三綱公之竭力;供職不幸而遇難,則捐身殉國,如德豐君之辦得大節。 然後可以無忝其所生,而三載旅館殫精校讐之意,亦將不歸於虛地矣。 譜成之日,族人請余置一言于卷端,聊以此勉諸族人而以自警云。 後孫 彦鼎 判書 우리 기씨(奇氏) 가문에 족보가 있은 지 오래되었다. 지난 갑진년(1664년)에 해서(황해도)에서 인쇄하여 간행하고, 이어 무진년(1688년)에 호남에서 인쇄하여 간행하였으나, 모두 본계(本系)가 소홀하고 외손들이 섞여 들어가는 실수를 면치(免) 못하니 종친들이 이를 걱정해 왔다. 임진년(1772년) 봄에 비로소 보수하고 다듬어 바로잡기로 논의가 정해져 경성(서울)에 모여 인쇄를 맡겼다. 족질(族姪) 석후(錫后)가 직접 그 일을 주관하였는데, 오랫동안 노력과 정성을 들여 매우 고생스럽고 애써 고생한 지 3년 만에 비로소 마쳤음을 알리게 되었다. 족보가 완성된 후 내가 손을 씻고 책을 펴보니 가슴 깊이 느끼는 바가 있었다. 단지 감동했을 뿐만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 또한 생겨났다. 대저 우리 기씨는 멀리 신라와 고려 시대부터 대대로 높은 관직에 올라 백성에게 공을 세운 분들이 계셨으나, 연대가 이미 멀고 문헌 증거가 없다. 조선 왕조에 들어와 현암(기건) 정무공께서는 포의에서 발탁되어 지위가 1품에 이르셨고, 고결한 풍모와 높은 절개는 천 길 낭떠러지처럼 우뚝 섰으며, 기미를 밝게 살펴 먼저 물러나 생육신이 되어 우리 후손들을 열어주셨다. 이후 덕양(기준), 고봉(기대승) 두 선생이 나오시어 조정에 우뚝 서서 다스림을 고대 성현의 도에 맞추셨다. 비록 시운이 어렵고 뒤틀려 그 포부를 백 분의 일도 펼치지 못하셨으나, 성리학의 도를 밝히고 세상을 가르친 공적은 역사에 빛나고 후학들에게 길을 제시하였다. 또한 삼강공(기응세)의 지극한 효행은 왕상의 약리(잉어 잡이)에 부끄러움이 없고, 덕풍군(기협)의 순절은 요백이 곰을 잡는 용맹보다 빛난다. 그리고 금강(기효간), 송암(기정익), 명탄(기정낙), 낙암(기정룡) 여러 공께서는 수풀 아래 은거하며 덕을 쌓고 경전(墳典)에 전심하셨으니, 청고한 지조와 굳건한 행실은 향리의 존경을 받았고 온 도(道)의 본보기가 되었다. 우리 가문이 명문가라 일컬어지는 것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슬프다! 세대가 바뀌고 가운(家運)이 쇠락하여, 지금 남은 후손들은 굶주리고 곤궁하여 먹고사는 일에 분주하며 명예와 염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백 년 명문가의 유풍이 씻은 듯 사라져 파계(派系)가 나뉘는 바를 알지 못하고 화목의 의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니, 하물며 감히 선조의 가르침을 추념하고 앞선 미덕을 이어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깊이 근심하고 길이 탄식하며 반드시 족보를 수정하고 밝히는 일에 급급했던 이유이다. 그리하여 두세 어른의 글을 권두에 실어 놓는다. 무릇 우리 문중의 사람들은 이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집에 있을 때는 금강·송암·명탄·낙암 여러 군자의 몸을 닦고 행실을 가다듬음을 쫓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현암·덕양·고봉 세 선생의 시대를 바로잡고 풍속의 모범이 됨을 사모하며, 어버이를 섬길 때는 삼강공의 힘을 다함을 본받고, 불행히 난리를 만나면 몸을 바쳐(捐身) 나라를 위해 순절하여 대절을 지켜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조상님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며, 3년 동안 타향 여관에 머물며 정신을 쏟아 교정한 정성 또한 헛되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족보가 완성된 날에 일가들이 나에게 책 끝에 한마디 남겨달라고 청하기에, 애오라지 이것으로써 여러 문중 사람들을 권면하고 나 또한 스스로 경계하노라. 후손 기언정(奇彦鼎) 판서(判書)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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